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96)화 (196/207)

58화. 빙의에 관하여.

다음 날, 유아는 황궁을 떠났다.

예린에게 천천히 생각해 보라는 내용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본래 조금 더 황궁에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려던 유아가 급하게 돌아간 이유는 루비아와 주연이 신전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유아는 두 사람이 신전으로 찾아올 예정이라는 건 알았지만 아카데미와 신전은 상당히 떨어져 있으니 여유가 있으리라 판단했다.

이틀 정도는 예린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 여겼으나 두 사람의 도착이 예상보다 빨랐다.

두 사람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아쉬움을 뒤로하고 유아는 제가 맡은 바를 다 하기 위해 신전으로 향했다.

뭐, 향했다고 해 봐야 근처의 텔레포트 포탈로 간 것이 다지만 말이다.

텔레포트는 여전히 안전하지 않았으나 뛰어난 실력의 대마법사가 세 명쯤 투입되면 한 명은 확실하고 안전하게 목적지로 보낼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대마법사 셋의 체력과 마력을 쭉쭉 빨아 유아는 신전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자신을 맞이하는 수십 명의 신관을 바라보다, 유아는 생각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많은 인원이 올 필요가 있을까.

성녀가 돌아오면 신전의 모든 인원이 나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부담스러웠다.

“아이들에게로 안내해.”

그들을 애써 무시하며 유아는 발걸음을 옮겼고.

그 시각 루비아와 주연은 가장 좋은 응접실에서 유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역시 넌 재수 없어.”

어떻게 겨우 조연 주제에 성녀한테까지 이렇게 예쁨을 받는 거야.

자신의 말에는 단 한 번도 가능하다 말하지 않았던 성녀가 마차까지 보내며 신전으로 부르다니.

저 이기적인 애가 대체 뭐라고 다들 이렇게 예뻐하는 것인지.

“너라고 재수 있는 줄 아나.”

주연의 말에 루비아 또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루비아는 지금, 둘이서 유아를 기다리는 상황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아의 부탁이니 신전에 오긴 했는데.

자리를 비운 동안 밀린 수업과 진도를 어떻게 따라잡아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흥, 그래도 덕분에 돌아갈 수 있을 테니 고맙다고는 해둘게.”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무슨.

이어진 주연의 말을 무시하며 루비아는 교과서를 폈다.

그녀가 지금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딱히 돌아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삶이 나빴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싫고 좋냐로 따진다면 좋은 편에 속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루비아는 이 세계의 삶이 더 좋았다.

좋은 가족과 좋은 친구, 아카데미는 즐거웠으며 사람들은 상냥했다.

그리고 또 소중한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슬퍼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전생의 루비아는 시한부였다.

죽음을 기다릴 시간도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할 시간도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전생의 미련이 없을 수 있었다.

뭐, 돌아갈 자리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 말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루비아는 만약 자리가 있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었다.

이 세계도 똑같은 자신의 삶이니까.

그러니까, 어서 쟤 좀 돌려보내 주세요.

그런 루비아의 기도가 들리기라도 한 것인지 문이 열리고 유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구나, 루비아 그리고 엘리아네.”

유아가 등장하기 무섭게 주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저는 언제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것인지 주연 빠른 속도로 인사를 마치고 본론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둘의 사이를 루비아가 끼어들었다.

“성녀님! 보고 싶었어요.”

방금까지는 주연과 한방에 단둘이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오랜만에 유아를 만나니, 그런 감정들은 한 번에 녹아 사라졌다.

“나도 보고 싶었단다, 루비아.”

그렇게 말하며 루비아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유아는 주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주연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해 많이 짜증이 나 있었는데, 예린 옆에서 푹 쉬니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어린아이니까, 그럴 수 있지.

라고 생각이 바뀌었으니 말이다.

“엘리아네, 너도 말이야.”

그런 유아의 말에 주연은 방금까지 돌아갈 방법만 찾던 것이 민망해졌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끄덕였다.

“예상했겠지만 내가 두 사람을 부른 이유는 전생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야.”

유아의 말에 주연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말대로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직접 들으니 더더욱 실감이 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야. 돌아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해.”

이어진 유아의 말에 주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절대로 조건에 포함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애초에 그러지 않더라면 유아가 그들을 신전까지 부를 이유도 없었으니까.

“다행히도 너는 그 모든 조건에 충족하긴 하나,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죠?”

주연의 질문에 작게 한숨을 내쉰 유아는 주연과 루비아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게 내가 루비아를 부른 이유야, 엘리아네를 깨우기 위해서는 그녀의 무의식으로 들어가 줄 사람이 필요해.”

깨우지 않고 강제로 깨우는 방법 또한 있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엘리아네의 정신이 온전치 못할 수도 있었다.

