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 *
어두운 밤.
지크프리트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철들을 앞에 둔 채,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를 고민케 하는 대상은 바로 타티아나.
정확히는 타티아나의 양육 문제였다.
‘……저 나이 때에 공부를 하고 싶다는 게 정상인가?’
타티아나는 고작해야 네 살이었다.
한 손으로 움켜쥐면 그대로 으스러질 것만 같은, 작고 가녀린 아이.
‘쓸모 있는 아이가 되고 시퍼요.’
‘웅. 책 마니 읽어서 똑똑해지면 지크프리트 님두 도와줄 수 있자나요.’
아이의 천진한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이 부분은…… 역시 나 혼자서 판단하면 안 되겠지.’
어쨌든 세자르와 키리오스도 아이의 보호자가 되기로 했으니, 아이의 지나친 어른스러움에 대해서도 함께 상의하는 게 옳으리라.
“쯧.”
불만스럽게 혀를 찬 지크프리트가 펜을 집어 들었다.
아이의 상태를 간략하게 적은 지크프리트가, 편지를 봉하고는 종을 울려 사람을 부른다.
잠시 후.
시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이 편지들을 세자르와 키리오스에게 전달하도록.”
“예, 가주님.”
시종이 공손히 허리를 조아리고는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 잠깐만.”
“예?”
잠시 머뭇거리던 지크프리트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시종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린아이는 보통 무슨 간식을 좋아하지?”
“타티아나 아가씨를 챙겨 드리려고 하시는 겁니까?”
시종이 눈치 빠르게 되물었다.
지크프리트는 괜히 귀 뒤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렇다면…… 달콤한 간식 쪽을 즐기시지 않을까요?”
시종이 씩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리시니까요.”
달콤한 간식이라.
그 대답을 곱씹던 지크프리트가 재차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간식을 좀 챙겨 오도록 해.”
“예? 지금 말입니까? 아가씨께서는 이미 잠자리에 드셨을 텐데요.”
시종이 두 눈이 동그래져서 되물었다.
이미 여덟 시를 훌쩍 넘긴 시각.
어른에게는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아이는 잠자리에 들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지크프리트가 몸을 일으켰다.
“됐네. 주방에는 내가 직접 가도록 하지.”
“예? 하지만…….”
어리벙벙한 시종을 뒤에 남겨둔 채, 지크프리트는 훌쩍 밖으로 빠져나갔다.
생각해 보면, 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타운하우스에 왔다.
모든 게 낯설 테지.
그러니 아이가 아직 깨어 있다면, 간식이라도 챙겨 주면서 대화라도 몇 마디 나눠 보고.
만약 아이가 이미 잠들었다면, 잘 자고 있는지를 직접 확인할 요량이었다.
그렇게 주방에 도착한 지크프리트는 욕심껏 쟁반 위에 이것저것 담기 시작했고.
“저, 각하.”
보다 못한 주방장이 조심스럽게 지크프리트를 만류했다.
“간식 양이 너무 많습니다, 아가씨께서 다 못 드실 것 같은데요…….”
“…….”
합당한 지적이었다.
결국 지크프리트는 심란한 얼굴로 쟁반 위의 간식을 반절은 덜어내야만 했다.
그렇게 한밤에 주방을 뒤집어놓은 후.
지크프리트는 빠른 걸음으로 타티아나의 방 앞에 도착했다.
똑똑똑.
짧은 노크 소리가 울렸다.
“…….”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한 손으로 간식이 바리바리 쌓인 은쟁반을 솜씨 좋게 받쳐 든 채, 지크프리트는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잠들었나 보군.’
지크프리트는 소리 없이 방문을 열었다.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침실 안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 커다란 침대에 파묻히듯 잠든 타티아나가 보였다.
간식 쟁반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지크프리트는, 침대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
타티아나는 침대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다만 잠든 모습은 그리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잔뜩 찌푸린 이마와 창백한 뺨.
감은 눈 아래로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여 있었다.
지크프리트가 두 눈을 부릅떴다.
“타티아나?”
“아윽, 흑…….”
동시에 아이가 가쁘게 숨을 헐떡였다.
“……살려 주세요.”
