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쌍둥이, 그리고 리리안의 입학식.
“…올바른 학교생활을 이끌어 나갈 것을 굳게 선서합니다.”
그린의 선서가 끝남과 동시에 박수가 쏟아져 나왔고 고개를 한 번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마친 그는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단상 아래에서 박수하는 리리안과 마주한 그린은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정말, 리리안의 말대로 자신이 신입생 대표가 되었지만 그 자리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나쁜 생각이 들 뿐.
그린은 차일드 가에 너무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차일드 가가 자신의 배경이 되어 준 뒤에도 열심히 노력했고 계속 공부해 온 것이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증명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아카데미의 입학식이었다.
하지만 막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성적이 그의 목표치에 미치지 못했다.
자신보다 좋은 성적을 받은 학생이 리리안 말고도 많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자신이 단상에 올랐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라이온 아카데미가 자신의 배경을 보고 뽑은 게 아닌가 싶었다.
성적도 좋고 황녀이기까지 한 리리안을 신입생 대표로 뽑았으나 그녀가 거절해 자신을 대신 세운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린의 생각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또 리리안이었다.
“야, 왜 그런 표정이야?”
입학식이 끝난 뒤 자유시간이 되자마자 그린을 찾아온 리리안이 그렇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로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그린의 모습에 표정을 구긴 리리안은 그의 어깨를 붙잡아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그렇게까지 하고서야 그린도 더 이상 리리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야.”
“네.”
고분고분한 그의 대답에 기운이 빠진 것인지 다시 표정을 푼 리리안은 어깨를 잡은 손을 내려 그의 손을 붙잡았다.
“됐으니까, 따라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뒤에서 다른 학생들이 수군거렸으나.
그런 말들에 신경을 쓰는 것은 그린 한 사람뿐이었다.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그린을 끌고 운동장 구석으로 온 리리안은 그를 벽 쪽에 세워둔 채 입을 열었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말하는 리리안과 그린의 거리는 한 뼘도 안 되는 수준이었으나.
그린은 그 사실보다 여전히 자신에게 끌리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리리안이 물러설 생각도 없어 보였고 말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린이 한 선택은 아니라고 잡아뗀 뒤 빠르게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리리안은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그녀가 더 가까이 다가갔기에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으나 리리안은 개의치 않고 그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래, 아까부터 얼굴로. 나 기분 안 좋아요. 라고 말하고 있으면서.”
그린은 언제나 리리안이 조금 특이한 사람 같다고 생각해 왔다.
어느 때는 누구보다 세상 물적 모르는 공주님 같으면서도 또 어느 때는 노련한 귀부인 같았으니까.
그 덕에 그녀는 언제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으며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린은 언제나 리리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다른 사람 머리 꼭대기에 서 있는 것처럼 행동했으니까.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말 몇 마디로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가 버리지 않았는가.
“정말로, 별것 아닙니다.”
그래서 그녀와 대화하는 것은 언제나 꺼려졌다.
자신과 완전히 정반대의 색을 띠고 있는, 저 푸른 눈동자는 언제나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자신의 이런 추한 열등감까지, 들여다보일 것 같아서.
리리안이 잘못한 것은 하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마음이 언제나.
이상하게 요동치기 시작해서.
“그래? 그렇다면 나도 정말로 하는 말인데. 네가 이뤄낸 것은 너의 가문 때문이 아니라. 너 자체가 뛰어나서 그런 거야. 나쁜 생각하지 마.”
봐라.
지금도 그러지 않은가.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자신이 내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하는 저런 말에도.
마음이 이상하게 요동치고 있지 않은가.
역시, 자신은.
리리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한 적 없으니, 억측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그러면 됐고.”
자신이 아무리 밀어내도 자신의 말 따위로는 상처받지 않는 것처럼.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그녀가 싫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싫은 것은.
그럼에도 저 손을 거부하지 못하는 자신이었다.
“오늘은, 스테이크랑 파스타가 먹고 싶어.”
당연히 자신이 손을 잡아 줄 것임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손을 올린 채 자신을 이끄는 그녀를 따라가며 그린은 고민에 잠겼다.
