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방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구두를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뎌 보았다.
뾱뾱뾱.
“…….”
아니, 아무리 내 신체 나이가 네 살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 구두는, 내 실제 정신연령이…….
나는 그만 머리가 아찔해졌다.
하지만 어른들의 반응은 나와는 완전히 정반대였는데.
“세상에, 아가씨! 너무 귀여워요!”
노라가 가슴에 양손을 모은 채 나를 바라보았고,
“봐봐, 내가 꼬마한테 잘 어울릴 거라고 했지? 설마하니 이 키리오스 님께서 아무 물건이나 골라 왔겠냐고!”
키리오스는 묘하게 뿌듯한 얼굴이었으며,
“웬일로 키리오스가 물건을 제대로 골라 왔군요.”
기본적으로 제 동료들에게는 가차 없는 세자르조차 키리오스에게 칭찬을 건넸다.
“예쁘구나, 타티아나.”
심지어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났던 지크프리트까지도,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래, 내가 구두 한 켤레를 신는 것만으로도 타운하우스의 평화가 지켜진다면야.’
나는 해탈한 표정으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뾱뾱뾱뾱뾱.
내 걸음걸음을 따라 구두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하, 마왕님 체면 다 구기네…….
정말, 쥐구멍이 있으면 당장이라도 기어들어가고 싶다…….
그러나 나는 애써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어른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인다.
“티티 산책 가고 시퍼요!”
그러니까 이제 화해 좀 하자, 응?
* * *
나는 세 용사와 함께 잘 정돈된 정원을 거닐었다.
걷기에 딱 좋은 화창한 날씨였다.
다만 나는 이 좋은 날을 마음껏 즐기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뾱뾱.
뾱뾱뾱.
뾱뾱뾱뾱.
내 뾱뾱거리는 발소리를 들을 때마다 주변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기 때문이었다…….
다들 흐뭇하게 웃거나, 저들끼리 속닥거리며 애정 어린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는데.
나를 좋아해주는 거니까 솔직히 고마웠다.
하지만…….
‘진짜 창피해 죽겠네!’
고마운 거랑 창피한 건 별개라고!
난 결국 수치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세자르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티티 다리 아파요.”
“아, 그래요?”
세자르가 냉큼 날 안아들었다.
그러고는 못내 안타까운 눈빛으로 내 짧아진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타티아나 양의 머리카락 말이에요.”
“네?”
“머릿결이 많이 상해서,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었지요?”
“네에…….”
나는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아까 전부터 키리오스나 세자르나, 심지어는 지크프리트까지도.
내 단발머리를 볼 때마다 아련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왜 저러는 거야 도대체?’
때마침 세자르가 낯빛을 바꾸며 빙긋 웃었다.
“뭐, 타티아나 양은 긴 머리든 단발머리든 모두 잘 어울리지만요.”
“세자르 님이 잘 어울린다구 해 주셔서 조아요.”
“그래요? 앞으로는 좀 더 자주 말씀드려야겠는걸요.”
세자르가 쿡쿡 웃으며 내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부딪쳤다.
뭐, 전혀 아프지는 않았지만.
“…….”
다만 문제는, 내 뒤통수에 열렬하게 와 닿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는 거다.
나는 슬그머니 지크프리트와 키리오스 쪽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도끼눈을 뜨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야, 너 은근히 꼬마를 독차지하려고 든다?”
참지 못한 키리오스가 세자르에게 따지려 들던 그때.
“저, 가주님.”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라가 조심스럽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지크프리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것이…….”
잠시 머뭇거리던 노라가 말을 이었다.
“황실에서 연락이 왔답니다.”
“황실에서?”
지크프리트는 물론이고, 다른 두 사람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나 또한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었다.
‘으잉, 갑자기 웬 황실?’
노라도 현 상황이 영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오묘한 표정으로 말을 맺었다.
“세 용사님들의 성공적인 토벌을 축하하기 위해, 승전축하 파티를 개최한다고 합니다.”
예? 갑자기요?
우리가 제도로 귀환한 지 한 달도 훌쩍 넘은 지금 시점에서요?
* * *
황가에서 보내 온 갑작스러운 소식에, 우리는 급하게 타운하우스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갑자기 웬 승전축하 파티야?”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키리오스였다.
“언제부터 황가가 우리가 마왕을 토벌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고.”
비록 삐딱한 언사이기는 했으나, 솔직히 맞는 말이었다.
세 용사들이 마왕성까지 진격할 적, 제국에서는 스스로의 보신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세 용사들에게는 아무런 지원도 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제국의 주변국들이 마족들에게 시시각각 함락당하고 있을 때도 수수방관했었다.
