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 *
저택 안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지크프리트와 헤어졌다.
가주인 지크프리트가 공작 가를 비운 지 워낙에 오래되었기에, 당장 살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운하우스에 데려오자마자 혼자 두게 되다니, 면목이 없구나.”
지크프리트는 그렇게 못내 미안한 얼굴을 했으나,
“갠차나요, 저는 신경 쓰지 마라요!”
나는 괜찮다며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찮은 아이가 되어서는 안 돼.’
일단 세 용사 모두, 당분간 내 보호자가 되어 주겠다고 선언했으니까.
당장 내쫓길 걱정까지는 할 필요 없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보호를 받으려면, 나도 그만큼 노력해야 해.’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목표는 단 하나였다.
손이 가지 않고, 착하고, 말 잘 들으며, 쓸모 있는 아이가 되는 것.
‘그래야만 세 용사들에게 미움받는 일 없이, 용사들의 보호하에 안전하게 어른이 될 수 있을 거야.’
좋아.
용사들과 호감을 잘 쌓아서, 어른이 될 때까지 알차게 이것저것 빼먹고 튀는 거야!
그렇게 마음을 단단히 다져 먹던 나는, 문득 아까 만났던 그 중년 부인에게로 생각이 닿았다.
‘그런데…… 그 부인은 왜 그렇게까지 나를 싫어하는 거지?’
나를 위아래로 뜯어보던 그 차가운 시선과, 얼굴 위로 스치던 짙은 혐오감까지.
‘그 사람과 나는 오늘 처음 만났잖아. 그런데도 내가 밉보일 이유가 있나?’
가장 큰 문제는, 그 부인은 사용인들 중에서 상당히 신분이 높아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미움받는다면, 내 안락한 생활이 어그러질 가능성이 높은데…….
내가 고민에 잠겼던 바로 그때.
“안녕하세요, 아가씨.”
솜털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응?’
화들짝 놀란 내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하녀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젊은 언니가 나를 향해 수더분하게 웃고 있었다.
“제 이름은 노라예요. 아까 잠시 뵈었었죠?”
아, 맞아.
아까 사용인들 사이에서 봤었어!
당시에는 날 살벌하게 노려보던 중년 부인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곧바로 알아보지를 못했다.
나는 얼른 배꼽 인사를 했다.
“반갑슴미다, 저는 타티아나예요!”
“말씀 놓으셔요.”
고개를 가로저은 노라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답니다. 목욕을 마치신 후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고마아요! ……아니, 고마아!”
제국으로 들어오면서부터는 매번 여관에 들러 몸을 씻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차에 오래 실려 있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내 상태는 무척 꾀죄죄했다.
‘깨끗하게 씻고 말쑥한 모습이 된다면, 타운하우스의 사람들에게도 훨씬 더 잘 보일 수 있겠지?’
그런 계산이 선 것이다.
한편 내 초롱초롱한 욕망의 눈빛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노라가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욕실로 갈까요?”
“네, 아니, 웅!”
나는 도도도 노라의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도착한 욕실은.
‘와아, 좋은 향기.’
새하얀 타일로 깔끔하게 마감된 욕실 안에서는 장미 향이 폴폴 풍겼다.
아마 이 향기, 저쪽에 있는 커다란 욕조에서 나는 것 같은데…….
코를 킁킁거리고 있자니 노라가 상냥한 손길로 내 어깨를 짚었다.
“옷을 벗는 것을 도와드릴게요.”
“응? 왜?”
나는 의아한 얼굴로 노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노라가 도리어 어리둥절해져서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 그야 목욕을 도와드려야 하니까…….”
“도와주지 않아두 대, 나 혼자 씻을 수 이써.”
순간 노라가 허를 찔린 표정을 했다.
어라, 왜 저런 얼굴이람?
어쩐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기에, 나는 부연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노라는 바쁘자나.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않아요.”
“…….”
그렇게 말하며 노라의 표정을 면밀히 관찰하던 나는, 순간 움찔 어깨를 굳히고 말았다.
손이 가지 않는 아이니까.
어른들을 번거롭게 만들지 않으니까.
분명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노라의 얼굴이 먹구름 낀 하늘처럼 흐려지고 말았다!
‘아니, 도대체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나, 뭔가 말실수라도 한 건가?
하지만 여태까지 혼자서 씻어 왔는걸.
그러니까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는데?
“아가씨.”
노라가 천천히 자리에 쪼그려 앉고는, 나와 시선을 맞추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아가씨께서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네 살.”
“네 살이셨군요…….”
내 대답을 곱씹던 노라가 이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렇게 어린 나이이신데도 혼자 씻으시겠다고 하신 거예요? 정말 기특하세요. 하지만…….”
말끝을 흐리던 노라가 양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가씨께서 제게 목욕 시중을 들도록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제 할 일이 없어져요.”
“으, 응?”
“물론 아가씨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강요할 수는 없지만…….”
노라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두 눈을 내리깔았다.
