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22)화 (23/163)

<22화>

* * *

그 후.

지크프리트는 살벌한 얼굴이 되어서는,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을 끌고 사라져 버렸다.

나야 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간식이나 먹으면서 구경이나 했지만.

아무래도 꽤 상황이 심각하기는 한 것 같았다.

“지크프리트, 엄청 화난 것 같았지?”

“그러게 말입니다. 지크프리트가 저렇게 화내는 건 흔한 일이 아닌데…….”

키리오스와 세자르가 소곤소곤 목소리를 낮춰 대화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와작와작 과자나 씹던 난, 아까 백작대부인의 창백한 얼굴을 문득 떠올렸다.

무척 곤란해 보였지?

“히히.”

나는 소리 죽여 웃었다.

백작대부인의 백지장 같은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무척 만족스러웠다.

아주 깨소금 맛이네!

* * *

그 후.

사용인들에게 배정된 예산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전수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밝혀진 사실은…….

“기베르티 백작대부인.”

그 싸늘한 음성에, 백작대부인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굳혔다.

‘고모님’이 아닌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이었다.

그 공적인 호칭 자체가, 지크프리트가 이번 일을 엄벌할 생각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정말 알뜰하게도 해 먹었더군.”

“…….”

평소 고모를 존중하기 위해 쓰던 존댓말은 간데없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지크프리트가, 얼음 같은 시선으로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을 응시했다.

책상 위로는 여태까지 사용인들에게 지급된 예산 내역서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설마 처음부터 사용인들의 예산을 착복하기 위해, 총괄 관리인으로 들어오겠다고 한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이 황급히 부인했다.

그러나 지크프리트의 굳어진 얼굴은 풀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태껏 내가 당신을 최대한 존중했던 이유는, 당신이 내 사람들을 잘 보살펴 주리라고 믿어서야.”

“그, 그건…….”

“그런데 당신은 내 신뢰를 역으로 이용하여, 내 사용인들을 착취했지.”

지크프리트가 다섯 마왕을 처단하러 떠나던 그때.

처음부터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을 총괄 관리인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본디 번잡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시중을 드는 사용인들도 최소로 들일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당시 있었던 하녀는 고작해야 셋뿐이었고, 그중 노라가 암묵적으로 하녀장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크프리트의 사촌 형제인 기베르티 백작이 제안했다.

‘다섯 마왕을 토벌하려면 시간이 무척 많이 걸릴 텐데, 그동안 사용인들을 보살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그럼요. 공작 각하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사용인들이 곤경에 처하기라도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지크프리트는 기베르티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자신도, 스스로가 살아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없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만약 불의의 사고로 자신이 죽게 된다면, 사용인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과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설마하니 내 사용인들을 돕기 위해 들였던 관리인이, 내 사용인들을 핍박할 줄은 몰랐어.”

지크프리트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선명한 비웃음이었다.

“가지가지 했더군.”

창백한 얼굴의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을 향해, 지크프리트가 말을 내뱉었다.

“예산 착복만으로도 기가 찰 노릇인데, 거기다가.”

콰드득.

지크프리트의 손아귀에 붙들린 만년필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형형한 금안이 백작대부인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사용인들을 체벌까지 했다고?”

백작대부인이 덜컥 그 자리에 굳어졌다.

“굶기는 건 예사에, 뺨을 치거나, 발로 정강이를 걷어차는 등…… 다수의 고발이 들어왔는데.”

“가, 가주님, 그건!”

“누가 백작대부인더러 날 가주라 부르도록 허락했지?”

지크프리트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비웃음 가득한 선언이 떨어져 내렸다.

“당신은 이제 내 타운하우스의 관리인이 아닌데 말이야.”

“가주님!”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은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느냐는 양, 간절하게 부르짖었으나.

“그놈의 가주님 소리 좀 집어치우지?”

지크프리트는 사나운 음성으로 쏘아붙일 따름이었다.

“한 번만 더 나를 가주님이라고 부른다면,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나 자신도 모르겠는데 말이야.”

그는 그대로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선명한 조소였다.

“뭐, 궁금하면 계속 내 신경을 건드려 보든가.”

“…….”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지크프리트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 백작대부인에게 그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수, 숨을 쉬기가 어려워.’

백작대부인은 얕게 숨을 헐떡거렸다.

