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아직도 잊지 못했다.
마왕성의 가장 더럽고 음침한 곳에 숨은 채, 혼자 피를 토하면서 고통을 참고 있던 그 모습.
눈이 마주치자마자 걱정 말라는 것처럼 방긋 웃어 보이던 것까지도.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타운하우스에 막 도착했을 때도, 그 후의 식사 시간에도.
전혀 힘들어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속으로는 계속 힘겨워하다 못해, 악몽까지 꾸면서 끙끙 앓을 지경이면서도.
‘아마 우리를 걱정시킬까 봐 그런 거겠지.’
……도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던 지크프리트가, 의자를 끌어다가 침대 곁에 바짝 붙였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 밤은 아이 곁에서 보낼 생각이었다.
* * *
다음 날.
나는 눈을 뜨자마자 뜻밖의 사람과 마주했다.
‘으응……?’
지크프리트가 내 침대 곁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는, 다리를 꼰 채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채 비스듬히 앉은 그 모습은 흡사 조각상처럼 우아했으나…….
‘아니, 왜 지크프리트가 내 방에 있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간밤의 일을 떠올려 보려 했으나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희미하게 무섭다는 감정만 남아 있을 뿐.
다만.
‘……따뜻했지.’
누군가가 두려움에 떨던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몸에 닿아 오는 체온이 따스해서, 나도 모르게 안도했던 것도.
그래서 다시 한번 잠들었던 것 같은데…….
‘그 사람이 아마…… 지크프리트였나?’
동시에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지크프리트가 번쩍 눈을 떴다.
‘헉.’
나는 그 자리에 빳빳하게 굳어져 버렸다.
“깼나?”
“네에.”
그 무뚝뚝한 질문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크프리트는 당황한 내게 선언했다.
“주치의에게 연락을 취해 놨으니, 지금 당장 진료를 받도록 해.”
“네?”
엥, 갑자기요?
얼떨떨하게 두 눈을 깜빡이던 내가 소심하게 항변했다.
“티티 안 아파요.”
“그래도 진료는 받아.”
지크프리트가 엄중하게 말을 덧붙였다.
“진료를 받지 않으면, 도서관에 가는 건 허락할 수 없다.”
“……네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런담?
나는 입을 삐죽였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너무 과한 거 아냐?
사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제국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수많은 의사들에게 진찰을 받았었는걸.
‘거의 1일 1의사 급이었지…….’
또한 그 모든 의사가 입을 모아 말하기를, 비록 허약하긴 하지만 건강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했었는데.
하기야 의사들은 마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니까, 내 몸에 문제가 있다 한들 잡아내지는 못할 테지.
그래도 용사들은 내게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그런 세 용사들더러,
‘아니, 마기는 이미 안정됐는데요. 저 엄청 멀쩡한데요.’
‘비록 제가 시한부이긴 합니다만, 적어도 25살까지는 생존이 보장되어 있으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힐끔 지크프리트의 눈치를 살폈다.
“…….”
괜히 나 때문에 바쁜 사람을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나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러자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피던 지크프리트가 제안했다.
“얌전히 진찰을 받으면 사탕을 주도록 하지.”
아니, 내가 애인 줄 알아? 고작해야 사탕으로 유혹하게?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내 입은 조금 더 솔직했다.
“그, 그럼. 티티는 체리 맛 사탕…….”
지크프리트가 피식 웃었다.
“좋아.”
그 미소를 마주하자, 나는 얼굴이 훅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뭐야, 괜히 사탕 하나에 홀라당 넘어간 것 같잖아?!
정신 차리자, 나야.
아무리 몸이 어린애라고 해도 그렇지.
정신연령까지 어린애가 되어 버리면 어떡하니?!
그런데 그때.
똑똑.
짧은 노크 소리와 함께, 말끔한 외양의 중년 여인 한 명이 방 안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타티아나 아가씨! 저는 버니스라고 해요.”
버니스가 살갑게 내게 웃어 보였다.
“미력하나마 공작가의 주치의 자리를 맡고 있답니다.”
