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사실이었다.
정상적인 옷은 아이가 붙드는 정도로 찢겨져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노라의 하녀복이 왜 이 꼴이 되었느냐 하면.
‘기베르티 백작대부인께서 총괄 관리인이 된 후로, 지급되는 옷의 질이 부쩍 안 좋아졌지…….’
단추 같은 부자재들은 싸구려로 바뀌거나, 아예 단추가 빠져 있는 경우도 많았다.
옷감이 쉽게 찢겨져 나가는 건 물론이거니와, 빨래를 한두 번만 하면 옷감이 엉망으로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쉽사리 백작대부인에게 옷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이 밥버러지들 같으니, 옷 하나도 아껴 입지 못해서 이 사달을 내?!’
백작대부인의 불호령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아마, 공작가의 타운하우스에서 백작대부인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용인들은 없을 것이리라.
‘왜 방문을 소리 나도록 닫는 거야? 지금 나한테 반항해?!’
별것도 아닌 일로 트집을 잡는다거나, 아랫사람을 모아 두고 호통을 치거나.
‘저 계집에게 식사를 챙겨 주기만 해 봐, 다들 혼쭐을 내 줄 테니까!’
기분이 수틀리면 식사를 굶기는 건 부지기수.
‘어딜 따박따박 말대꾸야?!’
짝!!
심지어는 사용인들이 뺨을 맞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어린 아가씨에게까지 모질게 구실 필요는 없잖아.’
노라는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무리 아이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당사자가 듣는 앞에서 천박하네 예의가 없네 떠들어 댈 줄이야.
비록 나이가 어리다 한들, 저를 향한 적의는 모를 수가 없는데.
저 조그만 아이가 잔뜩 기가 죽어서, 살금살금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습이라니…….
‘갠차나, 티티 무슨 소린지두 몰라.’
그 와중에도 노라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노라를 다독였었다.
하지만.
‘정말로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셨다면, 저런 말씀도 굳이 안 하셨을 텐데…….’
그런데 그때.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노라를 불렀다.
“노라?”
아차.
아가씨를 앞에 둔 채, 너무 오래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노라가 타티아나를 내려다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정말로 괜찮으니까요.”
“그, 그래두.”
“꿰매서 붙이면 돼요. 네?”
노라는 다시 한번 타티아나를 달랬다.
“식사도 다 하셨으니, 이제 침실로 데려다드릴게요.”
순간 아이는 제가 움츠러들었던 것조차 까맣게 잊고, 화색이 되어 되물었다.
“내 침실?”
하늘색 동그란 눈동자가 기대감에 가득 차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 이제 좀 기운을 차리셨나 보다.’
노라는 얼른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 아가씨께서 머무실 침실도 모두 준비되었답니다.”
“그, 그럼 그 침실은 내 꺼야?”
“그럼요, 아가씨께서만 쓰시는 침실이지요.”
아이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옷 너머로, 아이의 조그만 심장이 기대감으로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노라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그렇게 좋으세요?”
“조아!”
아이는 목이 떨어져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해야 침실 하나로 저렇게 기뻐하다니.
저 모습만 봐도, 아이가 여태까지 얼마나 신산한 삶을 살아왔는지 알 것만 같아서…….
“…….”
아이가 사랑스러운 와중에도, 노라는 입맛이 조금 썼다.
* * *
그리하여 마침내, 처음으로 내 방을 보게 되었던 그때.
“와. 와아. 와아아…….”
나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감탄성만 흘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내 침실은 그야말로 환상적인걸!
“어때요, 침실은 마음에 드시나요?”
“응!”
나는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레이스 캐노피가 하늘거리는 침대, 폭신폭신한 양탄자. 널따랗게 뚫린 창문.
그리고 앙증맞게 배치된 새하얀 가구들까지!
마왕성의 호화로운 침실도 가 봤고, 야외에서도 야영을 해 봤고, 여관의 특실에서도 자 봤지만.
그래도 내 방이 제일 좋아!
“저는 이만 물러가 볼 테니,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고마아!”
나는 손을 붕붕 흔들어 보였다.
노라는 마지막으로 내게 웃어 주고는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동시에 나는 휙 고개를 돌려 침대를 바라보았다.
나, 아까 전부터 이 침대에 꼭 누워 보고 싶었어!
침대 위로 낑낑거리며 기어 올라가 폭 엎드리자, 보들보들한 베개의 촉감이 뺨을 간지럽혔다.
‘우와, 폭신폭신해…….’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마구 발을 굴렀다.
……사실은 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용사들을 구워삶아서 내 보호자로 삼은 것도,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게 된 것도.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된 것도…….
‘그러니까.’
나는 몸을 뒤척여 똑바로 누웠다.