누군가가 목젖에 칼을 들이대기라도 한 양, 등골이 서늘해진다.

차갑게 식은 손발이 뻣뻣하다.

“아 참, 그리고.”

지크프리트가 마침 생각났다는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여태까지 백작대부인이 착복해 왔던 금액들은 모두, 기베르티 백작가로 청구할 생각이야.”

“예? 하지만!”

“백작대부인이 기베르티의 일원이었기에 총괄 관리인으로 받아들인 것이니, 마땅히 그 책임은 기베르티 백작가가 져야겠지.”

지크프리트가 검지 끝으로 예산안들을 톡톡 건드렸다.

“참고로 백작대부인이 착복한 금액들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그 정황은 모두 파악했어.”

두 눈을 부릅뜬 백작대부인을 향해, 지크프리트가 여상하게 되물었다.

“모조리 기베르티 백작가에게 지원되었더군?”

“저, 저는, 그러니까……!”

백작대부인은 허겁지겁 변명하려 했으나, 지크프리트의 말이 더 빨랐다.

“그러고 보면, 타티아나가 도서관에 가겠다고 요청했을 때부터 이상했었지.”

지크프리트가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아주 당연하게 내 말에 토를 달던데 말이야.”

지크프리트는 타티아나, 그리고 백작대부인이 함께했었던 식사 자리를 떠올렸다.

지크프리트 자신이 허락했는데도, 부득불 ‘귀한 도서들이니 타티아나가 만져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던 기베르티 백작대부인.

당시에는 백작대부인이 순수한 선의로, 도서가 훼손될까 봐 걱정스러워서 만류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굳이 따지자면 가주인 지크프리트가 이미 허락한 상황에서, 사용인인 백작대부인이 반발하는 것 자체가 선을 넘는 행동이었는데도.

그런 무례까지 눈감아 주었었는데…….

지금은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도서들이 걱정되어서 그런 게 맞나?”

“그, 그건.”

“여태까지 오를레앙의 재산을 착복해 왔으니, 무의식중으로 그 도서들까지 백작대부인의 소유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 도서들이 아까워서 나를 만류한 게 아니고?”

“아,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그런……!”

백작대부인이 피를 토하듯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지크프리트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뭐, 아니어도 내 알 바는 아니지. 이미 나는 백작대부인을 더 신용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으니 말이야.”

“제, 제발……!”

어찌할 바 모르고 눈동자를 굴리던 백작대부인이,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죄송합니다!”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린다.

“부디, 부디 제 아들과 손주들만은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아하, 백작대부인도 제 아들과 손주들은 귀하기는 한가 보군?”

지크프리트가 들으란 듯이 빈정거렸다.

“그만큼 내게도 내 사람들이 귀하다는 것을, 조금 더 빨리 알아챘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지크프리트는 귀찮다는 것처럼 손을 휘저어 보였다.

“이만 물러가도록.”

“가주, 아니, 공작 각하!”

백작대부인이 애처롭게 지크프리트를 불렀으나, 지크프리트는 냉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그리고.

“…….”

“…….”

현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비를 구걸하며 눈물 바람을 보이던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이, 갑자기 입을 딱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입을 다물고 싶어서 다문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수, 숨 막혀……!’

백작대부인은 누군가가 목을 콱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저 지크프리트의 시선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맹수 앞에 선 쥐새끼의 기분이 이러할까.

“사, 살려, 살려 주…….”

피부에 와 닿는 선명한 살기.

백작대부인은 간절하게 더듬거렸다.

지크프리트는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꺼져.”

그 순간.

“헉!”

온몸을 죄이던 압박감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백작대부인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지크프리트를 응시했다.

‘괴물……!’

비틀비틀 일어난 백작대부인이 도망치듯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동시에 지크프리트가 입 안으로 욕설을 짓씹어 삼켰다.

‘제기랄.’

짙은 자괴감이 들어서였다.

이토록 무능한 가주라니.

인류를 구하겠다며 다섯 마왕에게 칼을 들이댔으면서.

제 아랫사람들이 이렇게 고통 받고 있다는 것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타티아나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이번 일을 전혀 눈치 채지조차 못했겠지.’

비록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말한 것뿐이겠지만.

그래도 그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사용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터.

‘아무래도……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지.’

지크프리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금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타티아나가 보고 싶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