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그건…….”
세자르가 침중한 얼굴로 입술을 떼어 냈다.
그와 동시에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들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는 마.”
“지크프리트.”
“게다가 저 아이의 건강은 당장 우리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잖아.”
지크프리트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벌써부터 저 애가 시한부라고 단정하며 침울해지기보다는, 우리가 저 아이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부터 먼저 고민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건…… 그렇지.”
“옳은 말씀입니다.”
세자르와 키리오스가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친김에 지크프리트가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일단 이 아이의 생활환경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동감이야. 저렇게 어린 꼬마를 그 쓰레기장 같은 방에서 살게 하다니, 난 상상조차 못 했다.”
키리오스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저런 곳에서 살고 있으니 병이 나는 거 아냐. 어?”
“그러고 보니, 아까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문고리 말입니다.”
세자르 또한 마침 생각났다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분명 밖에서 방문을 잠그는 구조였었죠?”
아까 타티아나의 방을 방문했을 적, 그들은 바닥에 나뒹구는 문고리 하나를 발견했었다.
전투의 여파로 문이 박살 나면서, 문고리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였는데…….
“아니, 그럼 마족들은 그 거지 같은 방에 저 쪼끄만 애를 가둬 놓고 부려 먹었단 말이야?”
키리오스가 왈칵 성을 냈다.
“자칫 문이 부서지지 않았더라면, 저 꼬마는 방 안에서 말라비틀어져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조용히 해라, 키리오스. 애가 잠에서 깨면 어떡하나.”
지크프리트의 핀잔에, 아차 한 키리오스가 불만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으으…….”
타티아나가 미간을 구기며 조그맣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질겁한 키리오스가 세자르에게 얼른 질문했다.
“얘 왜 이래? 어디가 아프기에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는 건데?”
“열이 올라서 그런 겁니다.”
그렇게 대꾸한 세자르가 키리오스에게 눈짓을 했다.
“키리오스, 가서 차가운 물을 좀 갖고 오십시오. 깨끗한 수건도 필요하고, 또 해열제도 있으면 좋겠지요.”
“너 되게 사람을 자연스럽게 부려 먹는다?”
“저는 아이를 간병해야 하니 어쩔 수 없잖습니까.”
“…….”
말문이 막힌 키리오스가 세자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세자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여 보일 따름이었다.
“하, 정말. 넌 나중에 물에 빠져서도 입만 동동 뜰 거다.”
입으로는 그렇게 핀잔을 주면서도, 결국 키리오스는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나도 함께 가지.”
지크프리트 또한 키리오스의 뒤를 따랐다.
방문을 닫기 전, 지크프리트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의 핏기 없는 얼굴이 유난히도 눈에 밟혔다.
“…….”
지크프리트는 심란한 마음을 억누르며, 조용히 방문을 닫아 주었다.
아이의 모습이 방문 너머로 사라졌다.
* * *
두 사람은 일단 세탁실로 향했다.
깨끗한 수건을 챙기던 지크프리트는, 저도 모르게 짧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러고 보면, 타티아나가 여기에 왔었지.’
타티아나가 다람쥐처럼 종종거리며 세탁실 안을 돌아다니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고사리손으로 물건들을 차곡차곡 주워 모으고, 찬장에 놓인 물건을 꺼내기 위해 낑낑 발뒤꿈치를 들었다.
그 후, 놀란 토끼 눈이 되어 그를 돌아보던 모습이 자꾸만 뇌리에 아른거려서.
“…….”
지크프리트는 괜히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런데 그때.
“야.”
가라앉은 목소리가 지크프리트를 불렀다.
키리오스였다.
“왜 부르나?”
“있잖아, 내가.”
그렇게 말문을 열어 놓고도 머뭇거리기를 한참.
키리오스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꼬마한테 계속 심술을 부렸어.”
“…….”
지크프리트는 더 말해 보라는 것처럼 키리오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솔직히 아직도 저 애가 의심스럽긴 해.”
그 침묵에 반발하듯, 키리오스의 목소리가 점차 격해지기 시작했다.
“인간과 마족 혼혈이라니,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어.”
“키리오스.”
“게다가 마왕성에서 만난 애를 어떻게 믿어? 만약 뭔가 꿍꿍이라도 품고 있으면……!”
드물게 길게 말하던 키리오스가, 이내 양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도.”
“…….”
“그래도 말이야.”
키리오스가 힘겹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꼬마한테 너무 못되게 굴었던 걸까?”
“응.”
단 한 순간의 망설임조차 없이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끈한 키리오스가 언성을 높였다.
“야, 너……!”
“그럼 내가 무슨 대답을 해 주기를 바랐어?”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키리오스 너도 괜히 마음에 걸리니까 그러는 거잖나.”
“…….”
