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98)화 (198/207)

60화. 빙의에 관하여.

루비아가 눈을 떴을 땐 주변이 온통 하얀색이었다.

아직 자신이 엘리아네의 꿈에 갇혀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란 루비아는 주변을 돌아보고서야 뒤늦게 안심할 수 있었다.

성녀님의 방이구나.

“루비! 고생했어.”

몸을 일으킨 순간 걱정스러운 눈을 한 유아가 그녀에게 다가와 강하게 끌어안았고.

그제서야 루비아는 자신이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마지막 상황으로 봐서는 깨운 것 같긴 했는데, 엘리아네가 눈을 뜨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네, 그런데 엘리아네가 깨어났다고는 확신할 수 없어서.”

그 순간 고개를 저은 유아가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냐, 정말 고생했어 루비아.”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을 돌아본 루비아의 두 눈에 잠들어 있는 엘리아네의 모습이 들어왔다.

…성공한 건가?

아직 확신 할 수 없는 상황에 루비아는 망설이다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손의 주인을 알아차리는 순간 루비아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아네가 깨어났다는 것을.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나, 조금 아쉽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좋지 않은 일들 뿐이긴 했지만 주연에게도 정이 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뭐, 그녀가 원하던 대로 됐으니까.

이 세계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잊은 채, 그토록 돌아가길 바랐던 지구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겠지.

“…주연은 돌아간 건가요?”

루비아의 질문에 유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녀라면 아마, 지금쯤 눈을 떴을 거야.”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잘 끝난 건가.

전부 다 끝났다는 말을 유아에게서 듣자, 온몸의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져 루비아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쉰 루비아가 옆으로 돌아본 순간.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과 마주쳤다.

반짝이는 푸른 눈은 곧이어 예쁜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안녕, 요정님.”

그런 사랑스러운 모습에 루비아 또한 환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반가워, 엘리아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고 그 정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유아였다.

엘리아네에게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유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일단, 상태는 괜찮아 보이네. 주연이 있었을 때의 기억은 가지고 있니?”

유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엘리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은 기억나요.”

기억을 더듬던 엘리아네는 루비아를 돌아보더니 그녀의 귀에 속닥거렸다.

“얘, 되게 성격 더럽다.”

엘리아네의 솔직한 말에 루비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두 아이와는 다르게 유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예린은 피오라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

유아가 고민에 빠져 있던 그 순간 자신을 부르는 엘리아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주연이 떠나기 전에 고맙다고 전해달랬어. 루비랑 성녀님에게.”

그녀의 말에 유아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대화를 나눈 것이니?”

“루비가 사라지고, 주연이 저한테 말을 걸었어요.”

엘리아네의 말에 유아는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엘리아네가 살아있냐는 사실을 알았냐는 유아의 질문에 주연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고 말이다.

유아가 알아낸 빙의의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한 가지가 죽어서 죽을 운명이었던 사람의 몸에 들어오는 것.

또 다른 한 가지가.

흔히 말하는 식물인간의 상태가 되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아도 최근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안에 있는 또 다른 영혼의 존재를 말이다.

주연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의식하기 전까지 절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숨어있던 작은 영혼을 말이다.

그런데 대체 왜, 예린은 피오라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일까.

어찌 보면 간단한 이유였다.

영혼끼리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기 위해서는 제 안에 또다른 영혼이 잠들어 있다는 걸 알아야만 했다.

유아도 제 안의 영혼을 의식하려 시도한 이후에야 알게 되었으니.

만일 본래 몸의 주인 격인 영혼은 깨어났을 때 자신의 몸을 다른 영혼이 차지하고 있다면 보통은 말을 걸 테니 빙의한 자도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린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예린이 제 안의 영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피오라가 예린에게 말을 걸길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깨어나고 싶지 않아 했다.

예린이 아예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엘리아네와는 다르게 꽤나 오래전에 눈을 떴음에도 의도적으로 예린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 것이었다.

애초에 하나의 몸에 두 명의 사람이 살아있는데, 어떻게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저 말을 다르게 해석한다면.

피오라는 주연이 엘리아네에게 한 것처럼 언제든지 예린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것이었다.

“얘들아, 신관들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렴.”

