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쌍둥이의 시선.
“저, 아가씨 식사를….”
시간이 촉박해진 뒤에야 시녀 중 한 명이 입을 열었고.
레몬은 그제서야 책에서 시선을 뗐다.
“아프다고 해.”
“네?”
“아파. 나 지금.”
매우 건강해 보이시는데요.
하지만 시녀들이 지금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레몬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로의 눈치를 보던 시녀들 중 결국 움직인 사람은 책을 빌려온 시녀였고 그녀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은 순간 레몬의 입이 열렸다.
“아, 그리고.”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어 식사하러 가겠다고 할까.
시녀는 기대의 찬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봤지만, 레몬의 시선은 여전히 책이 고정되어 있었다.
“많이 아픈 게 아니라, 그냥 미열이 조금 있다고 해 줘.”
“네, 아가씨….”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려는 와중에도 레몬은 자신이 아프다는 말에 가족들이 많이 걱정할까 봐 신경을 썼다.
“응, 그리고 찾아오시면 약 먹고 자고 있다고 전해.”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레몬은 다시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그런 레몬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녀들은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레몬은 끝까지 읽고 나서야 간신히 책에서 눈을 뗐다.
“혹시 이거, 다음 권도 있을까?”
레몬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그녀가 책을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시녀들은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았다.
“있기는 한데, 책의 인기가 너무 많고 최근 수도에서 한정 수량만 출간되어서 구하기 힘들 거에요.”
그녀의 말에 레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하기 힘들다니.
차일드 가가, 구하기 힘든 것이 대체 어디에 있다고.
“내일까지. 집사한테 구해 달라고 전해.”
레몬의 말에 시녀들은 눈을 반짝였다.
혹시나 다음 권을 읽은 레몬에게 책을 빌려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레몬이 읽기 전 그녀들은 이미 소설을 돌려보았고 다음 권을 구하지 못하고 있던 참이기도 했다.
그런 다른 시녀들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 것인지 작게 웃음을 터트린 레몬은 입을 열었다.
“두 권 구해 달라고 해. 대신 읽고 나랑 같이 얘기해 줘야 해. 일단 난 백작보다 라트리히가 좋은 거 같아.”
라트리히는 남자 주인공인 백작에 버금가는 수준의 인기를 끌고 있는 이웃 나라의 왕자이자 서브 남주였다.
그런 레몬의 말에 라트리히를 좋아하던 시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장점을 나열했고.
질세라 백작을 좋아하는 시녀들 또한 거들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과 대화하며, 레몬은 정말 오랜만에 고민을 잊고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레몬의 생각보다 저 책의 인기는 대단했던 것이었다.
어느 정도로?
차일드 가의 이름으로도 못 구할 정도로.
애초에 예약 판매와 한정 판매를 동시에 내 건 상품이었기에 대부분의 귀족들만이 그 책을 구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신품이 단 한 권도 남아있지 않던 것이었다.
책을 읽지 못한지, 삼 일째.
레몬은 미쳐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다음 권을 읽고 싶었다.
여주를 위험에서 구해 준 사람이 라트리히인지, 백작인지 알고 싶었다.
다음 권을 읽지 못해 너무 힘들어하는 레몬을 걱정해 시녀들은 다른 책들을 추천해 주었다.
그 때문에 레몬은 식사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책을 읽는 데에 투자하였다.
하루 종일 책을 읽는 레몬의 모습을 본 다른 가족들은 그녀가 아카데미 입학을 위해 공부한다 생각했지만.
그녀가 아카데미에 입학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예린과 바리다스, 그린은 그녀가 독서를 하는 모습에 조금 의구심을 가졌다.
물론 독서는 좋은 일이지만.
평소 책을 가까이하지 않던 레몬이 갑자기 독서를 한다는 게 조금 이상했다.
레몬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바로 책을 읽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최근 본 레몬의 모습 중 가장 생기가 돌았고 행복해 보였기에, 가족들 모두 그것에 대해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다른 일들을 모두 뒷전으로 몰아둔 채 너무 책에 몰두하는 그녀가 조금 걱정이 되긴 했으나, 나쁜 일은 아니었으니까.
“레몬, 오늘도 먼저 일어나는 거니?”
나는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몬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벌써 일주일째, 그토록 좋아하는 디저트를 먹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으니까.
그런 나의 질문에 레몬은 조금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먹었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렇게 말하는 레몬의 눈빛에는 생기가 돌았고.
그랬기에 나와 바리다스는 서로의 시선을 교환할 뿐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오늘도 레몬과 똑바로 얘기를 나누지 못한 채 하루가 지나갔고.
늦은 밤,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아 나는 따뜻한 차라도 마시자는 생각을 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이쪽에, 차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부엌에 도착한 내가 선반에 손을 뻗은 순간, 부엌 구석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아가씨는 이걸 더 좋아하실 거라니까.”
“무슨 소리야, 아가씨 취향은 이쪽이라고.”
아가씨라면, 세 명 중에 누구를 칭하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들의 사생활에 크게 간섭하고 싶지는 않지만 누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알아둬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다들 뭘 모르네, 내가 구해온 책을 봐.”
그 순간 들려온 또 다른 시녀의 말에 나는 그 아가씨라는 호칭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최근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이라면 분명 레몬이었으니 말이다.
