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빙의에 관하여.
루비아는 차마 지켜볼 수가 없어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일방적인 폭력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상황이 얼마나 이어졌던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막고 있던 귀에도 들려오던 소리가 멈추었고 지친 여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쯧, 쓸모없는 것. 이런 식이면 쫓아내는 수밖에 없어.”
붉어진 자신의 손과 덜덜 떨고 있는 엘리아네를 바라보며 짜증을 낸 여인의 말에 엘리아네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렇게 맞으면서도 눈물 한 번 흘리지 않던 루비아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을 보고서야 만족한 것인지 웃은 여인은 루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그래, 가만히 방 안에만 있으라고.”
그렇게 말한 여인은 엘리아네에게 빵과 작은 쿠키 하나를 던져주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엘리아네는 기쁘다는 것처럼 그것을 먹기 시작했고.
루비아는 방에서 나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진짜, 미친 사람이네.
루비아는 여인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 루비아의 숨소리를 들은 엘리아네가 그녀를 돌아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루비아는 가라앉은 엘리아네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착각… 이겠지?
하지만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엘리아네의 서신이 루비아에게 정확히 고정되어 있었다.
내 뒤에 뭐라도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루비아가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그녀가 떠난다고 생각한 것인지 엘리아네가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혹시, 요정님이세요?”
방금까지 가라앉아 있던 푸른 눈이 처음으로 생기를 찾고 반짝였다.
그랬기에 루비아는 차마, 그녀의 부름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근데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루비아는 스스로를 요정이라 칭할 만큼 뻔뻔하지는 않았으나, 지금은 그것 말고 다른 핑곗거리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핑곗거리를 찾기 위해 한참을 망설이던 루비아의 모습에 엘리아네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아까처럼 빛을 잃고 어둡게 가라앉은 그녀의 눈빛에 루비아는 결국 입을 열었다.
“맞아, 난 요정이야. 한 번에 내 정체를 알아맞혀서 당황해버렸지 뭐야?”
어색한 변명과 연기를 곁들여서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순수한 어린아이를 속이기에는 충분한 모양이었다.
루비아의 말에 엘리아네의 두 눈이 다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요정님이셨군요!”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아네는 루비아의 손을 잡으려다 머뭇거렸다.
깨끗하고 우아한 복장의 루비아에 비해 자신은 한없이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루비아가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아주려 했으나 당연하게도 두 사람의 손은 닿지 못했다.
“요정님과는 닿을 수 없는 거군요.”
이어진 엘리아네의 말에 루비아는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글거리긴 했지만, 엘리아네에게 상처 주는 것보다야 이게 훨씬 나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요정님은 무슨 일 때문에 오신 건가요?”
너를 깨우러 왔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말을 지어내려 망설일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엘리아네가 왜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나는 네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 왔어.”
엘리아네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
그리고 자신만이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일.
그건 바로 자신이 엘리아네의 외로움을 덜어 주는 것이었다.
“친구…!”
루비아의 말에 엘리아네의 푸른 눈동자가 맑은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정말, 저와 친구가 되어주실 건가요?”
어떻게,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그토록 때릴 수 있었을까.
자신을 바라보는 순수한 눈동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한 루비아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말고도 너와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많아, 그니까. 눈을 떠 주지 않을래?”
그 순간, 엘리아네의 표정과 함께 루비아의 주변이 어둡게 변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깜짝 놀란 루비아가 엘리아네를 돌아보자, 순식간에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성장해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거짓말.”
그녀의 말과 함께 루비아는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느낌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밖은 두렵고 어른들은 무서워, 그 누구도 날 원하지 않아.”
하지만 떨어지는 와중에도 루비아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엘리아네의 마지막 말을.
루비아는 순간 정신을 잃었고 그녀가 깨어났을 땐 다시 아까의 낡은 방 안이었다.
“요정님 어디 다녀오셨어요?”
아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엘리아네와 함께.
성녀님, 이거 정말 제가 할 수 있는 일 맞나요?
말 한마디로 엘리아네가 평생 지녀온 상처를 금방 지울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밖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함께 나가자 해도 방금처럼 엘리아네가 그 기억을 지워버릴 테니까.
루비아의 시선에 창문이 들어왔다.
어둠이 잔뜩 내려온 창문은 밤이라 하기엔 과하게 어둡고 빛 하나 들어 오지 않고 있었다.
설마.
그렇게 생각한 루비아는 창문으로 달려가 창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루비아의 예상대로 창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 집 하나가, 엘리아네의 전부이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원작에서 읽었던 엘리아네의 과거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방 하나에 갇혀 평생을 학대받아 오다, 죽기 직전 기적적으로 백작가인 아버지에게 구조를 받았던 그녀의 과거가 말이다.
소설 속에서는 조금의 극적인 상황과 독자의 흥미를 요구하기 위해 쓰인 것이었지만 이렇게 느끼니 끔찍하네.
루비아는 이를 갈았다.
엘리아네는 평생을 이 작은 곳에서 살아온 것이었다.
하.
루비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꿈속에 갇혀 있을 거면, 행복하기라도 하던가.
하지만 루비아는 그녀가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엘리아네는 두려운 것이었다.
