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잠시 후.
“여태까지 고모님께서 제 타운하우스를 여러모로 신경 써 주신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지크프리트는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
“다만 도서들을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한 일이나, 제 생각으로는 책 몇 권보다는 아이가 더 중요한 것 같군요.”
“……가주님?”
“물론 고모님의 말씀대로 아이가 책을 다루다가 실수로 더럽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제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요.”
지크프리트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니 저는, 책보다는 제가 보살피기로 한 아이를 조금 더 우선시하려고 합니다.”
우와.
나는 두 눈을 반짝였다.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면서도, 내 편을 들어 주는.
그야말로 흠잡을 곳 없는 언변이지 않은가!
“음식이 식습니다. 마저 식사하시지요.”
지크프리트가 우아한 동작으로 스푼을 들어 올리며 백작대부인에게 권유했다.
“……예, 가주님.”
백작대부인은 입술을 꾹 깨물며 식기를 움켜쥐었다.
나는 속으로 싱글벙글 웃었다.
‘우리 용사님, 말 잘한다! 용사님 최고!’
뭐, 그 후로는 즐거운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나는 식도락 삼매경에 빠졌다.
크림 스튜에 들어 있는 닭고기를 건져 오물거리기도 하고, 흰 빵 위에 잼과 버터를 층층이 쌓아 올려 보기도 했다.
“와앙.”
말랑말랑한 흰 빵을 한 입 베어 무니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와, 너무 맛있어!’
어쩌면 좋아, 이 황홀한 맛에 자꾸만 웃음이 나잖아?
내가 헤실헤실 웃고 있던 그때.
“타티아나.”
저 멀리 상석에 앉아 있던 지크프리트가 나를 불렀다.
‘응?’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크프리트를 돌아보자, 그가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려 보였다.
“입술에 잼이 묻었다.”
아앗!
나는 황급히 냅킨을 집어 들려 했으나,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다.
“이런, 아가씨.”
내 바로 옆에서 냅킨을 쥔 손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제가 닦아 드릴게요.”
그 사근사근한 말투와는 다르게, 냅킨이 입가를 문지르는 동작은 사뭇 거칠었다.
‘저기요, 아프거든요?!’
입가가 어찌나 쓰라린지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이윽고 냅킨을 거둬 낸 백작대부인이 방긋 미소 지었다.
“좋아요, 깨끗해졌네요.”
“네에…….”
으아아, 내 입술 까진 거 같아…….
울상이 된 채 욱신거리는 입가를 어루만지던 난, 남몰래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을 노려보았다.
자꾸 이렇게 치사하게 괴롭힐 거야?
‘아냐, 참자.’
오늘은 타운하우스에 온 첫날이니까.
지금은 어떻게든 착한 아이로 보여야만 해.
나는 분노를 꾹꾹 억눌러 담으면서, 잼을 잔뜩 바른 빵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 * *
“미안하구나, 타티아나.”
식사가 끝나자마자 지크프리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구나.”
“갠차나요!”
나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티랑 가티 밥 머거 줘서 고마아요!”
“별말을 다 하는군.”
지크프리트가 짧게 혀를 찼다.
“넌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오늘은 푹 쉬도록.”
“네!”
최대한 순해 보이도록 방긋방긋 웃어 보이자, 지크프리트도 나를 따라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빠져나간다.
그러자,
“이제 이 식기들은 그만 쓰세요.”
백작대부인이 내가 쥐고 있던 어린이 식기들을 휙 빼앗아 버렸다!
“처음부터 어른 식기에 적응하시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요.”
……으응?
나는 삐걱거리며 백작대부인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갑자기요?
굳이 벌써부터 어른 식기에 적응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어차피 손이 조금 커지면, 그때부터 써도 상관없을 텐데요?
이거 완전히 텃세 부리는 거잖아!
하지만 백작대부인은 내게 어린이 식기를 되돌려 주기는커녕, 도리어 팔짱을 끼며 나를 흘겨보았다.
이건 뭐,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절대 물러나지 않을 기세인데…….
“…….”
나는 막막한 눈으로 남은 음식을 내려다보다가,
‘아냐, 먹을 수 있어.’
굳은 결심을 하며 묵직한 스푼을 움켜쥐었다.
최대한 깨끗하게 먹는 것을 목표로, 조심스럽게 스푼을 스튜 안으로 담가 봤는데.
‘아니…… 이건 너무 무겁잖아……?’
간신히 움켜쥐기는 했는데, 워낙에 무게가 묵직해서 제대로 식기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한 입 먹어 보려고, 입을 아앙- 하고 벌렸지만.
후두둑.
“…….”
나는 흐린 눈으로 식탁보 위에 쏟아진 닭고기와 크림소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백작대부인이 혀를 쯧쯧 차며 들으란 듯이 중얼거린다.
