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뭐야, 빨간 장미 맞잖아?’
내 바로 코앞에, 눈이 아릴 정도로 붉은 장미가 구름처럼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빨간색이지, 분홍색은 아닌데?
나는 잘 손질된 장미 덤불 너머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양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씨근덕거리는 기베르티 백작대부인과, 흡사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늙수그레한 정원사가 보였다.
그런데 그때.
“장미 하나조차 제대로 못 심는 주제에, 정원사랍시고 월급은 꼬박꼬박 받아가기는!”
새된 외침과 함께, 백작대부인이 정원사의 정강이에 거세게 발길질을 했다.
퍽!
“어윽!”
정원사의 몸이 커다랗게 휘청거렸다.
‘아니, 사람을 때려?!’
나는 경악했다.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상대의 말도 안 되는 트집에도 입 하나 뻥긋하지 못하고, 가만히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저 모습은.
……마왕성에 갇혀 있던 시절의 나를 닮았으니까.
하지만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검지를 들어 쿡쿡 정원사의 이마를 찔러 대는 것이다.
“돈을 줬잖아?”
쿡.
“그러면 돈값을 좀 하란 말이야, 응?”
쿡쿡.
정원사의 주름진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와, 이건 못 참지!’
나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휘둘러보았고, 때마침 적절한 물건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물이 꽉 찬 물뿌리개였다.
‘좋아.’
살금살금 물뿌리개 근처로 걸어간 나는, 곧장 물뿌리개를 엎어 버렸다.
촤악!
엎어진 물뿌리개에서 시원하게 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무래도 비료를 섞어 둔 물이었는지, 백작대부인의 발등을 적시는 물줄기는 연한 황갈색이었다.
쿰쿰한 냄새가 확 풍겼다.
“꺄악!”
자지러질 듯 놀란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이 펄쩍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딱 봐도 고급으로 보이는 구두는 어느새, 흠뻑 젖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구두 안으로도 물이 흘러 들어갔을걸?
나는 자꾸만 입술 밖으로 삐져나오려는 사악한 웃음을 억누르며, 냅다 선수를 쳤다.
“앗, 티티 때무네 발 다 젖어써요?”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백작대부인이 사나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 구두 어떻게 할 거예요? 얼마나 비싼 건지 알기나 해요?!”
어휴, 이것 참.
당장이라도 날 후려치기라도 할 기세네?
나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차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꾸했다.
“하지만 관리인님두 정원사 아저씨 옷 더럽혔자나요.”
“…….”
순간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왜, 평소 무시하던 내게 정곡을 찔리니까 분한가 보지?
백작대부인이 이를 악물며 휙 뒤를 돌아보았다.
정원사의 정강이 위로, 백작대부인이 걷어찬 구두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티티가 관리인님 구두 더럽힌 건 잘못했서요, 근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작대부인의 살벌한 시선을 맞받아쳤다.
“관리인님두 정원사 할아부지 옷 더럽힌 거, 잘못한 거자나요?”
“…….”
“그럼 티티가 관리인님께 사과하면, 관리인님도 정원사 할아부지한테 사과하는 고야?”
“…….”
아무래도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은 내 기적의 논리에 말문이 막혔나 보다.
빠득빠득 이를 갈면서도 내게 별달리 반박은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저기요, 그러다가 어금니 상해요.
치아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
나는 얄밉게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리구 티티 눈에는 분홍 장미 아니구, 빨간 장미로 보이는데?”
“뭐, 뭐라고요?!”
“색깔도 구분을 못 하다니, 안경 써야 하는 고 아녜요? 티티는 관리인님 시력이 너무 걱정이 돼서…….”
일부러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백작대부인의 눈동자에서 불똥이 튀겼다.
나야 뭐 나쁘지 않다.
여기서 내게 더 말려들면, 자연스럽게 정원사에게 사과해야 하는 상황이 될 테니까.
하지만 백작대부인도 오랫동안 꽁으로 관리인 노릇을 해 먹은 건 아니었는지.
마지막 선까지 넘지는 않았다.
“흥!”
잔뜩 신경질을 내며 돌아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랑 말을 섞어 봤자, 나만 답답하지!”
그렇게 정신 승리를 하고는, 쿵쿵거리며 사라져 버린 것이다.
뭐, 이 정도로 마무리되는 건가?
나는 정원사를 돌아보았다.
“갠차나요?”
“아, 아가씨……!”
정원사가 어찌할 바 몰라 하며, 자리에 쪼그려 앉아 나와 시선을 맞췄다.
아이고, 할아버지. 그러실 필요 없어요.