그, 그런 거야?
나는 힐끔 노라의 눈치를 살피다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타면 조금만 도와조…….”
“감사합니다, 아가씨!”
노라가 다시 한번 생글 웃었다.
으음, 뭔가 낚인 기분이 드는데. 아니겠지?
난 미심쩍은 기분으로 노라의 도움을 받아 옷을 벗었다.
그리고.
“세상에…….”
노라가 놀란 얼굴로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고는 황급히 표정을 고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 일단 욕탕으로 들어가실까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기분이 좋아지실 거예요.”
음, 역시 보기 흉한가?
나는 슬쩍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는 몸뚱어리나, 마른 나뭇가지처럼 가느다란 팔뚝.
뭐, 내 몸이 또래보다는 조금 빈약하기는 하지.
그래도 세 용사들이랑 같이 다니면서 꽤 살이 붙은 건데…….
“머리를 감겨 드려도 될까요?”
“응, 조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노라는 내 몸을 꼼꼼하게 씻겨 주었다.
따뜻한 물을 몸에 끼얹고, 비누칠을 하고, 비눗물을 씻어내 준다.
날 다루는 손길은 하나같이 조심스럽고 상냥했기에, 나는 어쩐지 조금 가슴이 뭉클했다.
‘이런 건…… 정말 처음이야.’
나는 괜히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용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나를 신경 써 줬지만, 아무래도 성별이 다르다 보니 목욕 시중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 챙겨 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일일이 챙김받는 건 처음이라고나 할까.
“자, 다 됐어요.”
마지막으로 수건으로 내 몸의 물기를 닦아 준 노라가, 내게 목욕가운을 입혀 주었다.
나를 달랑 안아 들고는 욕실 바로 옆에 딸린 파우더 룸으로 향한다.
“머리가 오래 젖어 있으면 감기에 걸려요.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물기를 날려야 하는데…….”
걱정스레 중얼거리며 수건으로 머리를 폭 감싼다.
머리카락을 말려 주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런.”
노라가 난감한 얼굴로 내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관리하지 않아서 제멋대로 자라난 머리카락은, 수건으로 털어 내는 정도만으로도 엉망으로 뒤엉켜 버렸으니까.
“……머리카락이 많이 상했네요.”
저도 모르게 안쓰러운 표정을 짓던 노라는, 거울 너머로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엉키지 않도록 잘 빗질해 드릴 테니까요.”
“응!”
노라가 내 젖은 머리를 살살 빗질해 주었다.
한편 노라가 내 머리카락에 온통 정신이 팔린 틈에, 나는 은근슬쩍 아까 만났던 그 중년 부인에 대해 물어보았다.
“근데, 노라.”
“네?”
“아까 지크프리트 님께 인사했었던 부인 있자나. 그분은 누구셔?”
그러자 내 머리를 빗질하던 노라의 손길이 조금 느려졌다.
“아,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기베르티 백작대부인?”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네. 공작 각하의 고모님 되세요. 전대 백작님과 사별하신 후에 저희 타운하우스의 총괄 관리인이 되셨죠.”
흐음.
나는 도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원작의 흐름은 대충 이랬다.
세 용사들이 마왕성을 토벌하러 갔다가 불의의 죽음을 맞이한 후, 지크프리트의 작위는 사촌에게로 넘어갔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지크프리트가 무사히 살아 돌아왔지.’
그렇다면 지크프리트의 생환은, 적어도 공작 작위를 탐내는 다른 사촌들에게는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닐 것이다.
“그럼 기베르티 백작대부인께서는 지금 가족이 없으신 고야?”
“아뇨, 아드님이 계시죠. 그분이 기베르티 백작 작위를 이으셨어요.”
“근데 왜 그 아드님이랑 안 사시구, 총괄 관리인 일을 하고 계셔?”
“그게, 가주님께서 마왕성을 토벌하러 가셨었잖아요?”
내 엉킨 머리카락 끝을 세심하게 풀어내며, 노라가 조곤조곤 설명을 이었다.
“아무래도 가주님께서 오랫동안 타운하우스를 비워 두는 상황이니까,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자원하신 것으로 알아요.”
어라, 그래도 조금 이상하지 않아?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원작 안에서 묘사되기로, 지크프리트는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계신걸.
‘물론 두 사람의 사이는 최악이기는 하지만.’
하여간, 내 말은!
굳이 고모를 들여서까지 오를레앙의 타운하우스를 관리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선대 공작이 직접 사람을 보내도 되니까.
그런데도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은 자원해서 타운하우스의 총괄 관리인으로 들어왔다.
흡사, 공작가에 관여할 기회를 어떻게든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음, 내가 너무 꼬아서 생각하는 건가?’
그런데 그때.
벌컥!
노크조차 없이 거세게 문이 열렸다.
“아니, 아직도 준비가 다 안 끝난 거야?!”
파우더 룸 안으로 난입한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이, 짜증스러운 시선으로 나와 노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