‘이 행복을 잃지 않으려면, 내 목표 설정을 똑바로 해야만 해.’
방을 처음 보았을 때의 흥분이 천천히 가라앉고, 차가운 이성이 되돌아온다.
나는 손가락을 꼽아 가며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하나, 용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내가 안정적으로 인간계에서 살아가려면 용사들과의 원만한 관계는 필수적이다.
어떻게든 그들을 보호자로 삼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시 모자라다.
용사들에게 호감을 얻으면 얻을수록 내게 유리하니까.
‘둘, 이 세계의 남자주인공을 어떻게든 피하기.’
남자주인공은 원작에서 내 목을 날려 버리는 주범이다.
나로서는 최대한 얽히지 않는 편이 최선이겠지.
‘셋, 독립할 준비하기.’
언제까지나 용사들과 함께 살 수는 없다.
25살.
내가 마왕으로 각성하는 나이다.
물론 내가 마왕으로 각성해서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절대자가 된다면, 독립자금 같은 건 전혀 필요 없겠지만.
……문제는 아직 마왕으로 각성하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는 거다.
그러니 최소한의 안전망을 갖출 겸, 자립을 위한 자금은 마련해 두는 게 좋으리라고 판단을 내렸지만.
결국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넷, 마왕으로 각성하기.’
이거다.
마왕으로 각성함으로써 내가 얻는 이득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일단 마기가 내 몸을 공격함으로써 목숨이 간당간당해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게다가.
‘나를 학대했던 마족들에게 복수도 할 수 있어!’
나를 직접적으로 이용했던 다섯 마족은 이미 죽어 버렸지만, 진정한 흑막은 따로 있었다.
내가 정말로 복수해야 할 이들은…….
‘바르톨로아 일족.’
그들을 떠올리는 것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위대한 바르톨로아’라는 이명으로 더 유명한 그들은, 마계의 로열 블러드나 다름없었다.
모든 고위 마족들을 통솔하는 수장이자 마계의 영원한 2인자.
비록 외부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들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그들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하냐면, ‘마왕은 언젠가 바뀔지언정 바르톨로아는 영원하다’라는 속설까지 있을 정도다.
‘나를 꼭두각시 삼았던 다섯 마족들도 모두 바르톨로아의 수하였어.’
결론적으로, 내 인생을 나락으로 처박은 진짜 흑막들은 바르톨로아 일가라는 거지.
‘망할 자식들.’
나는 두 눈에 날을 세웠다.
다만 위안이 되는 점은, 용사들을 따라 인간계로 넘어오면서 일단은 바르톨로아의 마수에서도 벗어났다는 거다.
나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내가 마왕이라는 사실은 당분간은 밝혀질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르톨로아와 고위 마족들에게 있어, ‘진짜 마왕을 감금한 후 마왕을 참칭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는 건 상당한 부담일 테니까.
게다가 원작 피셜로, 선대 용사들은 마계를 거의 박살 내면서 진입했다고 했었다.
지금 시점에서 바르톨로아는 온전한 힘을 보전한 유일한 가문이니, 마계의 피해를 복구하느라 정신이 없겠지.
그 말은 뭐다?
이쪽에 신경을 쓰기 어렵다는 소리다.
‘뭐, 그러니 당분간 마계 쪽 일은 안심해도 될 것 같지만…….’
하지만 마계 내부의 정리가 끝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바르톨로아 일족은 분명 마왕인 나를 되찾으려 들 테지.
저들이 언제 인간계에 침투해서 내게 접근할지 모르니, 나도 용사들의 보호 없이도 내 한 몸을 지킬 수단이 필요하다는 건데.
에효, 산 넘어 산이네.
나는 포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마왕으로 최대한 빨리 각성해야만, 이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된다는 거잖아?’
그렇다고 용사들의 휘하에 들어온 이래로, 마음이 완전히 편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란 말이지.
이 타운하우스에 온 이래로,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노라의 옷.’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공작가의 하녀인데.
그렇게 질이 나쁜 옷을 하녀복이랍시고 지급한다고?
“흐음…….”
나는 자리에 누운 채, 내 양 손을 쭉 펴고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이 조그마한 손의 악력으로는 식기 하나조차 들기 어려운데.
가볍게 움켜쥔 것만으로 목깃이 찢겨져 나가다니…….
‘역시 좀 수상하단 말이야.’
그렇게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중.
“하암.”
나는 입을 가리며 짧게 하품을 했다.
뜨거운 물에 목욕도 하고, 식사도 배부르게 해서 그런 걸까.
온몸이 노곤했다.
폭신한 이불이 내 몸을 끌어당기는 것만 같다.
‘벌써부터 잠들면 안 되는데, 고민할 일이 엄청 많은데…….’
그런 생각을 끝으로.
나는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