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나는 남자들 쪽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흐음.
흐으음.
요리조리 남자들을 관찰해 봐도, 이 남자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감이 오질 않는다.
그렇잖아?
무려 마왕성에 쳐들어와 고위 마족들을 쓸어버릴 정도의 실력자는, 원작에서도 남자주인공밖에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아, 설마?’
순간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
‘남자주인공 전의 용사들 아니야?!’
원작의 스토리는 대략 이랬다.
마족들이 마왕의 명령을 받아서 인간계를 침공한 건 총 두 번.
그중 첫 번째 침공을 막아 내고, 역으로 마계의 심장부인 마왕성까지 쳐들어갔던 선대 용사들이 있었으니.
‘그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인가 봐!’
여기서 마족들은 큰 피해를 입고 주춤하지만, 추후 마족들이 인간들에게 총공세를 펼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또한 원작의 선대 용사들은 마왕의 저주를 받는 바람에, 마왕들과 함께 죽고 말았다고.
‘하지만 나는 아무런 저주도 내리지 않았는데?’
나는 다소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어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남자들의 몸 위로 연푸른 기운이 어른거리며 회복을 방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 기운은 확실히 내 특유의 마기이기는 한데…….
‘마족들이 내 힘을 이용하여 공격했나 보지?’
그러고 보면 마족들은 꼬박꼬박 내 마기를 뽑아갔었다.
인간 혼혈이라 몸에 내재된 마기가 전혀 개화되지 않았기에, 마기를 뽑기 전 강제로 마기 개화를 시키는 약을 먹였던 것까지 기억난다.
‘으, 그 약을 먹을 때마다 진짜 아팠었는데.’
나는 반사적으로 양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강제로 뽑아낸 힘을 마정석에 봉인해 둔 후, 전투 시에 이용했던 것 같다.
그 증거로, 아까 전 봤었던 고위 마족들 주변에는 깨진 마정석 파편들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원작에서 언급된 ‘마왕의 저주’란 아마, 마왕의 마기에 잠식되는 과정을 일컫는 것일 거야.’
대충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다.
선대 용사들은 다섯 마족을 처단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내 마기를 이용한 공격은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선대 용사들도 함께 사망하고, 텅 빈 마왕성으로 다른 마족들이 진입한 것일 터.
그 후 혼자 남은 나를 다시 한번 바지 마왕으로 내세워, 인간계로 2차 침공을 벌인 거라면 딱 상황이 들어맞는다.
나는 턱을 괸 채 골똘히 고민에 빠져들었다.
“후우움, 어쩐다?”
사실 원래의 계획은 이대로 내빼는 거였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지금 당장 여기서 도망쳐 봤자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잖아?
마족들은 기본적으로 타 종족에게 지극히 배타적이며, 힘을 숭상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마족들에게 있어, 인간의 피가 훨씬 진한 혼혈인 나는 발밑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보다도 못하다.
‘심지어 고위 마족들은 인간 혼혈이 마왕이라는 게 수치스럽다는 이유로, 내가 마왕이라는 사실까지 외부에 숨겼는걸.’
그래서 마족들 중에서도 내가 마왕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하여간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지금의 난 마왕으로 각성조차 하지 못한 어리고 연약한 꼬맹이라는 소리다.
심지어 외양은 거의 인간과 흡사한.
그런 내가 혼자 외부에 나가서 살아남는다?
그 확률은 0에 수렴한다.
‘하지만 그 말은 즉, 내가 마왕임을 들킬 확률 또한 0에 가깝다는 뜻이지.’
게다가 원작에서도 내가 마왕으로 각성하는 때는, 마족과의 2차 전쟁이 시작되며 남자주인공이 소설 전면에 나서는 2부였다.
‘그러니까 폭주만 하지 않으면 괜찮아.’
원작에서의 나는 마족들의 온갖 학대를 이기지 못하고 폭주하여 마왕이 된다.
그 설정을 뒤집어 보면, 내가 안전하고 안락하게 살아간다면 폭주하지 않는다는 거잖아?
나는 두 눈을 반짝 빛냈다.
‘……이거, 잘하면 안전하게 마왕으로 각성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성을 잃지도 않고, 폭주도 안 하고, 그 누구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않고!
원작에서 공인한 절대자가 될 수 있다는 소리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후후, 후후후, 후하하하하하…….”
동시에 내 입술에서 절로 음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비록 각성하는 시기가 늦어서 그렇지, 마왕이 된 나는 엄청 세거든?
원작에서도 남자주인공이 나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는 불길하니까 그만 말하도록 하자.
