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우와. 우와아…….
여태까지 어떻게든 저 용사들을 보호자로 삼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는 했지만.
막상 꿈꾸던 제안을 들으니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꼴깍 마른침을 삼킨 후 되물었다.
“하, 하디만…… 저는 마족 혼혈인데요?”
“너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지?”
지크프리트가 덤덤하게 되물었다.
나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어…….”
“우리는 인류의 해방과 모든 종족의 공정한 대우를 위해, 그 누구도 괴로워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운 거다.”
푸른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이 올곧은 시선이었다.
“그런 우리가, 너처럼 연약한 어린아이를 모르는 척하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지크프리트 님.”
“그러니까 그런 부분은 신경 쓰지 말도록.”
그렇게 선을 그은 후.
잠시 머뭇거리던 지크프리트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소, 손은 왜? 설마 나 때리려는 거 아니지?’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내 정수리 위에 턱 내려앉았다.
그뿐이랴? 지크프리트는 서툴게나마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가 누구의 피를 이었건 간에, 너는 그냥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야.”
“…….”
나는 멍하니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툭.
뺨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으아아, 이건 도대체 뭐야?
나는 화들짝 놀라 양손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야, 지크프리트!”
두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던 키리오스가 와락 언성을 높였다.
“네가 너무 무뚝뚝하게 구니까 애가 울잖아!”
“아, 아니. 애를 울리려던 게 아닌데……?”
지크프리트가 드물게 쩔쩔맸다.
세자르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핀잔을 주었다.
“타티아나 양은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놀라지 않도록 좀 더 부드럽게 대해 줘야지요.”
그러고는 나를 돌아보며 생긋 눈매를 휘어 보인다.
“그렇지요, 타티아나 양?”
“…….”
나는 옥신각신하는 세 사람을 눈물 고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내 기분을 세심하게 살펴 주는 것도, 내가 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들 난리법석을 부리는 것도.
그러니까,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로 대해지는 것 말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저 겁먹은 거 아니구…….”
세 남자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한번 코끝이 맵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 되는데, 처음부터 울 생각은 없었는데.
나, 정말로 괜찮은데…….
나는 눈물 고인 눈으로 최대한 환하게 웃었다.
“같이 가자고 해 주셔서, 너무 조아서 그래요!”
좋아, 드디어 용사들을 낚았다!
……라며 흡족해하는 마음도 물론 있었지만, 그보다 내게 가장 새삼스럽게 느껴졌던 건.
‘어른 보호자가 있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그러한 안도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정말로 보호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깃털로 문지르는 것처럼 가슴이 간질거렸다.
비록 낯선 감정이었지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것 같기도.’
나는 괜히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그래요, 감정이 복받치면 그럴 수도 있지요.”
고개를 끄덕인 세자르가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어 내 코에 들이대 주었다.
“흥 하세요.”
“……흥이요?”
그러니까 이거, 그거 맞지?
코를 풀라고 하는 그거?
나는 살짝 세자르의 눈치를 살폈으나, 세자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예. 흥.”
“…….”
한참을 멈칫거린 후에야 나는 코를 풀었다.
손수건에 내 콧물이 묻었으니 분명 더러울 텐데.
세자르는 전혀 개의치 않고 손수건을 접어 챙기고는, 내 눈물까지 닦아 주었다.
“다만 너무 오래 울면 몸이 힘드니까요. 무리하면 안 돼요. 알았죠?”
“…….”
뒤늦게 밀려오는 민망함에, 나는 딱 잡아뗐다.
“저 안 울어써요.”
“네에, 네. 안 우셨죠.”
“이거는 구냥…… 눈이 뻑뻑해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래요, 알겠다니까요?”
웃는 낯으로 그렇게 대답한 세자르가, 살뜰하게 내 눈물 콧물을 닦아 주었다.
내 등을 도닥여 주는 손길이, 나를 바라보는 세 용사의 시선들이 너무나도 상냥해서.
“티티 졸려. 잘래요.”
나는 괜히 그들의 시선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썼다.
* * *
다음 날.
나는 용사들과 함께 오랫동안 갇혀 살던 마왕성을 떠났다.
긴 여정이 이어졌다.
온갖 새로운 경험을 해 보았다.
야영도 처음 해 보고, 모닥불도 처음 피워 보고, 용사들이 잡아 온 사냥감도 구경해 보았다.
“봐라, 꼬마. 이건 내가 따 온 거라고.”
가지런히 놓인 열두 개의 내 머리통만 한 노란 열매를 가리키며, 키리오스가 어깨를 우쭐거렸다.
“대다내요!”
내가 박수를 짝짝짝 치자, 키리오스의 어깨가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아졌다.
또한 세자르는 요리를 아주 잘했는데, 특히 소금과 후추를 뿌려가며 구운 나무 열매는 혀가 녹을 정도로 맛있었다!
