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남매의 시선.
“야.”
이제 그냥 반말은 완전히 익숙한 수준이네.
레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책에서 시선을 떼고 아침부터 자신의 방에 쳐들어와 침대를 빼앗은 리리안을 바라보았다.
“왜.”
자기 방인 마냥 자신의 침대를 뒹굴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뻔뻔했다.
아니, 정정하겠다.
모습보다 눈빛이 더욱 뻔뻔했다.
레이안은 침대에 거꾸로 누워 자신을 바라보는 리리안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방학 언제 끝나냐?”
하지만 그 순간 리리안의 입에서 나온 말에 레이안은 다시 한번 정정해야만 했다.
그녀의 말이 몇 배는 더 뻔뻔하다고 말이다.
“왜?”
내가 방학 끝나는 것이 너랑 무슨 상관이냐는 의미를 담아 묻자.
리리안이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당연한 거 아냐? 오빠 얼굴 보는 걸 좋아하는 동생이 세상에 어디 있어.”
상당히 당당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었으나.
“자스민.”
아쉽게도 레이안은 오빠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소녀를 알고 있었다.
단호한 그의 대답에 반박할 말이 없어 표정을 찡그린 리리안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고.
“걘 아직 어려서 그러고 아쉽게도 난 어릴 때부터 안 그래서.”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레이안은 입을 열었다.
“아주 어릴 땐 그랬지?”
“아니, 세 살 때까지였잖아!!”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진 리리안은 소리쳤다.
레이안의 말이 맞기는 했다.
세 살배기 아이일 때는 뭣 모르고 레이안을 따라다녔으니 말이다.
물론 리리안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아킬레스와 아필레가 그들에게 항상 그렇게 말해왔다.
리리안과 레이안이 아주 어렸을 땐 매우 친했다고 말이다.
특히 리리안이 그를 엄청 좋아해 매일 따라다니곤 했다고.
“뭐, 그래도 좋아한 건 맞잖아?”
“이씨.”
그의 말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리리안은 더욱 표정을 구겼다.
“됐고 그래서, 개학은 언제냐니까. 나는 네 얼굴 좀 그만 보고 싶어.”
말싸움으로 안 된다는 사실을 드디어 눈치챈 것인지 리리안은 그냥 우기고 나가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자신에게 져줄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득바득 덤벼오는 리리안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린 레이안은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리리안. 이번에 개학하면 너도 같이 갈 텐데?”
그게 뭔 헛소리냐는 듯 레이안을 바라보던 리리안의 머릿속에 과거 아필레와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리리안은 레이안과는 다르게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지 않아 했다.
하지만 아필레와 아킬레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가 입학하길 원했고.
그런 그들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리리안은 하나의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건 바로 레몬과 그린이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해에 자신도 같이 입학하겠다는 것이었다.
뭐, 레몬에게는 자신이 기다려준다는 듯 말했지만.
그런 이유가 완전히 없진 않았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자신의 오빠도 토마 오빠와 렌 언니를 위해 일 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주었고.
세 사람은 꽤나 즐거운 아카데미 생활을 하는 것 같아 자신도 친구와 함께 들어가고 싶었으니까.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아카데미 입학을 미루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설마 잊고 있던 건 아니었지?”
“당연하지!!”
사실 잊고 있었다.
아, 진짜.
리리안은 짜증을 담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난, 성인이 되자마자 이웃 나라에 멋진 왕자님한테 시집갈 건데. 왜 아카데미에 다니라고 하는지 몰라.”
“이웃 나의 왕자가 널 받아준다고는 하고?”
장난스러운 말에 리리안은 레이안을 노려보았다.
“당연하지, 내가 이렇게 예쁜데? 남 걱정할 시간에 너나 빨리 약혼녀나 알아봐. 다시 한번 말해줘? 옆집 황태자는 벌써 약혼녀가 세 명이라고.”
짜증이 가득 담긴 리리안의 말에도 레이안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미안, 나는 부모님처럼 연애 결혼할 거라서.”
“황태자가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불가능할 건 또 뭐야, 우리 부모님이 이미 그렇게 만나셨는데.”
이제 말로는 더 이상 그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자신이 계속 이겼던 것 같은데 말이다.
아카데미에서 말싸움하는 것만 배워 온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안을 노려본 리리안은 입을 열었다.
“좀 져주면 어디 덧나냐?”
“네가 말했잖아, 황태자면 황태자답게 하라고.”
저건 자신이 예전부터 항상 레이안에게 해 오던 말이었다. 그의 입으로 저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말이다.
그랬기에 저 말을 듣는 순간 리리안은 깨달았다.
자신의 오빠는 더 이상 자신에게 지고 울던 어린 소년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여야만 하는 자신과는 다르게 말이다.
“오빠.”
갑자기 바뀐 리리안의 호칭에 레이안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의 대답에 잠시 망설이던 리리안은 입을 열었다.
“오빠는 나 버리면 안 돼.”
예상치 못한 말에 레이안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보다 리리안이 더욱 황제의 자리에 어울렸다는 사실을.
그녀는 영특했고 눈치도 빨랐으며 사람의 심리를 잘 알고 이용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황태자라는 자리에 관심이 없었으며 레이안이 황태자라는 자리에 오르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똑똑하고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려봤자.
그 누구에게도 좋을 것이 없으니까.
그렇기에 리리안은 언제나 출중한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인 척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어린아이인 척하는 것이 가족들에게도 그녀 자신에게도 좋았으니까.