‘어쨌든 용사들을 어떻게든 살려 내야만 해.’
바뀐 내 계획은 이랬다.
일단 용사들을 살려서 내 보호자 역할을 맡긴다.
이들이 내 보호자가 되어 준다면, 신분 최상, 능력 최상, 재력 최상의 빵빵한 보호자가 셋이나 생기는 것 아닌가?
“조오아.”
아까 전에는 골칫덩이로만 보였던 이 용사들이, 이제는 어떻게든 붙들어야 하는 황금 동아줄로 보였다.
난 자그마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결심했다.
“용사님들, 나만 미더.”
내가 어떻게든 너네 살린다.
그러니까 용사님들도 나를 무사히 건사해 줘야 해. 알았지?
* * *
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불길이 피어올랐다.
간신히 마왕의 공격을 막아 낸 긴 장발의 대마법사가, 불길보다도 붉은 머리채를 휘날리며 쓰러졌다.
‘키리오스.’
지크프리트는 막막한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은발의 대사제가 온몸에서 은빛 기운을 줄기줄기 뿜어냈다.
제 목숨을 태워 뿜어내는 신성력이었다.
‘세자르!’
‘가십시오! 어떻게든 마왕들을 죽여야만 해요!’
목에 핏대를 세워 외치던 세자르도 이내 무너져 내렸다.
절망에 찬 눈동자로 세자르를 바라보던 것도 잠시.
‘제기랄!’
지크프리트는 피가 엉겨 붙은 검을 움켜쥐며 미친 듯이 달렸다.
서걱!
다섯 마왕 중, 마지막으로 남은 마왕의 목이 허공을 갈랐다.
세 용사가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
동시에 지크프리트는 예감했다.
‘우리는……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거다.’
마왕들과 벌였던 길고 끔찍한 사투는, 용사들에게도 영영 치유할 수 없는 상흔을 남겼으니까.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검이 손안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마계에 발을 들인 이래로, 단 한 번도 손에서 놓았던 적 없던 검이었다.
철컹!
검과 돌바닥이 부딪치며 나는 시끄러운 소리가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힘이 빠진 무릎이 제멋대로 꺾이고, 온몸이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간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분명 그랬었는데.
“……씨.”
“…….”
“아저씨!”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외침에, 지크프리트는 파드득 정신을 차렸다.
“헉!”
깊은 물속에 잠겨 있다가 강제로 끌려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호흡이 거칠었다.
지크프리트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계속해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헉, 헉……!”
흐릿했던 초점이 천천히 돌아왔다.
동시에 천진한 목소리가 잔뜩 신이 나서 외쳤다.
“아, 일어나따!”
아이?
화들짝 놀란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푸석푸석한 분홍 머리와 동그란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조그마한 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다섯 살은 넘어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무해해 보이는 아이였다.
하지만 마왕성에서는 그 무엇을 경계해도 이상하지 않다.
지크프리트는 당장에 아이의 멱살을 콱 틀어쥐었다.
“콜록!”
아이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캑캑거렸다.
지크프리트가 살기를 흩뿌리며 아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넌 도대체 뭐지?”
“타, 타티아나예요. 티티라구 부르셔두 대요.”
“…….”
울상이 된 아이가 얼른 대답했다.
지크프리트는 경계하는 와중에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 이름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 그래, 그렇다 치고. 네 신분을 밝혀라.”
“그으, 저눈 마왕성의 노예인데…….”
아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으로도 꼬박꼬박 대답했다.
지크프리트는 기묘한 기분으로 그런 아이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애, 정체가 뭐지?’
눈앞의 아이는 거의 인간 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다만 기이한 점은 아이에게서 아주 희미하게 마족 특유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
그러나 그 기운은 워낙에 옅었기에, 인간들 중에서도 최강자로 손꼽히는 지크프리트가 간신히 감지할 정도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의 마기에 대해 아예 눈치를 채지 못할 터.
“너 같은 아이는 처음 보는데.”
지크프리트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아이를 뜯어보았다.
“분명 외양은 인간인데, 어떻게 마기를 몸에 품고 있을 수 있는 건가?”
그러자 아이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지크프리트를 마주 보았다.
“어, 움, 그게…….”
“네 대답이 늦어질수록 나는 널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아뇨, 그, 말할게요!”
파드득 놀란 아이가 황급히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도 우물쭈물하기를 한참.
아이는 결국 결심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요, 인가니랑 마족이랑 혼혈이라서 그런 건데.”
“……지금 뭐라고 했나?”
순간 지크프리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인간과 마족의 혼혈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