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 * *
저 멀리 타티아나가 보였다.
키리오스와 세자르 사이에 자리 잡고 앉아서, 조잘조잘 무어라 떠드는 중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저 자식들은 도대체 언제 돌아가려는 건지.’
지크프리트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때.
“어?”
타티아나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크프리트 님!”
아이는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현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타티아나가 지크프리트에게로 도도도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으앗!”
너무 허둥지둥 움직인 탓일까.
발을 헛디딘 아이가 커다랗게 휘청였다.
“티티!”
지크프리트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아이의 목덜미를 붙들었다.
“와아.”
커다란 손아귀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아이가 배시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크프리트 님이 나보고 티티라고 불러 줘써.”
“…….”
“기뻐요.”
……애칭을 부른 게 뭐라고.
그것도 그냥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말이었을 뿐인데.
고작해야 그런 말로도 기쁘다며, 저 아이는 그야말로 해맑은 얼굴을 했다.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져서, 지크프리트는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정말, 넘어지면 어쩌려고 이러나.”
다소 억눌린 목소리로 그렇게 타박한 지크프리트가,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내려놓듯 조심스럽게 타티아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앞으로는 조심해서 다녀라.”
“네!”
얼른 고개를 끄덕인 타티아나가, 똘망똘망한 시선으로 지크프리트를 올려다보았다.
“바쁜 일은 다 끝나써요?”
“그래.”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을 완전히 처리하기 전까지, 타티아나에게는 일단 ‘바쁜 일이 있었다’라고 둘러댔었다.
지크프리트는 몸을 굽혀 타티아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티티.”
“네?”
“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구나.”
순진한 하늘색 눈동자 위로 의아함이 서렸다.
지크프리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털썩.
커다란 손이 분홍색 정수리에 내려앉고, 서툴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아니었더라면, 내 휘하 사용인들이 저렇게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는 줄 몰랐을 거야.”
지크프리트는 그대로 타티아나의 머리를 토닥였다.
영양이 모자라 부스스한 분홍 머리카락의 감촉이 못내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응?’
지크프리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조그마한 손이 꼼질꼼질 움직이더니, 지크프리트의 옷깃을 꼭 움켜쥔 것이다.
“그럼…….”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아이가, 푹 고개를 수그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지크프리트 님한테 도움 되써요?”
“…….”
“쓸모 있는 사람이야?”
그 간절한 질문에, 지크프리트는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아직 네 살배기 어린아이일 뿐인데.
얼마나 삶이 신산했으면, 벌써부터 저런 질문을 하게 되었나.
“티티.”
그 부름에, 타티아나가 살그머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조금 겁을 먹은 듯한 하늘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지크프리트가 가라앉은 어조로 되물었다.
“우리가 너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던 건가?”
“……그건.”
타티아나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지크프리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쓸모며 뭐며, 그런 생각은 할 필요 없어.”
“하지만…….”
“너는 아이니까 그냥 행복하게만 지내면 되는데, 어째서…….”
채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지크프리트는 이를 악물었다.
하늘색 눈동자에 물기가 서렸다.
아이가 주춤주춤 다가오는가 싶더니, 가느다란 팔이 지크프리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래도.”
지크프리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타티아나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도움이 되어따니 기뻐요.”
“티티.”
“믿지 못해서 그런 거 아니구…… 제가 지크프리트 님을 조아하니까.”
부끄러웠는지, 아이의 귓바퀴는 어느새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 티티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써요.”
“…….”
“지크프리트 님이랑, 키리오스 님이랑, 세자르 님이랑…… 티티 구해 주셨자나요.”
그 말과 함께, 목을 휘감은 팔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떨쳐낼 수 있을 듯한 연약한 힘이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도무지 품 안의 아이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
잠시 망설이던 지크프리트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보듬어 안았다.
음식을 챙겨 먹인다고 먹였는데도, 품 안의 아이는 여전히 깃털처럼 가볍다.
돌을 매단 것처럼 가슴이 무거워졌다.
다만 지크프리트의 복잡한 기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으니.
“어때, 꼬마. 그냥 마탑으로 안 올래?”
때마침 키리오스가 냉큼 대화에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저 자식이 여태까지 어린애를 돌봐 본 경험이 얼마나 있다고. 계속 여기 있어 봤자 고생만 할걸?”
“헛소리 지껄이지 마.”
지크프리트가 정색했다.
양팔로는 타티아나를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였다.
“그러는 네 녀석은 어린애와 말을 섞어 본 적도 없지 않나.”
“있거든?! 우리 마탑에 어린 조수들이 얼마나 많은데!”
두 사람은 그렇게 왁왁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란을 틈타, 틈새 공략을 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이리 오세요, 타티아나 양.”
세자르였다.
“저 바보 같은 인간들 사이에 끼어 있을 필요 없어요.”
세자르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타티아나의 얼굴 위로, 천천히 미소가 번져 나갔다.
비 개인 하늘처럼 환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