“식탁 예절이라고는 전혀 지킬 줄도 모르고, 질질 흘리면서 먹기는. 천박해서 못 봐 주겠네, 정말…….”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다.
내가 속으로 세뇌하듯 중얼거리던 그때.
“저, 총괄 관리인님.”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노라?’
나는 두 눈이 동그래져서 노라를 응시했다.
“뭐지?”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노라를 바라보았다.
그 사나운 시선에, 노라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하지만.
“아직 아가씨께서 나이가 어리시니, 성인 식기를 사용하시는 건 불편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아무래도 지금은 어린이용 식기를 쓰시는 편이…….”
노라는 떨리는 목소리로나마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나 저런 상식적인 말을 귀담아들을 정도의 성품이라면, 애초에 나를 이렇게 괴롭히지도 않았겠지.
“누가 함부로 내 명령에 토를 달라 했지?”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이 살벌한 시선으로 노라를 쏘아보았다.
“애초에 누가 어린이 식기를 갖다 놓으라고 한 거야?”
“저, 저입니다만.”
“네가 뭔데 마음대로 식기를 갖다줘?”
“…….”
그 모욕적인 언사에, 노라가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백작대부인은 재차 들으란 듯이 빈정거렸다.
“애를 너무 오냐오냐 키웠다가, 자기가 진짜 공녀라고 착각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관리인님, 그건……!”
사색이 된 노라가 어떻게든 백작대부인을 말리려 했으나, 백작대부인은 요지부동이었다.
“저 애가 언제까지 이 타운하우스에 있을 거 같아?”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우와, 지크프리트가 자리를 뜨자마자 저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바뀔 줄이야?
아무리 기분이 나쁘다지만 별말을 다 하네!
한편 노라는 질겁을 했다.
“관리인님, 아가씨께서 다 들으세요!”
“뭐 어때? 들으라고 해.”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날 곁눈질로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도 못 텐데 말이야.”
……저기, 나도 귀 있거든?
아무리 내 겉모습이 네 살배기 꼬마라지만, 어떻게 사람 면전에 대고 저렇게 무시를 해 대지?
“그, 그래도요.”
노라는 어떻게든 항변을 하려 했으나,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해 대는 거야?”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은 사납게 노라를 쏘아 볼 따름이었다.
“…….”
노라는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저 꼬마가 더럽힌 식탁보나 깨끗하게 세탁해 놔. 알았어?”
날카롭게 쏘아붙인 백작 부인은, 찬바람이 쌩하니 불도록 식당을 나가 버렸다.
노라가 안타까운 눈으로 날 응시했다.
“저, 아가씨.”
“웅?”
“방금 전 관리인님께서 하셨던 말씀은, 그러니까…….”
“갠차나, 티티 무슨 소린지두 몰라.”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기에, 나는 노라에게 씩 웃어 주었다.
너무 걱정 마, 저 정도 텃세는 마왕성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못 되니까!
“…….”
하지만 노라의 얼굴은 점점 더 흐려질 따름이었다.
‘에휴.’
나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꿀 겸, 아무것도 모르는 척 노라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있자나, 노라.”
“네?”
“나 예의 바른 사람 되고 시퍼. 이거 어떻게 먹는 고야?”
나는 식탁 위에 늘어서 있는 수많은 식기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노라는 입술을 잘근 깨무는가 싶더니,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는 예의 없는 사람이 아니세요.”
“……웅?”
“관리인님 말씀은 신경 쓰지 마세요. 아직 배우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방법을 알겠어요?”
그러고는 크림스튜를 한 숟갈 퍼서 내 입가로 내밀었다.
“어른 식기는 너무 무거우니까, 오늘은 제가 먹여 드릴게요.”
“어…….”
“아 하세요. 네?”
“…….”
어쩐지 조금 낯이 간지럽기는 했지만, 나는 얌전히 입을 벌렸다.
‘노라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그런 거야, 내가 어린애라서 그런 게 아니야!’
부끄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 말이다.
한편, 내 입에 음식을 넣어 준 노라가 나를 향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맛있으세요?”
“웅!”
나는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프리트가 ‘세자르가 요리한 것보다 더 맛있을 것이다’라며, 자신만만해할 가치가 있는 음식이었다.
흠, 이게 전문가의 솜씨라는 건가?
* * *
타티아나가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려, 노라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아 들었다.
긴 여행 때문에 피로가 쌓였을 테니, 넓은 저택을 돌아다니는 건 역시 다리가 아플 것 같아서였다.
타티아나는 얌전히 노라의 품에 안겼다.
그런데.
찌이익.
아이가 노라의 목깃을 움켜쥐자마자, 목깃이 통으로 뜯어져 버렸다.
“헉.”
사색이 된 타티아나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오, 옷이 찢어져써…….”
“괜찮아요, 아가씨!”
노라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가씨 탓이 아닌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