* * *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
높다란 곳에 뚫린 창문 너머로 칼날 같은 달빛이 비스듬하게 쏟아져 내렸다.
그 달빛을 한 몸에 받으며, 우아한 외양의 중년 남자가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요하게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가 흡사 얼음으로 빚은 것 같았다.
저 남자가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마계의 영원한 지배자인 바르톨로아 일족의 수장.
바르톨로아의 현 가주였다.
‘타티아나라고 했나.’
남자가 천천히 몸을 굽혀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자아, 받아라.’
그러고는 내 손에 알약 하나를 쥐여 준다.
피처럼 붉은 알약이 달빛을 머금고 선명하게 빛났다.
‘삼켜.’
남자가 명령했다.
나를 뜯어보는 시선은 뼈까지 시리도록 차가웠다.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버러지도 그렇게 바라보지는 않을 텐데.
하기야, 바르톨로아 가주의 눈에는…….
반쪽짜리 마족인 내가 버러지보다도 못한 게 당연할지도.
‘무서워.’
난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도살장 앞에 선 짐승이 이런 기분일까.
하지만 눈앞의 남자가 내뿜는 압박감이 너무나도 강렬했기에, 나는 결국 그 명령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알약을 삼키는 그 순간.
‘……!’
마기가 강제로 폭주했다.
온몸을 엄습하던 끔찍한 고통에,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을 굴렀으나…….
‘성공했군.’
남자는 벌레처럼 바닥을 기는 나를 흡족하게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아파, 아파……!’
불구덩이에 처박힌 것처럼 온몸이 화끈거렸다.
작열통과 오한.
상반되는 고통이 동시에 내 몸을 불사른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어서, 나는 손톱을 세워 목을 쥐어뜯었다.
‘사, 살려 주세요!’
그런데 그때.
“……아나.”
“…….”
“타티아나!!”
“헉!!”
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물 밖으로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숨이 막힌다.
“타티아나, 괜찮나?!”
“아, 윽, 흐윽…….”
“정신 차려!”
누군가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인 후에야 시야가 또렷해졌다.
나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굽어보고 있는 저 사람은…….
“지크…… 프리트…… 님?”
한참을 헐떡이던 내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상대방을 불렀다.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물었다.
“악몽을 꾸었나?”
“네, 네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반사적으로 지크프리트에게 양손을 뻗었다.
“안아 주세요.”
“…….”
지크프리트는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등을 쓸어내리는 서투른 손길이 무척 부드러웠다.
나는 그의 품에 이마를 기댔다.
바르톨로아 가주가, 그가 내밀었던 핏빛 알약의 잔상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다시 한번 그의 수중에 굴러떨어질 것 같다.
……그렇다면 영영 도망칠 수 없게 되겠지.
‘싫어.’
나는 힘을 주어 지크프리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지크프리트가 내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아.”
“……정말?”
“그래. 그러니까 안심하도록.”
나를 달래는 목소리가 눈물겹도록 다정했다.
그제야 긴장이 탁 풀린다.
나는 지크프리트의 목을 꼭 끌어안은 채, 다시 한번 수마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었다.
* * *
지크프리트는 복잡한 눈빛으로 품 안의 아이를 응시했다.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고, 계속 아이의 곁에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안심해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타티아나의 고사리손은 지크프리트의 옷깃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왜 이 녀석은 도무지 살이 붙지 않는 거지.’
아이의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지크프리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제국으로 돌아오는 동안 최대한 잘 먹인다고 먹였음에도, 아이는 여전히 눈에 띄게 마른 모습이었다.
헐렁한 옷소매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가느다란 손목이 유난히도 눈에 밟힌다.
그나마 이 모습이 예전보다 꽤 살이 붙은 것임을 고려하면…….
“침대에 누워야지, 타티아나.”
“아웅…….”
입을 오물거리던 타티아나가 몸을 뒤채며 조그맣게 웅크렸다.
그래도 이제는 꽤 안정을 찾았나 보다.
지크프리트가 눕히는 대로, 침대에 얌전하게 자리 잡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아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지크프리트가, 이불을 끌어다 아이의 목 끝까지 덮어 주었다.
그러고도 지크프리트는 한참을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너는 아직 어린데, 아픈 걸 굳이 숨길 필요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