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 아기 마왕님의 생존전략
“이봐, 폐품.”
노골적인 모욕에도 나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무 자주 들었으니까.
“어째서 마신께서는, 너처럼 더러운 잡종 계집을 마왕으로 선택하셨을까?”
‘그야 내가 더 좋으셨나 보지. 왜, 꼽냐?’
……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난 그냥 방긋방긋 웃었다.
최대한 무해하고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여야만, 저들이 나를 경계하지 않을 테니까.
고위 마족들에게 휘둘리는 꼭두각시 마왕.
그게 지금 내 처지였다.
마족들이 뱀 같은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마왕으로서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모두 우리 덕분이야. 그걸 잊지 말도록.”
“네, 그러께요!”
나는 주인을 졸졸 따르는 강아지처럼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방에서 빠져나갔다.
달칵, 철그렁!
방문이 밖에서 잠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동시에 나는 얼굴에서 미소를 싹 지우고는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하, 진짜 말 만네…….”
내가 마왕으로 각성하기만 해 봐, 저 자식들의 입을 당장에 꿰매 버릴 테니까!
어쨌거나, 내가 왜 저 저따위 콧수염 난 할아버지들에게 구박이나 듣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일단 내가 전생에 읽었던 판타지 소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황자, 영웅이 되다>
비록 사람들은 양판소라고 욕했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었다.
뭐, 내용은 다소 전형적이기는 하다.
비극적인 과거를 가진 천재 황자가, 세상을 도탄에 빠뜨리는 마왕을 처단하고 행복해지는 다소 뻔한 스토리.
다만 모두가 행복해지는 그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처참하게 몰락하는 이가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타티아나.
마신의 선택을 받은 마왕이자, 남자주인공에게 토벌당하기로 결정된 이 소설의 최종 보스다.
‘그런데 내가 그 타티아나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하여간,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원작 속 타티아나의 설정은 대략 이렇다.
타티아나는 원작이 공인한, 전 세계에서도 단 한 명뿐인 인간과 마족의 혼혈이었다.
거기에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고아로, 외양 또한 마족보다는 인간에 훨씬 더 가까웠다.
그리하여 주변 마족들에게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노예시장에 머물렀던 세월이 장장 3년.
‘말이 3년이지, 지금 내 나이가 네 살이니까 거의 반평생을 핍박받은 것이나 다름없잖아!!’
흑, 일단 눈물 좀 닦고.
그것만으로도 서러운데,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내 인생을 더더욱 엉망으로 만든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건 바로 마신의 신탁이었다.
신탁의 내용은 간단했다.
내내 침묵하던 마신께서 새로운 마왕을 선택했다는 것.
다만 문제는, 그 새로운 마왕이 바로…….
‘나였지.’
신탁을 들은 마족들은 두 눈에 불을 켜고 새로운 마왕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나를 발견했다.
‘인간과 마족의 혼혈이라고?’
마족들은 흡사 오물을 보듯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내게 쏘아붙였다.
‘이런 더러운 잡종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끔찍한데, 심지어 이 미천한 계집이 마왕이라니!’
하지만 난 억울했다.
아니, 저라고 막장 인생이 약속된 타티아나로 환생하고 싶었겠습니까?
한참을 나를 이리저리 뜯어보던 마족이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뭐, 그래도 여러모로 쓸모는 있겠어. 끌고 가라.’
그렇게 마족들 손에 개처럼 끌려가면서, 나는 세 살답지 않은 냉소적인 판단을 내렸다.
‘응, 내 인생 완전히 망한 듯.’
그렇게 1년이 흘렀다.
난 네 살이 되었고, 그동안 내 인생은 착실히 원작대로 흘러갔다.
나는 고위 마족들의 꼭두각시가 되었고, 그중 몇몇은 내 힘을 갈취해 자신이 마왕인 양 행세했다.
그리하여 세간에 알려진 것이 ‘다섯 마왕.’
아마 풍문으로 다섯 마왕이 인간들의 땅을 침공했네 어쩌네 하는 말도 들었던 것 같은데, 내 인생이 워낙 고단해서 제대로 신경 쓰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원작에서 내가 마왕으로 각성하는 시점은, 소설이 끝나기 직전인데…….’
정의로운 용사가 된 남자주인공이 마왕성으로 쳐들어오고, 고위 마족들에게 착취당하던 타티아나를 구출해 주었지만.
슬프게도 그때는 너무 늦었다.
오랜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슬픔과 절망에 빠진 타티아나는 마왕으로 각성한 것이다.