나는 언제부터 당신에게, 이런 감정을 품게 되었을까.
분명 어릴 때는 이것보다는 더 편하고 친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분명.
자신만 가지고 있는 것이겠지.
리리안은 어릴 때와 다름없이 자신을 대하고 있음에도 혼자 이상한 생각에 빠져서 말이다.
언제부터였더라.
자신이 리리안에게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일은 꼭 선을 그어야지.
그간 단 한 번도 실현해 보지 못한 다짐을 다시 하며 그린은 언제나처럼 리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리리안은 언제나 그랬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그린은 수없이 생각하게 되었고 그가 이미 내린 결론도 쉽게 바꾸었다.
황실에 안 가겠다는 결심도.
조기 졸업을 하겠다는 결심도.
그녀의 손을 다시 안 잡겠다는 결심까지도.
언제나 쉽게 바꾸어 버렸다.
그린은 자신의 문제임을 알고 있음에도 리리안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감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그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뭘 인정한다는 말인가.
자신은 그냥 리리안이 싫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자신과는 너무 다른 성향의 사람이라 성격이 맞지 않아서, 그래서 싫었다.
그 순간이었다.
“웬일로 둘이 같이 있네?”
먼발치에서 같이 있는 그린과 리리안의 모습을 발견한 레몬이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 달려온 것이었다.
레몬은 사실 조금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너무나 소중한 두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멀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같이 있는 모습을 보니, 두 사람이 예전만큼 가까워 진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레몬의 생각을 두 사람이 모를 리 없었다.
“당연하지, 우리가 얼마나 친한데.”
리리안이 말했고.
그녀의 말에 레몬의 얼굴이 더욱더 환해졌다.
그에 비해 그린은 이걸 긍정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지만.
솔직히 레몬이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린은 자신이 리리안에게 품은 감정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그녀를 피해 다녔으니까.
“별로, 안 친해.”
그렇기에 그린은 언제나처럼 리리안을 밀어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은 레몬은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손을 가리켰다.
그린이 여전히 리리안과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자신의 말과 행동이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가 빠르게 손을 빼내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쑥스러워할 것 없어, 예전부터 많이 잡았으면서 뭘.”
이미 부끄러워 그녀와 친하지 않은 것처럼 말한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해해, 그린 사춘기잖아.”
계속해서 이어지는 리리안의 말에 그린의 얼굴은 결국 붉어지고 말았다.
그는 토마토마냥 붉어진 얼굴을 애써 진정시키려 하며 입을 열었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고. 쑥스러워서 그렇게 말한 거 아닙니다.”
엄청나게 붉은 얼굴과는 상반되게 담담하고 차분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는 이어진 레몬의 말에 더 이상 평정심마저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에이, 너 내가 입학 안 한다고 했을 때 리리안 언니부터 걱정하더니만, 이제 와서 아닌 척하지 마.”
“…아니, 그건!”
황녀님이 너 때문에 입학을 일 년이나 미뤘다는 걸 알고 있는데 어떻게 말을 안 해.
그 말이 그린의 입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결국 그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을 더 붉혔고 그런 그의 모습에 리리안은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나한테 완전히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네?”
그렇게 말한 리리안은 특유의 새침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린은 생각했다.
이 이상으로 얼굴이 붉어지면 터져 버릴 것 같다고.
“아뇨. 저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 믿어 줄게.”
그렇게 말한 리리안은 마지막으로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뒤 그의 손을 놓았다.
허전해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그린은 어느새 앞장서서 걷기 시작한 리리안과 레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그때 당시에는 자각하지 못한 뒤늦은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그린은 사실 알고 있었다.
리리안이 입학을 미룬 이유에 자신이 있길 내심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형제의 절친한 친구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에.
수많은 이유를 붙여가며 그녀를 싫어하고 거리를 두고 밀어내려 해 봐도.
이미 부풀 대로 부풀어 커진 마음은 어느 순간부터 넘쳐흘러.
그의 모든 것을 서서히 적셔가고 있었다.
그린은 지금껏 리리안을 싫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 뿐.
아직도 그녀를 싫어하게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