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쌍둥이의 시선.
“도련님.”
“아가씨!”
그 순간이었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을 찾던 시종과 시녀가 그들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마님께서, 점심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지금이 열한 시 정도일 테니, 늦어도 이제 곧이겠군.
마침 좋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린은 레몬을 바라보았다.
“바로 말씀드리면 되겠네.”
그린의 말에 레몬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지만 알겠다고 한 것에 비해, 아직도 뭐라 말을 해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린은 그런 레몬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 그린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 것인지, 머쓱하게 웃은 레몬이 입을 열었다.
“미안, 답답하지?”
“어.”
그리고 그린은 빈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단호한 그의 대답에 레몬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저래야 그린이지.
자신의 쌍둥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똑똑했고 당당했으며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리고 가장 부러웠던 것은.
자신과는 다르게 하고 싶은 일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말 그대로 부러울 뿐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장난을 하고 있지만 레몬은 알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자신과 그린의 격차는 계속 벌어질 것이라고.
조금만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않은가.
토마는 검, 렌은 악기, 그린은 공부, 자스민은 마법….
그에 비해 자신이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림이나 조각, 미술 쪽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술에 크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진로를 그쪽으로 나갈 생각도 없었다.
레몬에게 그림이란 그저 취미에 불과했으니까.
그래서 레몬은 항상 생각했다. 다섯 명 중 자신이 가장 뒤떨어지는 것 같다고.
그건 정말로 냉철한 자기 객관화였다.
만약 지금 당장 바리다스가 그들을 내쫓는다면 다른 아이들은 재능을 살려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흔히 말하는 천재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천재가 아니었다.
그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에 조금의 재능이 있을 뿐.
다른 아이들에 비해 평범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나도 너처럼 하고 싶은 일이 확실하면 좋을 텐데.”
그녀의 말에 그린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평소와 다른 레몬의 분위기에 차마 다른 말들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그림 잘 그리잖아.”
평소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일이 많지 않았던 그린답게 어색한 말투였다.
“그렇게 잘 그리는 편도 아니고, 그냥 취미일 뿐인걸.”
“너 잘 그려.”
“아니, 잘 모르겠어. 나는….”
투둑!
망설이던 레몬이 입을 열려는 순간.
정원 넘어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그 소리를 들은 그린이 표정을 굳히고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고.
멍! 소리와 함께 소리가 난 방향에서 리리와 루이가 뛰쳐나왔다.
“왜 그래?”
그린의 외침에 고개를 갸웃거린 레몬이 그를 돌아보자.
리리와 루이를 확인한 그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만약 다른 사용인이 들었다면 형수님과 형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기에 입막음하려 했을 뿐이었다.
이런 일은 레몬 스스로가 말하는 편이 가장 좋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리리와 루이 외에 그 누구도 듣지 않은 듯했다.
안심한 그린은 루이와 리리를 쓰다듬어 주며 레몬에게 시선을 옮겼다.
“일단, 식사부터 하러 가자. 늦을 것 같아.”
아직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이 남아 있었는데.
리리안 말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이야기였기에 그린에게 조금 더 상담받고 싶었으나.
그의 말대로 더 있다간 식사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조금 아쉽지만 이제 들어가 봐야겠지.
“그래.”
고개를 끄덕인 레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그린이 입을 열었다.
“조금 있다가, 더 들어줄게.”
찰나 드는 안도감에 레몬은 그와 쌍둥이로 태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고마워.”
그래서 레몬은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아이가 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저택으로 돌아갔고.
정원에서 두 아이의 발걸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쯤.
반대편 풀숲에서 작은 안도의 숨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그린과 레몬을 찾아 정원으로 내려온 예린과 바리다스였다.
완전 깜짝 놀랐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놀란 심장을 진정시켰다.
정원에서 놀던 쌍둥이가 갑자기 사라져서 찾는 걸 도와준다고 했을 뿐인데, 저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레몬이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당연히 미술 쪽으로 진로를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원작의 레몬도 그러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사랑했다.
미술이 자신의 인생이라 표현할 정도로.
하지만 나는 이런 변화가 마냥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원작의 레몬이 그림에 빠져들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서였으니까.
레리아가 등장하기 전까지, 아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고통을 이겨냈지만.
그들에게는 또 다른 행복과 버팀목이 하나씩 존재했다.
토마는 검, 렌은 음악, 그린은 책, 자스민은 마법, 그리고 레몬의 경우 그림과 미술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레몬은 그림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건 미술 말고도 다른 행복과 의지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 점은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레몬에게 다른 목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라스는 어떻게 생각해요?”
내 질문에 바리다스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레몬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지만, 그래도….”
“역시 아카데미는 입학했으면 하죠?”
내 질문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레몬에게는 현재도 좋은 친구들이 많고 사교성이 좋은 편이란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며 조금 더 많은 것을 경험하길 바라요.”
그렇게 말한 바리다스는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야, 졸업을 위해 성적에만 집착했지만 레몬은 그러지 않아도 되니 말이죠.”
그 말을 들으니, 어린 바리다스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팔을 뻗어 그를 강하게 안아 주었다.
그리고 나 또한 바리다스와 같은 생각이었다.
레몬이 입학하기 싫다고 한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의 말대로 저런 경험이 나중에 피가 되고 살이 되니 말이다.
음, 이런 생각은 조금 꼰대 같은가.
어릴 땐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부모님의 마음이 최근 들어 이해가 되고는 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저절로 이렇게 생각하게 되네.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입을 열었다.
“식사하고, 같이 레몬이랑 이야기해 봐요.”
“그래요.”
그 시각, 예린과 바리다스의 걱정을 모르는 레몬은 인생의 전환점에 마주쳐 있었다.
점심 식사 준비를 위해 방으로 돌아온 레몬의 방에 꽃이 잔뜩 그려진 책 한 권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시녀들이 읽고 있던 소설이었다.
저 책은 요즘 이십 대 여성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백작님과 나’라는 제목의 소설이었다.
평민 소녀가 백작을 만나 그에게 사랑에 빠지는 신데렐라와 비슷한 내용의 그 소설은 흔히 말하는 지구의 웹소설과 비슷했는데.
문학 소설만 취급해오던 크레센트 제국에서는 혁신과도 같아, 모든 서점에서 매진 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게 뭐지?”
고개를 갸웃거린 레몬은 바닥에 떨어진 책을 조심스럽게 주워들었다.
그린이 두고 간 건가.
잠시 고민하던 레몬은 홀린 듯 책의 첫 페이지를 열었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책의 내용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린이 왜 독서를 하는지 한 번에 납득할 정도로.
이런 책이라면, 나도 그린이 읽는 만큼 읽을 수 있겠는데?
책의 첫 목차가 끝났을 때 레몬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 순간 그녀를 준비시키기 위해 시녀들이 방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레몬의 손에 들려있는 소설책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건 자신들이 돌려보기 위해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이었으니까.
업무 시간에 책을 돌려보며 딴짓을 한 그들에게 화가 난 것인지 자신들을 돌아보지도 않는 모습에 시녀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중 대표로 나선 것은 자신의 명의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온 시녀였다.
“저, 아가씨. 죄송합니다. 그 책은….”
그 순간, 레몬이 고개를 돌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상태는 그들의 예상과는 달랐다.
애초에 레몬은 화가 나 그들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책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들이 방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으니까.
“나 이거, 빌려줄 수 있어?”
예상치 못한 그녀의 질문에, 대표로 나섰던 시녀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 그녀의 대답에 레몬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그렇게 레몬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고.
시녀들은 지은 죄가 있어 시간이 촉박하게 다가올 때까지 레몬을 준비시키지도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