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99)화 (199/207)

61화. 나의 행복을 위하여

피오라의 말을 듣는 순간, 조금씩 마음속의 무언가가 틀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지금까지 그녀의 몸을 빼앗고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녀가 악녀이니까.

그녀는 어차피 죄를 짓고 죽을 운명이니까.

하지만 지금 내 눈앞의 피오라는 절대로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만약 내가 강제로 그녀의 몸을 빼앗은 것이고 그로 인해 그녀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없앤 것이라면.

“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군.”

그 순간 들려온 피오라의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대는 빙의의 조건이 뭐라고 생각하나?”

“그건 잘, 모르겠어요.”

머뭇거리다 대답하자 피오라의 표정이 조금 쓸쓸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배경이 바뀌었고.

우리는 처음 내가 빙의했을 당시에 봤던 마차 위에 타 있었다.

“공작가로 처음 가던 날,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어. 화려한 마차와 드레스를 볼 때마다 내가 상품처럼 느껴졌지.”

그녀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자, 다시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오색찬란한 보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따라오면서도 탐탁지 않아 하던 시녀들과 거절해도 강제로 주도하여 결혼을 성사시킨 부모님.”

거기까지 말한 피오라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나는 그래서 죽고 싶었어.”

그 말을 하는 순간 처음으로 피오라의 표정이 담담해 보였다.

그래서 그 말이 더더욱 슬프게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내 업보이니까, 받아들일 테니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었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그렇게 말한 피오라는 손을 뻗어 부드럽게 나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랬더니, 그대가 나타났지.”

피오라는 죽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고.

나는 살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이 바뀐 것이었다.

같은 시간, 다른 차원에서 우리 두 사람이 완전히 다른 것을 소망했기에.

“…그렇군요.”

항상 궁금했다.

대체 왜 공작가로 오는 마차에서 내가 빙의한 것인지.

하필 왜 그 순간인지.

그때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었구나.

“나에게 그대는 여러 면에서 은인이야, 그러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선택하도록.”

그녀의 말에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바로 선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친구들과 가족들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의 친구들과 가족들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게는 둘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도 잘 모르겠어요.”

내가 한참을 고민하다 대답하자, 피오라는 잠시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대는 항상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더군, 다른 건 생각하지 말아.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그대가 가장 행복할 수 있을지야.”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

왜 그렇게는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계속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말이다.

그건 나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더 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도 그러길 바랄 테니.”

정말 이상하게도 피오라의 말을 들으며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내가 가장 행복한 곳은 누가 뭐래도.

그곳이었으니 말이다.

“고마워요.”

내 대답에 웃음을 터트린 피오라는 마차의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나가도록 하게, 그대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곳으로.”

피오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문고리를 돌렸다.

달칵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문이 열렸고.

밖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확신 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세상 누구보다 더욱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 * *

“예린?”

푸른색의 눈이 떠진 것을 확인한 바리다스는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안하군, 내가 그 이름의 주인이 아니어서.”

하지만 아쉽게도 눈을 떠 말하는 이는 그 이름의 주인이 아니었다.

언제나 밝은 빛을 띠던 푸른 눈은 냉철하게 가라앉아 있었으며.

풍기는 분위기 또한 예린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그랬기에 바리다스는 어렵지 않게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의미는 한 가지였다.

예린이 떠났다는 것.

“…예린은. 돌아간 겁니까?”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말 한마디 없이 떠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바리다스는 피오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세상을 잃은 것만 같은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던 피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저에게 남긴 말은 없습니까?”

“아쉽게도.”

이어진 대답에 바리다스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슬퍼 보이는군.”

이어진 피오라의 질문에도 바리다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피오라는 바리다스가 감정을 추스르길 기다리며 묵묵히 그를 지켜보았다.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기만 하던 피오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망은, 안 하는 건가?”

그 질문에야, 바리다스는 피오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텅 빈 그의 붉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피오라는 아주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린은 그저, 스스로의 행복을 택한 것입니다. 그녀가 저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제가 부족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이어진 대답에 그녀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는 그대들이 정말로 신기하다고 생각하네.”

그 말과 함께 피오라는 바리다스에게 다가갔다.

“그러니 앞으로도 그렇게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내줬으면 좋겠군.”