“반갑슴미다, 티티예요.”
“어머나, 말씀 놓으세요. 그럼 일단 청진부터 해 볼까요?”
버니스는 요모조모 진찰을 해 보았으나, 다른 의사들과 동일한 소견이 나왔다.
“딱히 눈에 띄는 문제는 없어 보여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지크프리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이미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었잖아!
왜 또 마음을 놓고 그러니?
내 양심 콕콕 쑤시네!
“다만 오랫동안 영양 상태가 나빴나 봐요, 또래보다 다소 발육이 늦으시기는 하네요.”
때마침 버니스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지크프리트의 낯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렇게 덜 자랐나?”
“예, 뭐. 그래도 괜찮아요, 앞으로는 맛있는 것 많이 드시고 쑥쑥 자라시면 되니까요.”
버니스가 황급히 분위기를 전환했다.
고개를 끄덕인 지크프리트가 사탕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자, 약속한 사탕이다.”
“와아!”
나는 냉큼 사탕을 입 안에 까 넣었다.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체리 맛이 혀끝을 즐겁게 했다.
양 볼이 볼록해지도록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리다 말고, 나는 지크프리트에게 은근슬쩍 말을 붙였다.
“티티 이제 도서관 가고 시픈데.”
“좋아, 가 봐.”
“네!”
그렇게 노라의 품에 안겨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나는 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정말, 지크프리트는 쓸데없이 걱정이 많다니까?
……뭐, 그래도 내 걱정을 해 주는 건 고맙다만.
* * *
달칵.
방문이 닫혔다.
“티티 가따 올게요!”
노라에게 안긴 채, 손을 붕붕 흔들어 대던 아이의 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졌다.
지크프리트는 한참 동안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도 알고 있었다.
버니스가 황실 주치의로 일했던 경력까지 있는, 뛰어난 의사라고 해도.
마기를 느끼지 못하는 이상, 버니스가 타티아나를 진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버니스가 ‘괜찮다’라고 말한다 해도, 타티아나는 몸속에 마기라는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 아이였고.
마기를 제어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하는 이상, 아이는 언젠가는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라도 괜찮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건가.’
짧게 조소한 지크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아이가 악몽을 자주 꾸는 것 같아.”
“악몽이요?”
“그래. 아무래도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지크프리트는 어제 보았던 타티아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가쁘게 할딱이던 숨,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두려움에 떨며 지크프리트의 품 안을 파고들던 조그마한 아이.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애처로워서…….
“왜 자꾸 악몽을 꾸는 거지?
“아마도 심리적인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심리적인 원인?”
“네.”
버니스는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는 마왕성의 노예로 살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었지.”
“뭐, 마족들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가주님께서 더 잘 아실 테니까요.”
버니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무척 힘드셨겠지요.”
“…….”
무어라 말하려던 지크프리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기억이 무의식 속에 남아 있어서, 주기적으로 악몽을 꾸시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악몽을 꾸지 않게 할 방법은 뭐가 있지?”
“아가씨께서 느끼시는 불안감을 해소해 드려야겠지요.”
불안감이라.
지크프리트는 버니스의 대답을 곱씹었다.
타티아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그건 바로…….
‘버림받는 것.’
쓸모 있는 아이가 되고 싶다며, 말갛게 웃는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지크프리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어쨌든 주치의도 주의해서 살펴보도록. 아픈 걸 잘 숨기는 아이니까 말이야.”
“네, 저도 신경 쓰겠습니다.”
버니스가 안심하라는 것처럼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때.
똑똑똑.
노크 소리가 두 사람의 주의를 환기했다.
지크프리트가 미간을 좁히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들어와.”
문밖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소 난감한 얼굴의 시종이었다.
“무슨 일이지?”
“그것이…….”
머뭇거리던 시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탑주님, 그리고 대사제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 벌써?”
지크프리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시종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분량의 육아서적들도 함께 배달되었습니다.”
……육아서적이라고?
지크프리트는 조금 멍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