참고로 키리오스는 뭐 그렇게 번거롭게 굽느냐며 대뜸 불덩이를 소환했다가, 기껏 따 온 열매들을 몽땅 태워 먹었다…….
저녁에 잠들기 전에는, 지크프리트는 나를 곁에 앉혀 두고는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이름들을 알려 주었다.
하루하루가 마치 소풍이라도 떠난 것처럼 즐거웠다.
그 후 솔직히 제국으로 갓 진입했을 때는, 내게 마족 티가 나서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면 어떡하나 걱정스럽긴 했지만.
“긴장할 것 없어요.”
세자르는 내 어깨를 도닥여 주었고,
“뭘 쫄고 그러냐? 너한테 뭐라고 하는 녀석들이 있으면 내가 다 날려 버릴 텐데.”
키리오스는 입술 끝을 밀어 올리며 씩 웃어 보였고,
“키리오스, 마탑주로서 언행에 품위를 좀 지켜라. 하지만 네 말 자체에는 동의한다.”
지크프리트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그렇게 말을 거들었다.
이런저런 일 끝에, 우리는 마침내 제국 수도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가 본 수도는…….
‘와, 진짜 대박.’
나는 마차 창문에 찰싹 달라붙은 채, 제도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수많은 풍경들이 창 너머로 스쳐 지나갔다.
울퉁불퉁한 곳 없이 잘 정돈된 거리, 예쁘게 차려입고 길을 걷는 행인들, 알록달록한 건물들까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이 사는 도시 같잖아?!
그런데 그때.
“타티아나, 그러다 창문 밖으로 넘어가겠군.”
짧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내 목덜미를 달랑 들어 마차 안으로 옮겨놓았다.
지크프리트였다.
“조심 좀 해라.”
“네에.”
입으로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자꾸만 눈이 창밖으로 돌아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가 창문 밖을 흘끗거리고 있던 중.
“그건 그렇고, 앞으로 꼬마는 누가 맡아서 키울 거야?”
키리오스가 갑자기 폭탄을 떨어뜨렸다!
허억.
나는 그 자리에 바짝 굳어지고 말았다.
지크프리트가 대번에 키리오스에게 눈총을 주었다.
“애가 있는 자리에서 꼭 그런 화제를 꺼내야 하나?”
“왜? 앞으로 꼬맹이가 살 곳이잖아. 오히려 본인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키리오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대답에 지크프리트가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짧게 감탄한다.
“키리오스, 네가 맞는 말을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뭐라고?”
키리오스가 발끈했다.
하지만 이미 지크프리트와 세자르는 키리오스에게는 전연 신경 쓰지 않은 채, 내 거취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좋은 가정을 찾아주려고 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건 좀 그렇죠. 아무래도 인간과 마족 혼혈이니, 타티아나 양이 불편할 수도 있어요.”
난 얌전히 세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왕 우리가 맡기로 했으니, 타티아나 양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군요.”
“맞아. 혹시 꼬마가 마족으로 각성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직접 보살피는 편이…….”
별생각 없이 세자르의 말에 동조하던 키리오스가, 순간 흠칫하여 날 돌아보았다.
“그, 꼬마야. 네가 무조건 폭주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라요.”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족과 인간 사이에 쌓인 악감정만 봐도, 저 세 사람이 나를 받아들인 건 엄청난 관용을 베푼 것이니까.
키리오스가 어떻게든 변명하려 했다.
“그, 내가 널 싫어해서 저런 말을 한 게 아냐. 알지?”
“네에, 알고 이써요.”
안심하라는 뜻으로 방긋 웃어 보이자, 키리오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토론이 이어졌는데.
“그렇다면 타티아나의 보호자는 내가 맡는 편이…….”
지크프리트가 입을 열자마자 키리오스가 딴죽을 걸었다.
“아니, 왜 네가 데려가?”
“그야 타티아나의 마족 각성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제국 최고의 기사단을 보유한 우리 가문이 맡는 게 옳지 않나?”
“아니, 마탑에 굴러다니는 게 뛰어난 마법사들이거든? 저 꼬맹이가 폭주한다 한들, 그 정도야 못 막아내겠어?”
키리오스의 철벽 방어에 지크프리트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도 난 반대야. 혹시나 아이가 네 눈칫밥을 먹고 자라게 되면 어떡하나?”
“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럴 일 없거든!”
키리오스가 정색을 하며 팔팔 뛰었다.
동시에 세자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할 거라면 제가 타티아나 양의 보호자가 되는 게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뭐야?”
“그건 또 무슨 소리지?”
키리오스와 지크프리트가 살벌하게 세자르를 돌아보았다.
우와.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나, 두 사람이 저렇게 정색하는 모습은 처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