정곡을 찔린 키리오스가 조가비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애초에 그렇게 신경을 쓸 거라면, 왜 아이한테 괜히 신경질적으로 구는지 이해가 안 가서 그래.”
“……그건.”
키리오스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그런 그를 다독이듯, 지크프리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의심하는 건 이해해. 나도 저 애를 완전히 믿진 못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크프리트, 난…….”
“아직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잖아.”
그 말에, 키리오스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크프리트가 말을 덧붙였다.
“그것도 우리를 정성 들여 간병해 준.”
그랬다.
마족과 인간의 혼혈, 처음 만난 장소가 마왕성이라는 것.
그 수상한 모든 정황에 앞서, 타티아나는 그냥 타티아나일 뿐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하는, 정확히는 그럴 능력조차 안 되는.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운 네 살짜리 어린아이.
“저 아이가 어떤 수작을 부린다 한들, 우리가 막을 수 있어.”
지크프리트는 빙그레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리, 그 정도 능력은 되잖나. 그러니까 너도 마음을 좀 편히 먹는 게 어때?”
“…….”
키리오스가 잘근 입술을 당겨 물었다.
그런 그의 어깨를 툭툭 쳐 준 지크프리트가, 이내 정색을 했다.
“고민은 그쯤하고 너도 빨리 좀 움직여라. 늦게 돌아가면 세자르의 잔소리가 어마어마할걸?”
* * *
서늘한 물기가 이마를 적셔 주었다.
‘기분 좋아.’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누군가가 물수건으로 세심하게 이마를 닦아 주고 있었다.
그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에 심취하던 중.
‘잠깐, 그런데 누가 날 간병해 주고 있는 거지?’
날 간병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순간 머리부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금실로 무늬가 들어간 화려한 캐노피 천장.
화들짝 놀란 내가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모, 모야! 여기 어디……!”
“아, 깨어나셨습니까?”
내 곁에 앉아 있던 은발 회안의 온화한 미남이,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세, 세자르…… 님?”
“예, 접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어…….”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갠차는 것 같아요.”
정말이었다.
몸이 가뿐했다.
마기의 과잉 공급으로 흐트러졌던 몸의 균형도 제자리를 찾았다.
심장이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리거나, 팔다리에 쇠뭉치를 매단 것처럼 무겁다거나 하던 증상도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그때.
붉은 머리카락의 미청년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키리오스였다.
“야, 꼬마! 괜찮은 거냐?”
“으왓!”
놀란 내가 파드득 어깨를 움츠렸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키리오스가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아니, 애초에 말이야. 넌 왜 그 허름한 방에 그냥 살고 있었냐?”
“네?”
“그렇잖아, 마족들은 우리가 싹 쓸어버렸으니 좋은 방을 차지해도 전혀 상관없는데. 계속 그런 데서 생활하니까 아프기나 하고……!”
동시에 지크프리트가 퉁명스럽게 면박을 주었다.
“키리오스, 애 놀라겠다. 애가 깨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신경질을 부리나?”
“뭐? 내가 왜 애를 놀라게 해?”
키리오스의 항변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지크프리트가 날 돌아보았다.
“하지만 키리오스의 말도 아예 일리가 없는 건 아니야. 왜 그 낡은 방에 머물렀지?”
나는 두 눈을 깜빡이다 난처하게 웃었다.
“그으, 생각을 못 해써요…….”
“아니, 왜 생각을 못 해?!”
키리오스가 대번에 짜증을 부렸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었다.
“그, 그러게요…… 바본가 바요.”
사실은 방을 옮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럴 용기가 안 났어.’
평생을 세상의 가장 어두운 그늘에서만 살아와서일까.
밝고 편안한 방을 차지하는 것 자체가 내게 허락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아까 전에 꾸었던 악몽이 아직도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만약 날 괴롭히던 마족들이 다시 돌아오면 어떡해? 그들의 침실을 사용하는 것을 들키기라도 하면?’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만약 그들이 돌아온다면 그냥 꾸중을 듣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굶거나, 매질을 당할 수도…….
“네가 왜 바보야?”
때마침 들려온 삐딱한 목소리에 나는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키리오스가 팔짱을 낀 채 뚱하니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맞습니다, 왜 그런 자기비하를 하십니까?”
“이건 나도 키리오스의 의견에 동의.”
세자르와 지크프리트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 후.
지크프리트가 짧게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하여간, 그래서 말이야.”
허리를 숙인 지크프리트가 내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해하지 말고 들었으면 해. 너는 마족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어린아이야. 그렇지?”
끄덕끄덕.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지크프리트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네가 이곳에서 홀로 살아남는 건 어려울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네에…….”
“너 같은 아이가 자라기에는, 좀 더 좋은 환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 이거 설마?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지크프리트가 덤덤하게 내게 물었다.
“어때, 우리와 함께 가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