부모님은 사랑으로 키운 두 자녀가 황태자 자리를 두고 싸우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있었고.
레이안은 아무 문제 없이 황제가 될 수 있을 것이었으며.
리리안 본인도 편하게 황녀라는 지위를 이용해 살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사실에 대해 리리안이 불만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위치는 리리안이 택한 것이었으니까.
다른 귀족들 앞에서도 평소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이웃 나라의 멋진 왕자님에게 시집가고 싶다는 소리나 하는 철부지.
황태자 자리를 두고 싸울 생각이 없는 리리안의 현재 위치였다.
이런데 황실의 금지옥엽인 그녀를 누가 감히 정치에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할까.
“리리.”
“응.”
“내가 어떻게 너한테 그럴 수 있겠어?”
리리안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레이안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우애가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이곳은 황실이었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며, 하루에도 몇 명이 죽어 나가는 곳이자. 제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황제가 사는 곳 말이다.
지금은 자신들이 이렇게 사이가 좋고 장난을 주고받고 있지만.
언제 한 사람이 권력에 눈을 뜨는 순간 이 관계는 순식간에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리리안은 지금 레이안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만일에 대비하고 싶은 것일 뿐.
리리안은 지금 말하는 것이었다.
나중의 레이안이 더 큰 권력을 가지기 위해 그녀를 해치려 할 때를 대비해 자신이 그런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자신을 아직 사랑하고 있는 지금의 레이안에게 자신을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지켜달라고.
“오빠가 날 사랑한다 해도, 귀족들이 그러할까? 오빠가 황제가 된다면 그들은 분명 날 이용해 먹을 거야. 나는 예쁘고 똑똑하니까.”
이 와중에도 당당한 그녀의 말에 레이안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난 그 전에 떠나려고 했던 거야. 아직 아빠가 황제일 때 내가 원하는 사람을 선택해서.”
“난 황제 같은 건 관심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나를 사랑해 줄 사람과 그에게 있는 조금 많은 돈. 그 정도야.”
“널 데려가서 만족시킬 정도면 조금 많은 돈으로는 안 될 텐데.”
자신은 진지한데, 왜 저리 장난스러운 소리를 하는지.
그렇게 생각한 리리안이 레이안을 노려본 순간,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그녀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리리, 누가 너한테 이런 거 가르쳤어?”
“황궁에 있는 책.”
“전부 다 태워버려야겠네. 감히 우리 사이를 틀어지게 만들었으니 말이야.”
그거 다 역사서인데.
황제들이 자신의 형제자매를 황권을 높이거나 외교를 위해 강제로 결혼시키는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기에 역사서에는 그런 일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을 읽은 어린 황녀나 황자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뭐,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아이가 그 책을 읽고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는 학자가 몇이나 될까.
“틀어졌다고 할 게 있나, 애초에 나 혼자서 나쁘게만 생각 한 건데.”
그 생각을 하게 만든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이안은 아직도 리리안이 어린아이라고만 생각했다.
제국의 황녀로 태어나서 부모님께 사랑과 예쁨을 받고 자라 그 안에서 배운 얄팍한 지식과 눈치로 자신이 철이 든 줄 아는 그런 아이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 자신의 생각보다 뛰어나고 똑똑한 아이였다.
그리고 레이안은 그 사실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그 어떤 권력을 리리안에게 주어도 그녀는 그것을 멍청하게 남용하지 않을 것이니까.
뭐, 솔직히 조금 서운하기는 했다.
자신이 제 동생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런 소리를 들으니 말이다.
그래도 뭐, 지금의 리리안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자신에게 이렇게 털어놓는 것이니 나쁘지 않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보호 아래, 더 어린아이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니까.
레이안에게 그녀는 아직 헛똑똑이이자 애늙은이 정도로 보였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레이안은 리리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약속할게, 리리.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의 가족이고 오빠일 것이라고.”
그리고 그 말은 리리안에게 그 어떤 말보다 안심이 되었다.
네가 무슨 일이 있어도 용서할게, 라거나.
네가 무슨 일을 저지른 데도 너의 힘이 되어 줄게 와 같은 말보다 말이다.
그건 리리안 자신이 나쁜 일을 저지르거나 길로 빠지게 되었을 때, 저지하겠단 의미임과 동시에.
끝까지 그녀를 지키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으니까.
“그래, 지키지 않으면 죽어서도 오빠 간식을 다 먹어 치울 거야.”
레이안이 한 말에 비해, 상당히 귀여운 협박이었다.
새침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레이안은 리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열었다.
“알겠어, 리리. 그런데 나는 네가 꼭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면 좋겠어.”
진지한 표정의 그를 보며 리리안은 머뭇거렸다.
“나는 아카데미에 가 봤자, 배우고 싶은 것도 목표도 없는데.”
“왜 꼭, 목표가 있어야 입학한다고 생각해? 아카데미에서 하고 싶은 것을 찾아도 되는 거잖아.”
그의 말에 리리안의 눈이 커졌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레이안은 생각했다.
그렇게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표정이네.
역시 리리안은 책으로만 세상을 경험한 애늙은이이자 헛똑똑이가 맞았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너는 너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을 거야.”
그의 말에 리리안은 아주 조금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아카데미가 뭐길래.
아바마마도, 어마마마도, 오빠까지.
저렇게 자신에게 가라고 권유하는 건지.
“…알겠어.”
저렇게까지 말하면서 부탁하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
리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을 레몬이 부럽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