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키리오스가 흘끗 나를 돌아보았다.
“지금도 그래. 내가 계속 너에게 트집을 잡고 있는데도, 생글생글 웃기나 하고.”
아, 너도 시비를 걸었다는 자각이 있긴 있구나?
나는 네가 하도 숨을 쉬듯이 날 구박하기에, 저게 평소 성격인가 생각했지 뭐야.
하지만 그렇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난 그냥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음, 무섭기는 한데요……. 여기서 아저씨들한테 잘못 보였다가 더 무서운 일이라두 생기면 큰일이자나요.”
그러자 키리오스가 발끈했다.
“너 같은 어린애까지 해코지할 생각은 없거든?!”
“그래도 제가 싫으시자나요.”
“…….”
내 대답을 들은 키리오스는 움찔 어깨를 굳혔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불편한 얼굴이 되어 입을 꾹 다문다.
흐흥, 내가 이렇게 정곡을 찌를 줄은 몰랐지?
나는 내심 고소해하며 말을 이었다.
“갠차나요. 제가 시른 것두 당연하조. 제게는 마족의 피가 흐르는걸요?”
“아니, 꼬마. 그건…….”
“게다가 우리는 마왕성에서 만났자나요. 제가 키리오스 님이어두 수상해할 거 가타요.”
복잡한 얼굴이 된 키리오스 앞에서, 나는 보란 듯이 양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어차피 마족들도 저 시러해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인간도 아니고, 마족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며, 그 누구도 반기지 않는 존재.
그게 바로 나였다.
그리고 뭐, 그런 취급은 워낙에 익숙했으니까.
키리오스는 내 말에 가타부타 말을 얹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심란한 눈빛이었다.
뭐, 귀찮게 계속 이것저것 묻는 것보다야 낫지.
나는 그냥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 쟁반에 음식들을 담아서 날라야겠지?’
나는 종종걸음으로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낑낑거리며 쟁반을 꺼내 놓고 있는데, 키리오스가 불쑥 나를 불렀다.
“꼬마.”
“네?”
힐끔 곁을 올려다보자, 키리오스가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그러고는 한다는 말이.
“나 너한테 안 미안해. 전혀.”
……그래서 뭐 어쩌라고?
멀뚱하게 키리오스를 마주 보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써요.”
누가 미안해하라고 했나? 웃기는 사람일세.
그러자 키리오스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지는가 싶더니.
“내놔.”
“네?”
“아, 쟁반 내놓으라고.”
키리오스가 냉큼 음식 쟁반을 챙겨 들고는, 잔소리를 퍼부어 댔다.
“내가 답답해서 들어 주는 거야. 네 걸음걸이로는 주방과 중앙 홀을 오가는 데만도 한참 시간이 걸릴 테니까.”
“아, 네…….”
누가 물어보기나 했답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키리오스는 긴 다리를 휘적휘적 움직여 앞서 걸어가는가 싶더니, 휙 나를 돌아보며 채근했다.
“아, 빨리 안 와?”
그런데 그때.
“콜록!”
갑자기 기침이 터져 나왔다.
화들짝 놀란 내가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가슴을 조여 오는 듯한 이 느낌, 목이 홧홧해지는 이 감각!
‘아, 불길한데.’
이거 왠지 조금 있으면 피를 토할 각인데?
왜 하필이면 마기를 회수한 부작용이 지금 또 나타나느냐고!
키리오스가 미간을 좁히며 내게 물었다.
“뭐야, 왜 그래?”
“모, 목이 간지러워서요.”
“……그래?”
키리오스는 다소 미심쩍은 표정이었으나, 솔직히 기침 두어 번 정도야 흔하게 하는 일이니까.
내 변명을 듣자 대충 납득하는 것 같았다.
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으, 저…….”
“왜?”
“화장실 가따 올게요. 먼저 가 계세요.”
“다녀와.”
키리오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하니 주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나는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갔다.
“콜록, 콜록콜록!”
화장실 문을 닫자마자, 거센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콜록, 하…….”
그렇게 내장까지 토해낼 기세로 기침을 하다가, 손을 떼어 내 보니.
‘아, 이거 큰일인데.’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몸이 으슬으슬한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양어깨를 조그맣게 움츠렸다.
“하, 진짜 운도 지지리도 업찌.”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번에 피를 토해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나 보다.
이런 날은 피를 몇 번 토해 주고, 푹 잠드는 게 최고인데.
그래도 언제까지나 화장실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읏챠.”
몸을 일으킨 나는, 일단 핏자국이 남지 않도록 꼼꼼히 손을 씻었다.
세면대 거울 너머로 내 창백한 얼굴이 비쳤다.
“조아, 오늘은 피곤해서 일찍 잔다구 하자.”
나는 양다리에 바짝 힘을 주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이거 자칫하다가는 바닥에 형편없이 나동그라질 것 같은데.