피오라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바리다스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고.

피오라는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사랑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줘서 고맙네.”

그 말을 끝으로 피오라가 쓰러지듯 넘어지니 바리다스가 반사적으로 안아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떠진 푸른 눈은, 그에게 익숙했던 맑은 빛을 띠고 있었다.

“라스.”

그래서 바리다스는 자신을 부르며 미소 짓는 예린의 모습에, 왜인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잘 잤어요?”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묻자.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답이 들려왔다.

“네, 행복한 꿈이었어요. 당신과 아이들이 나왔거든요.”

그 말에 바리다스는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예린이 자신을 선택해 주었다는 것을.

그 사실이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기뻤다. 감정을 채 갈무리하지 못하고 바리다스는 예린의 목과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입을 열었다.

“그 꿈보다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런 바리다스의 말에 웃음을 터트린 예린은 입을 열었다.

“지금도 충분한걸요.”

그 순간 바리다스가 고개를 들고 예린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란 것도 잠시 이어진 말에 예린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당신이, 보석이 가지고 싶다고 한다면 광산을. 나라를 가지고 싶다면 제국을.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뤄 드리겠습니다.”

정말로 진지해 보이는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웃음을 터트린 예린은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아무리 당신이어도 바로 이뤄주기 힘들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예린은 발뒤꿈치를 들어 진지한 표정의 바리다스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 뒤로 세 발자국쯤 멀어진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항상 말하잖아요. 제가 가지고 싶은 건, 당신을 닮은 남자아이라고.”

그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바리다스는 홀린 듯 그녀에게 다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바리다스는 그녀를 안아 들어 침대에 눕히며 입을 열었고.

그가 이렇게 바로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지 않았던 예린은 민망함에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정 안 된다면, 절 닮은 남자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해도 되는 것이니.”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낀 건.

그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힘들면 언제든 말해요.”

그렇게 바리다스는 신전에서 유아가 급하게 방문했다는 말이 들려오기 전까지, 예린을 놓아주지 않았다.

* * *

주연이 돌아간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엘리아네는 바로 아카데미로 돌아가지 않았고 집으로 향했으며 아마 당분간 돌아올 예정이 없다고 했다.

그로 인해 루비아의 아카데미 생활은 이전보다 상당히 지루해졌다.

주연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싫어하긴 했으나 그간 마주하면서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 많이 정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심심해.

렌이 선생님의 부름으로 자리를 비우자, 혼자가 된 루비아는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루비, 혼자 뭐 하고 있어?”

“오빠!”

지루해하던 루비아를 곧잘 발견해 함께한 사람은 다름 아닌 토마였다.

최근 대화한 토마는 생각보다 취향이 잘 맞았으며 렌이 자리를 비운 틈이면 어디선가 그가 다가와 놀아주고는 했다.

그 덕에 두 사람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으며 루비아 또한 그를 대하는 것이 한결 편해져 있었다.

“저기 앞 디저트 카페에, 새로 민트초코 도넛이 나왔는데 같이 갈래요?”

“그래, 좋아.”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도넛을 먹고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그때 함께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렌과 레이안과 마주쳤고.

다음 수업을 듣기 위해 둘씩 갈라져 교실로 향했다.

그리고 루비아가 교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민트초코 머핀도 나왔는데!

오늘 저녁 때 같이 먹자고 해야겠다.

자신만큼이나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토마를 떠올리며 루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렌, 나 잠시만 토마 오빠한테 다녀올게.”

“그래.”

다른 일이라면 같이 가겠지만 루비아를 좋아하면서 말도 못 붙이는 토마가 답답해 도와준 지 벌써 한 달.

렌은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쯧.”

레이안은 자신 앞에서 표정을 굳히고 있는 토마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아직까지는 먹을 만해.”

아닌 것 같은데.

레이안은 토마의 얼굴이 민트색으로 질린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좋아?”

토마는 무언으로 그의 질문에 긍정했고 작게 한숨을 내쉰 레이안은 입을 열었다.

“그럼 언제쯤 말하려고?”

“말하면 나한테 실망하지 않을까.”

그의 대답에 답답함을 느끼며 레이안은 소리쳤다.

“아니, 그거 말고 고백 언제 할 거냐고!”

이 대화를 루비아가 듣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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