그리하여 남자주인공은 기나긴 사투 끝에 타티아나를 쓰러뜨리고, 마침내 세상의 멸망을 막아냈다…… 는 게 원작의 결말.
“아니, 이건 너무하자나!”
난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평생을 남들에게 이용당하면서 사는 것도 서러운데.
마침내 마왕으로 각성하자마자 남자주인공에게 목이 날아가는 역할이라니!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이럴 거면 일찍 마왕으로 각성시켜 주면 안 대? 나두 깽판 치구 시퍼!”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그렇게 외친 순간.
쾅!!
“모, 모야?!”
화들짝 놀란 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쾅, 콰쾅, 쾅!!
거대한 폭발음과 벽이 무너지는 소리, 집기들이 깨지는 소리,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막아라, 막아!”
“진입하도록 둬서는 안 된다!”
“고작해야 미천한 인간 따위에게 무너질 셈이냐!”
온갖 파공음 속으로 다급한 고함이 뒤섞인다.
그리고.
콰득!
“꺄악!”
내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거대한 대검이 날아와서 문고리 쪽에 콱 박힌 것이다!
하지만 기겁한 것도 잠시.
나는 홀린 듯이 문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문이…… 열렸어?’
언제나 단단히 잠겨 있던 문고리가 부서진 것이었다.
그 말은 즉.
‘이 끔찍한 골방에서 벗어날 수 있어!’
순간 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비록 밖에서 어마어마한 난전이 벌어진 듯했으나, 그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훨씬 더 컸다.
나는 애써 진정하려 애썼다.
‘지금은 전투 중이야, 나 같은 어린아이는 지금 나가 봤자 크게 다치기만 할 뿐이야.’
그렇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한참 동안 숨을 죽이며 기다린 끝에.
“…….”
“…….”
마침내 사위가 고요해졌다.
나는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이, 이제 나가도 되는 건가?’
살금살금 문 쪽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더 이상 전투의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좋아, 그렇다면.’
마음을 굳게 먹은 나는 양손으로 문을 밀어 열었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동시에 나는 경악했다.
“……우와아.”
밖은 온통 쑥대밭이었다.
한때 화려하게 꾸며졌던 성안은 수많은 전투의 상흔으로 얼룩져 온통 엉망이었다.
다만 마족들의 시신은 하나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마족들의 철저한 강자우월주의 때문이지.’
고위 마족들은 자신들이 훨씬 고귀하다며, 일반 마족들까지도 철저히 접근을 막았다.
심지어는 사용인조차 마왕성에 상주하도록 두지 않고, 필요할 때만 불렀다가 다시 내보내고는 할 정도였다.
뭐, 그런 분위기에서 인간의 피가 훨씬 더 진한 혼혈 꼬마를 마왕으로 섬기려니.
얼마나 속이 뒤틀렸겠어?
그렇게 오랜만에 느끼는 해방감을 만끽하던 중,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은 마왕의 옥좌가 있는 중앙 홀에 닿아 있었다.
“저기는…….”
나는 주춤주춤 중앙 홀로 걸어갔다.
호화스럽던 문은 이미 박살이 나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안의 모습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제멋대로 흩어진 피 묻은 병장기, 한때는 아름다웠을 법한 박살 난 가구들, 무너진 잔해로 엉망이 된 다섯 옥좌.
그리고 치명상을 입은 채 널브러진 고위 마족들까지.
‘저 사람들은…….’
그들을 바라보던 내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사실 객관적으로 어린아이가 보기에는 꽤 참혹한 광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때 나를 그렇게나 괴롭히며 무시하던 이들이, 저렇게 쓰레기처럼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하면, 나 너무 나쁜가?’
하지만 죄책감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내 입술은 어느새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오랫동안 가슴에 박혀 있던 돌덩어리가 쑥 빠진 것처럼 홀가분하다.
아무리 마왕을 참칭할 정도의 고위 마족이라지만, 저렇게 큰 상처를 입었다면 분명 살아 있지 못할 터.
‘그렇다면 나, 이제 자유인 거야?!’
세상에, 이럴 수가!
난 양손으로 발그레하게 물든 뺨을 감싸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나더러 나쁜 애라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어, 지금 난 기뻐서 까무러칠 것만 같은걸!
그렇게 한참을 행복함을 만끽한 후에야 난 정신을 차렸다.
‘그건 그렇고, 고위 마족이 이렇게 손쉽게 죽어 버릴 정도라면…….’
분명 상당한 실력자들이 쳐들어온 것일 텐데. 도대체 누구지?
만약 그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면 어떡해?
괜히 겁나는 마음에, 나는 목을 자라처럼 움츠린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아!’
저 멀리,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세 남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