에효, 정말.
내 네 살 인생 너무 빡센 거 아니야?
* * *
“저어.”
타티아나가 중앙 홀 안으로 고개를 쏙 들이밀었다.
“오셨나요, 타티아나 양?”
세자르가 대번에 반가운 얼굴이 되어 타티아나를 맞아들였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같이 식사라도 할까요?”
“아뇨.”
타티아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저, 오늘은 일찍 자려구요.”
“……벌써요?”
세자르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타티아나가 피곤한 얼굴로 세자르를 올려다보았다.
“네, 티티 졸려요.”
“흠.”
확실히 피곤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고작해야 네 살배기 아이였다.
아침부터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간병 물품을 모은 것만 해도 상당한 운동량인데, 주방에서 음식까지 마련하지 않았나.
‘게다가 시간도…….’
세자르가 힐끔 창문 너머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어느새 황혼의 햇살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래도 식사는 하고 주무시지 그래요?”
“갠차나요, 혼자 쉬고 시퍼요.”
하기야, 쉴 때만큼은 방해받지 않고 혼자 있고 싶겠지.
고개를 끄덕인 세자르가 음식 접시를 가져와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쉬는 것도 좋지만 식사를 거르시면 안 돼요. 알았죠?”
“…….”
접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아이가 방긋 웃었다.
“네!”
그렇게 타티아나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후.
세 용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도대체 쟤 정체가 뭐야?”
키리오스가 삐딱한 말투로 포문을 열었다.
대화의 주제는 바로 ‘타티아나’였다.
“그렇게 쪼끄만 여자애가 어떻게 마왕성에 머무를 수 있는데?”
“자기 말로는 인간과 마족의 혼혈이고, 마왕성의 노예였다고 하더군.”
“뭐어? 인간과 마족의 혼혈?”
키리오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여태까지 혼혈은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잖아.”
“하지만 아이에게서 희미하게나마 마기가 느껴져. 키리오스 너도 느꼈잖은가?”
“……그건.”
냅다 정곡을 찌르는 지크프리트의 말에, 키리오스는 대답이 궁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세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지크프리트의 말에 동의합니다.”
“제기랄.”
키리오스가 짜증스레 욕설을 짓씹어 뱉었다.
마기와는 상극인 신성력을 다루는 세자르였다.
그런 세자르가 확언할 정도면, 정말로 타티아나가 아주 미약하게나마 마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건 사실일 터.
괜히 심술이 나는 바람에, 키리오스가 뚱하니 되물었다.
“너, 그냥 그 꼬마가 귀여워서 좋게 말해 주는 건 아니고?”
그도 그럴 것이, 세자르는 사제답게 자비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의 자비심은 선택적으로 발휘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예를 들자면 연약한 어린아이나 조그만 짐승들 같은…….
그래서 세자르는 고아원 지원에도 열성이었고, 작은 짐승들을 매번 주워 오는 바람에 다른 사제들이 골머리를 썩곤 했었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자르는 한심하게 키리오스를 흘겨볼 따름이었다.
“물론 타티아나 양이 무척 귀여운 건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귀여움 하나만으로 판단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이 와중에도 타티아나가 귀엽다고 꿋꿋이 말하는 저 근성이란.
세자르가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타티아나 양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태껏 마왕성에서 꽤 고생스럽게 살아오기는 했을 겁니다.”
“…….”
“…….”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족들이 타 종족을 벌레보다도 못하게 대한다는 건 그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게다가 아이는 딱 보기에도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바짝 마른 몸과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그리고 걸레보다도 못한 옷차림.
그나마 보석처럼 총명하게 빛나는 연푸른 눈동자만이 봐줄 만할 뿐.
“게다가 아이가 나이에 비해 무척 어른스럽게 행동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기는 하지만.”
“아마 생활 자체가 힘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일찍 철이 들게 된 것일 테지요.”
세자르가 지그시 키리오스를 바라보며 줄줄 말을 이었다.
“보통의 네 살짜리 어린아이는 저러지 않아요. 훨씬 더 제멋대로에 떼도 많이 쓰죠. 하지만 타티아나 양은 달라요. 그야말로 천사 같지 않나요?”
……천사?
왜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는 건데?
키리오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 저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일말의 가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동시에 세자르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 사람은 정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며, 신께서도 그 사악한 자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실…….”
“알았어, 알았다고 했잖아!”
그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키리오스는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당분간은 그냥 지켜보도록 할 테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그러자 세자르가 짧게 혀를 찼다.
“이렇게 아둔한 남자를 수장으로 두고 있다니, 마탑의 미래가 정말 어둡군요.”
“너 진짜 죽고 싶냐?”
키리오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지크프리트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애들도 아니고, 두 사람 모두 언제까지 그렇게 유치하게 싸울 생각이지?”
그렇게 한참을 옥신각신한 후에야, 세 사람은 나란히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어도 타티아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