거기까지 생각한 유아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판단이 섣불렀다.

확실하지 않은 일을 바로 예린에게 가르쳐줘선 안 되었다.

만약 자신의 예상대로 피오라가 깨어났음에도 자신의 존재를 예린에게 숨기고 있다는 것이라면.

자신이 예린에게 피오라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준 지금,

예린은 피오라를 찾게 될 테니 그녀도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연과 엘리아네의 경우처럼 피오라가 만약 예린이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예린은 본인의 선택권 없이 강제로 돌아가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젠장.

거기까지 생각한 유아는 마차가 있는 곳으로 급하게 움직였다.

* * *

“더 이상 기다리기 싫은데, 슬슬 일어나지?”

그 시각, 나는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뜬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나, 아니 피오라의 모습이었다.

“반갑네.”

살아 있을 거라고는 했지, 나한테 말을 건다는 얘기는 없었잖아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오라를 바라봤다.

“뭘 그리 놀라고 그러나, 죽은 사람 보듯.”

죽은 사람이 맞지 않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오라를 바라봤다.

이상할 정도로 나와 똑 닮은 모습에서 왜인지 이질감이 느껴진다 생각한 그때.

평소와 다르게 머리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내 머리는 허리까지 오는 긴 장발이었는데 짧게 잘려있었다.

설마.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들자, 우유처럼 새하얀 피부가 아닌 조금 탄 살구색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내 몸이었다.

피오라가 아닌, 내 몸 말이다.

“뭘 그리 놀라지? 그게 원래 자네의 몸 아닌가.”

당황한 나에 비해 담담한 목소리였다.

마치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던 사람처럼.

“저를, 돌려보낼 건가요?”

그 뒤로 이어진 질문에 피오라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딱히, 그럴 생각은 없네.”

“그럼, 대체 왜?”

내 질문에 피오라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냥, 조금 궁금했을 뿐이라네. 어떻게 자네가 그렇게 사랑받을 수 있었는지. 원작이라 하는 곳에서의 나는 그러지 못했는데 말이야.”

그렇게 담담하게 말하는 피오라는 정말로 내 예상 속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히스테리가 심하고 신경질적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사랑받고 자랐더라면. 나도 그대처럼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이어진 피오라의 말에 그녀가 조금, 불쌍하다 느껴졌다.

단 한 순간도 사랑받지 못한 채,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피오라의 말에는 조금 모순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대에는 주변의 책임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오히려 미움받기 충분한 행동만 해왔잖아요. 결혼했다고 처음 본 사람과 바로 가족이 될 수는 없죠. 하물며 그들은 당신의 보호자도 아니었어요. 당신을 사랑해 줄 의무가 없다고요.”

이어진 내 말에 피오라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군.”

그렇게 말한 피오라는 조금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 강제로 공작가에 보내졌을 때, 마차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대가 나를 대신하고 있더군.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받으며 말이야.”

단 한 순간도 피오라가 내 안에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 없는 나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피오라는 계속 내 안에서 모든 걸 지켜봤다는 뜻이 아닌가.

그런 내 생각이 겉으로 티가 난 모양이었다.

“아, 걱정하지 말게. 내가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으니.”

“그건 정말 다행이네요.”

이어진 내 대답에 작게 키득거린 피오라는 다시 표정을 굳혔다.

“나는, 삶에 미련 따위 없었네.”

“그러니 자네는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선택하게,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말이야.”

그 말에도 왠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피오라를 죽이는 것 같잖아.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나는 악녀 피오라 아닌가. 그대가 아니었다면 원작이라 하는 것과 다름없이 흘러갔을 테고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네. 그대와 이런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고 말이다.”

저 눈치는 좀 배우고 싶네.

역시 악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왜인지 찝찝함을 덜어낼 수 없어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런 내 대답에 작게 웃은 피오라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담감을 주거나, 내 몸을 돌려달라고 할 생각은 아니야.”

“그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네.”

분명 나와 같은 모습이었을 텐데, 왜 이리 낯선 느낌이 들까.

나는 슬퍼 보이는 그녀의 미소를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피오라가 사랑받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네.”

그렇게 피오라는 내게 그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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