“세상에, 이거 어떻게 구한 거야?”
“이번에 수도에 올라갔는데, 내 우리 언니가 가지고 있더라고 그래서 빌려왔어. 운이 좋았지, 뭐.”
“아가씨가, 정말로 좋아하실 거야!”
잠시만, 언니?
내가 기억상 레몬의 시녀들 모두 아직 법적으로 성년이 아니었다.
최근 레몬의 시녀들이 한 번 바뀌었는데.
원래 그녀의 시녀로 일하던 두 쌍둥이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내가 레몬보다 한, 두 살 많은 나이의 아이들로 시녀를 새로 뽑았는데.
그런데 언니라고?
갑자기 안 좋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그녀들이 불건전한 내용의 책을 지금까지 레몬에게 읽게 한 것이라면?
확인해 봐야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책인지, 나도 읽어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나의 등장에 그녀들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뒤쪽으로 책을 숨겼고.
그 모습에 나의 의심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리 다오.”
내가 한 번 더 말을 한 뒤에야, 그녀들은 머뭇거리며 내게 책을 한 권씩 건넸다.
책을 받아 들고 제목을 읽은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 1짱 황태자의 계약 약혼녀가 되었다]
[불투명 공녀]
[사랑 같은 거 그만할래]
“…헉!”
하마터면 책을 던져 버릴 뻔했다.
왜 나한테 안 보여주려고 한 건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래, 너희가 이런 거 좋아할 나이기는 하지.
이제 더 이상 의심은 들지 않았으나, 약간의 궁금증에 조심스럽게 책을 펼치자. 예상외로 깔끔한 문체의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내용은 딱히 읽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뭐, 나쁜 내용의 소설도 아닐 거고 레몬이 좋아하니까, 뭐.
괜찮겠지.
조금 기가 빨리긴 했지만, 레몬이 행복하다면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책을 덮은 나는 시녀들에게 돌려주었다.
“갑자기 끼어들어서 미안하구나,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재밌게 읽으렴.”
그런데, 이 세계에서도 저런 감성이 먹히는구나.
당황한 나머지 나는 부엌까지 향했던 목적도 까맣게 잊은 채 방으로 돌아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카데미의 입학까지 일주일 정도가 남은 날.
레몬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갑자기 나와 바리다스를 찾아왔다.
“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요.”
그렇게 말하는 레몬의 품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제목은 그녀의 팔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기는 하네.
나와 바리다스는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몬이 사랑하는 예술과도 같은 일.
몇 주라는 시간 동안이나 그녀를 붙잡아 둔 일.
그것은 바로….
“글을 쓰고 싶은 거지?”
“사랑을 하고 싶어요!”
엥.
정말로 예상치 못한 말에 나와 바리다스는 시선을 교환했다.
한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않기에 우리는 레몬이 글을 쓰고 싶어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랑?
아니 물론 그녀가 읽던 소설들이 모두 사랑과 관련된 내용일 것 같기는 했다.
그렇다고 사랑??
하루 아침에 되는 일도 아닐뿐더러,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를 보고 있는 레몬의 눈빛은 진지했고 또 확고했다.
“저는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멋진 사랑을 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아카데미에 입학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고. 사람에 대해 배우고 싶고 많은 관계를 쌓으며 친구를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우리는 더 이상 레몬의 말이 장난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예상에서 벗어난 그녀의 행동에 우리는 무어라 대답을 해 주지 못했고.
한참이나 우리의 눈치를 보던 레몬은 조심스레 덧붙였다.
“역시, 이런 이유로는 안 되는 걸까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천천히 레몬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냐, 네가 하고 싶다면. 이유가 뭐가 중요해. 다만 사랑이라는 건. 너의 생각만큼 아름답지 않고, 행복하지 않으며, 고통스러울 수 있는 일이야. 그래서 우리는 네가 걱정될 뿐이야. 사람의 마음은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서.”
그 순간, 내게 다가온 레몬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 매력으로는 바꿀 수 있겠죠. 저는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사랑을 주는 법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레몬은 정말로 예쁘고 귀엽고, 또 사랑스러워서.
나는 그 말에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리다스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두 분이 걱정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사랑을 위해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꼭 두 분처럼 멋진 사랑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나와 바리다스의 손을 잡으며 레몬은 입을 열었다.
그 작은 손은 따뜻하고 또 강했다.
“그러니까, 만약. 제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 저를 위로해 주실 수 있나요? 저는 상대를 존중하는 것까지가 사랑인 것도 알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레몬은 나와 바리다스의 이마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아직 저는 어리지만, 저는 꼭 두 분 같은 멋진 사랑을 하고 싶어요, 그게 제 꿈이에요.”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안 된다고, 그것은 꿈이 될 수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레몬을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다.
“너라면 분명 그럴 수 있을 거야. 레몬 너는, 예쁘고 귀엽고 또. 사랑스러우니까.”
그런 내 말을 들은 레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왔다.
“네!”
그리고 그런 레몬의 웃음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사랑은 그녀의 자유고 마음이기에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런 레몬의 마음을 존중하지 않아, 레몬을 울게 만드는 사람은 전부 다 죽여 버리겠다고.
“우리는 너의 꿈을 응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