매일 어머니에게 맞는 맞더라도 밖으로 나가 지내는 것이 더 괴로운 것이었다.
대체 왜, 누가 너를 이토록 겁에 질리게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할 일은 알 것 같네.
밖은 두렵지 않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너를 원하고 있는지, 너에게 알려 주는 것.
“나는, 너와 함께 다닐 아카데미에 다녀왔어.”
“아카데미요?”
그러니 천천히 시작하자.
조금씩 너에게 이야기 해 줄게.
바깥세상이 어떤 곳인지, 두려울 것 하나 없다는 걸 말이야.
루비아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카데미가 어떤 곳이며, 자신에게 어떤 친구들이 있으며 배우는 과목은 어떻고 얼마나 즐거운 곳인지.
하지만 루비아의 말이 끝나자 엘리아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요, 밖이 그렇게 즐거운 곳일 리 없어.”
엘리아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도망친 첫날 자신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었다.
루비아의 눈앞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집들이 널려 있었으며 씻지 못해 더러운 사람들이 비쩍 말라 있었다. 게다가 이곳저곳에 시신이 널브러져 있어 눈을 돌려도 시야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태어나 처음 보게 된 광경은 루비아의 눈에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교과서에서나 본 이 장면은 흔히 말하는 빈민촌이었다.
이 정도로 상황이 안 좋은 곳은 교과서에서도 본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트라우마로 남을 만하네.
루비아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에게 달려오는 엘리아네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들에게 쫓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서린 끔찍한 욕망을 읽는 순간 루비아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도망쳐 엘리아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남자들은 루비아를 통과했고 어느새 커다란 덩치를 한 남자와 나타난 엘리아네의 어머니가 다른 남자들을 막아섰다.
그렇게 엘리아네는 다시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돌아갔고.
루비아는 일련의 과정을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왜 저 순간에 스스로를 가둔 것인지.
낡은 집에서 폭력에 노출되더라도 스스로 이곳에 갇히고자 했던 이유는 엘리아네가 살아가며 가장 행복을 느낀 순간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우 쿠키를 받았던 순간. 그때가 그녀에게 가장 큰 행복이었다.
정말 엘리아네가 안쓰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그래서 더 엘리아네를 데려가고 싶어졌다.
알려주고 싶었다.
이 세상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지.
그저 쿠키 하나가, 평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끝이 난다는 건 너무나 비참했다.
성녀님의 말대로 원작이, 수많은 미래 중 하나였다면.
두려움을 이겨내기만 한다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정도로 빛나고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너는 알고 있었을까.
너의 아버지가 겨우 널 찾아냈을 때 얼마나 행복해하셨는지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본인이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빛날 수 있는 사람인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엘리아네 스스로가 그 사실을 알아주길 바랐다.
루비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강하게 쥔 순간, 다시 한번 주변이 바뀌었다.
그리고 루비아는 다시, 돌아왔다.
아까 엘리아네를 처음 봤던 그 순간으로.
다시 한번 여인이 엘리아네를 구타했고 빵과 쿠키를 주고 떠났으며.
루비아는 또 한 번 엘리아네와 마주쳤다.
“혹시, 요정님이세요?”
처음으로 돌아온 만큼 엘리아네가 루비아에게 질문하는 것도 반복되었다.
그녀의 질문에 루비아는 이번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 대신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네 친구가 될 사람이야. 그리고 나는.”
루비아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밖을 보기 위해 열어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창문을 향해서.
다시 한번 창문을 연 루비아는 당황한 엘리아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와 같은 아카데미를 다닐 것이고.”
이건 도박이었다.
이곳이 엘리아네의 무의식 속이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다면.
주연이 엘리아네로 살았을 때의 기억 또한 남아있을 것이었다.
제발 예상이 맞길 바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예상이 맞았던 것인지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던 창밖에, 아카데미의 모습이 나타났다.
저 건물이 이렇게 반가웠던 것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루비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먹었던 쿠키보다 몇 배나 더 맛있는 쿠키를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러자 이번에는 루비아의 앞에 아카데미 앞에서 팔던 쿠키가 떨어졌다.
“너에게는 많은 친구가 생길 거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아네의 주변에 지구의 옷을 입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연의 영혼도 엘리아네의 몸에 섞여 있는 상태인데다 무의식 속이라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런 모습에 조금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루비아는 엘리아네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 사랑해 주는 가족들도 생겨날 거야.”
다행히 이번에는 이 세계의 엘리아네의 가족들이 나타났고.
자신을 꼭 닮은 남자의 모습에 엘리아네 또한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마.”
그렇게 말하며 루비아는 손을 내밀었고.
어느 새 성장한 엘리아네는 머뭇거리다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여전히 루비아의 손은 엘리아네를 통과했고 루비아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나는 더 이상 너의 환상 속에 존재하지 않아. 말했잖아, 나는 바깥의 너와 친구가 될 거라고.”
그렇게 말하며 루비아는 먼저 손을 뻗어 엘리아네를 붙잡았고.
드디어 두 사람의 손이 닿았다.
루비아가 엘리아네와 함께 작은 창문을 뛰어넘어 밖으로 나가는 순간.
환한 빛이 두 사람의 몸을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