주변국들이 무너지면 결국 그 칼날이 저들에게 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보다 못해 세 용사들이 분연히 일어섰고, 다섯 마왕까지 토벌하는 압도적인 성과를 거둔 거였는데…….
‘정말로 황가가 세 용사들에게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이고 싶었으면, 개선식이라도 치러 줬겠지.’
처음 제국에 귀환할 때는 뭐 하고, 이제 와서 승전축하 파티입네 뭐네 한단 말인가.
물론 귀찮은 것을 질색하는 세 용사들은 알아서 거절했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말이라도 해 보는 것과, 아예 입을 싹 닦고 가만히 있는 건 다르잖아?
“차라리 싸울 때 지원이라도 해 주던가, 이제 와서 귀찮게 오라 가라 하면서 생색은…….”
“동감입니다.”
키리오스의 신랄한 말에, 세자르가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지크프리트도 드물게 짜증스러운 낯이었다.
“다들 그쯤 하도록 해, 어차피 초대를 거절할 것도 아니거니와…….”
다만 지크프리트는 황가의 험담에 말 한 마디를 더 얹기보다는, 화제를 전환하는 쪽을 택했는데.
“아이가 듣고 있잖은가.”
그렇게 말하며, 눈짓으로 나를 가리킨 것이다.
세자르와 키리오스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지크프리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타티아나의 드레스부터 당장 맞추는 게 좋겠군.”
엥? 나?
갑자기 튀어나온 내 이름에, 나는 움찔 어깨를 굳혔다.
“그러네. 우리 의복이야 그렇다 쳐도 아이용 물건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일단 의상실부터 수배하는 게 좋겠죠? 최대한 일정을 빨리 맞출 수 있는 쪽으로…….”
키리오스와 세자르가 제각기 맞장구를 쳤다.
아, 안 돼.
이렇게 어영부영 황실로 끌려가게 되면……!
“티티가 왜 가요?”
나는 다급하게 되물었다.
내 질문에, 도리어 세 용사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꼬마도 당연히 가야지?”
“맞습니다. 타티아나 양을 어떻게 혼자 두고 가겠습니까?”
“그거 아니에요!”
나는 절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계의 남자주인공은 비극적인 과거를 가진 천재 황자란 말이야.
황자는 어디에 산다?
황궁에 산다!
그렇다면, 내가 황궁에 가게 된다면…….
‘남자주인공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이걸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최대한 핑계를 쥐어짜 냈다.
“황실에서 초대한 분들은 키리오스 님이랑, 지크프리트 님이랑, 세자르 님이자나요.”
“그게 왜?”
“세 분들은 사람들을 마니 구했지만, 티티는 그런 거 없서요.”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티티는 가는 게 민폐예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
“…….”
“…….”
세 용사들은 제각기 입을 다문 채, 안타까운 시선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야, 다들 반응이 왜 이래?
나 꽤 합리적인 근거를 대지 않았나?
나는 살그머니 세 용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동시에 지크프리트가 선언했다.
“그렇다면 나도 파티는 빠져야겠군.”
뭐라고?
내 동공에 지진이 났다.
그러나 지크프리트는 아주 당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난 네 보호자잖나.”
“아니이, 그건…….”
“보호자는 피보호자를 최우선으로 여겨야 하는 게 당연하지.”
그러고는 아주 큰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 내 귓가에 소곤거렸다.
“솔직히 잘됐어, 나도 파티에 가기 귀찮았거든.”
“…….”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때마침 키리오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나도 안 갈래.”
나와 시선을 맞추고는 씨익 눈웃음을 짓는다.
“황실에서 열어 주는 재미없는 파티에 참석하는 것보다는, 꼬마랑 노는 게 더 재밌으니까.”
“키리오스, 요새 좀 의외로군요.”
동시에 세자르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키리오스를 바라보았다.
“왜 자꾸 옳은 말을 자주 합니까?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뭐라고?!”
세자르가 방긋방긋 웃으며 발끈한 키리오스를 놀려 댔다.
“건강관리 잘 해요. 기껏 마왕들까지 토벌하고 돌아왔는데, 여기서 죽으면 아깝잖아요?”
“오냐, 너부터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 줄까?”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를 두고 자신들끼리만 파티에 참석하면, 내가 소외감을 느낄까 봐.
그렇다고 내게 파티에 참석하라고 강요하는 건 부담스러울까 봐.
세심하게 신경 써 주는 용사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기에…….
‘에효.’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