유아는 아이에게 그런 잔인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주연뿐만이 아니라, 엘리아네까지 구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었다.

“도와줄 수 있겠니? 루비아.”

아니, 왜 하필 저예요?

처음 자신을 같이 불렀을 때부터, 무언가 시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루비아는 딱히 주연을 돕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라 하기도 상황이 되지 않았다.

빙의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도.

빙의자들에게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릴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나밖에 없기는 하네.

사실 그런 이유가 없었더라도 루비아가 유아의 부탁을 거절하는 일은 생길 리 없었다.

하지만 주연을 돕기 싫다는 마음 때문에 루비아는 한참을 망설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녀의 대답에 안도한 표정이 된 유아는 환하게 웃으며 루비아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 루비아.”

유아의 대답에 루비아는 주연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는 할 말 없냐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주연 또한 바닥을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고마워.”

처음이었다.

그녀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진 것은.

간절하구나, 너도.

그래서 루비아는 조금 주연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야, 죽음을 받아들이고 주변과 인사할 시간이 충분했지만 주연은 그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지금까지의 행동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 때문이 아니라, 성녀님이랑 엘리아네를 도와주러 가는 거야.”

“그래도, 고마워.”

평소와는 다르게 고분고분한 태도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차피 가겠다 결정한 것이니까.

루비아는 더 이상 주연에게 대답하지 않고 유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는 준비 되었어요.”

“그러면 두 사람 모두 따라오렴.”

유아가 두 아이를 데려간 곳은 흰색 천과 백금으로 꾸며진 커다란 방이었다.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한참이나 주변을 돌아본 루비아는 입을 열었다.

“의식을 치르는 방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유아는 입을 열었다.

“…아니, 내 방이란다. 너희가 누울 침대만 있으면 다른 건 필요 없으니.”

확실히 성녀의 방이면 침대도 있고 다른 사람이 들어 올 일이 없긴 했다.

“죄송합니다.”

“아냐, 괜찮단다. 어차피 내 취향도 아니야.”

유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이런 식으로 꾸민 신관들에게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정신병원도 아니고, 전부 흰색이 뭐야, 대체.

이어진 그녀의 말에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루비아는 조심스럽게 유아의 침대에 걸터앉았고.

눈치를 보던 주연 또한 침대 끄트머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괜찮으니 둘 다 편하게 누워보렴.”

커다란 유아의 침대는 두 사람은 고사하고 성인 남성 세 명까지도 넉넉하게 누울 수 있는 크기였다.

그 덕에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누울 수 있었고.

그런 두 사람의 사이에 걸터앉아 이마에 손을 뻗은 유아는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다 준비되었니?”

그녀의 질문에 주연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하였으나.

루비아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듯 유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가 엘리아네를 깨우지 못하면 어떡하죠?”

자신감이 떨어져 보이는 루비아의 모습에 유아는 작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상냥한 손길에 마음이 조금이나마 안정되는 듯했다.

“너라면 분명 깨울 수 있을 거야. 아니, 네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야.”

무엇 때문에 엘리아네가 잠들어 깨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지 알 수도 없는데 유아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용기를 주기 위해 하는 말이더라도 제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다는 말은 솔직히 부담됐다.

그래도 유아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이니, 분명 이유가 있겠지.

루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해볼게요.”

루비아의 유아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래, 그럼 잘 자렴.”

그 말을 끝으로 유아의 양손에서 밝은 하얀 색의 빛이 떠올랐고.

그 빛은 순식간의 방을 가득 채워버렸다.

* * *

“…여긴.”

루비아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방 안이었다.

한눈에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방에 루비아는 한참 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엘리아네가 살던 곳은 여기구나.

루비아도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지금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엘리아네의 과거에 대해 루비아가 고민하고 있던 그 순간, 벌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한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루비아는 깜짝 놀라 옷장 안으로 몸을 숨기려 했지만 당연하게도 옷장은 그녀의 손을 통과했다.

엘리아네의 무의식 속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은 루비아는 작게 안도하며 마음 편히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늦게 발견 할 수 있었다.

여인의 손에 붙잡혀 있는 한 소녀를.

루비아가 소녀를 발견하기 무섭게 커다란 쿠당탕 소리와 함께 소녀는 방구석에 내팽개쳐졌고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이런 식이니까, 아빠도 널 버리지.”

“죄송해요….”

언제나 밝은 푸른색으로 반짝이던 머리카락은 먼지가 가득 달라붙어 진한 남색이었고 생기가 돌던 푸른 눈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저절로 헛웃음이 지어졌다.

엘리아네가 불우한 과거를 지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비참했을 줄이야.

그녀가 마음의 문을 닫은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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