나이도 있으신데, 그러다가 무릎이 아프기라도 하면 어떡해?
동시에 정원사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웅? 티티가 관리인님에게 실수한 건데?”
“저를 위해 일부러 그러신 것 아닙니까.”
“그런 고 아닌데? 관리인님한테 사과하기 시러서 정원사 할아부지 핑계 댄 건데?”
나는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딴청을 피웠으나, 정원사는 내 마음을 다 안다는 것처럼 수더분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때마침 노라가 다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왔다.
“아가씨!”
그러고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물뿌리개와, 정원사의 바지에 선명하게 남은 구두 자국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또 관리인님께서 트집을 잡으셨어요?”
“그래도 아가씨께서 잘 대처해 주셔서 별일 없었다오.”
“그래도요, 이건 정말…….”
한숨을 쉬던 노라가 흘끗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내 앞에서 관리인의 험담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황급히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내게 양팔을 뻗는 것을 보면 말이다.
“혼자 그렇게 달려가시면 위험해요. 넘어졌다가 아야 하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으음…….”
나는 눈동자만 데록데록 굴렸다.
아무리 그래도 내 정신연령이 있는데, 설마 달리다가 넘어지기까지 하려고?
하지만 연약한 네 살짜리 몸은, 고작해야 몇 발자국 달린 것만으로도 다리가 욱신거렸기에.
“웅.”
나는 노라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얌전히 안겼다.
동시에 정원사가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가씨. 제가 무언가 보답을 해 드려야 할 텐데…….”
“아녜요, 그런 거 필요없서.”
그래도 안절부절못하는 게, 내게 무언가라도 쥐여 주지 않으면 마음이 영 편치 않을 듯한 모양새였으므로.
‘거참, 이래서 착한 사람은 정말 살기 불편하다니까?’
고작 이런 걸로 마음의 부담을 느끼다니.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난, 무리 지어 피어난 장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나, 저거.”
“장미 말씀이십니까?”
“웅. 한 송이 조.”
“예, 알겠습니다. 제일 예쁜 놈으로다가 꺾어 드리지요.”
가장 탐스러운 장미를 잘라 낸 정원사가, 가지의 가시들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내 손에 장미를 쥐여 주었다.
나는 장미꽃에 코를 묻고,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달콤한 향기가 났다.
뭐,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 *
며칠 후.
나는 내 방으로 올라온 과자를 오독오독 씹으며, 고민에 빠져 있었다.
“있자나, 노라.”
“네?”
“왜 자꾸 주방에서 꽈자를 주는 거야?”
나는 품 안에 끌어안고 먹던 쿠키 그릇을 가리켰다.
과자를 받은 첫날에야 그러려니 하고 먹었지만.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는 동안, 갖가지 과자들이 올라오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거, 주방에서 매일매일 구워서 올려 보내는 거다.
그러자 노라가 대번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혹시 과자가 입맛에 안 맞으신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구.”
솔직하게 말하면 아주 맛있었다.
어린아이가 과자 거절하는 거 봤어?
원래 단 것을 좋아하기도 했거니와, 매번 다채롭게 바뀌는 과자들을 구경하는 것도 쏠쏠하게 재밌었다.
다만…….
나는 곁눈질로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요새 내 꽃병에는 매일매일 싱싱한 꽃이 꽂혀 있었다.
오늘은 노란 빛깔의 달리아였다.
꽃잎 끄트머리가 연한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는 모습이 아주 예뻤다.
……아무래도 저 꽃은 정원사가 매번 보내오는 것 같지?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구냥, 다들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거 가타서.”
매일 쿠키며 과자들을 굽고, 정원에서 꽃을 골라다가 올려 보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말이야.
그러자 노라가 정색을 했다.
“네? 그런 생각 마세요, 아가씨.”
“그래도 다들 바쁜대…….”
나는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노라가 걱정 말라는 듯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
“다들 아가씨를 좋아해서 그래요.”
“나를?”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럼요. 이번에 아가씨께서 관리인님을 한 방 먹여 주신 것만 해도, 정말 속이 시원했…… 아니, 이게 아니지.”
무심결에 신이 나서 말하던 노라가, 파드득 고개를 휘저었다.
그러고는 표정을 정돈하며 재차 말을 이었다.
“어쨌든 다들 아가씨를 좋아해서 그런 거니까, 아가씨께서는 그냥 기쁘게 즐겨 주시면 되세요.”
“그런 거야?”
“그럼요. 다들 아가씨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하는 거예요.”
“으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일단 배시시 웃어 보았다.
노라가 나를 따라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