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27)화 (28/163)

<27화>

동시에 지크프리트가 나와 세자르 곁으로 훌쩍 다가섰다.

“타티아나, 긴장할 필요 없다.”

“우리 꼬맹이 긴장했어? 에이, 뭘 이런 것 가지고 긴장하고 그래?”

키리오스 또한 넉살 좋게 웃으며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나를 달래기에 여념이 없던 그때.

“오랜만이오, 세 분.”

중후한 목소리가 울렸다.

‘응? 이 목소리는?’

나는 반사적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중년의 사내 한 명이 이쪽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테두리에 모피를 두른 붉은 망토와 머리에 쓴 보관, 그리고 가슴에 주렁주렁 매단 훈장들까지.

전신으로 ‘나 황제요’라고 주장하고 있는 차림새였다.

그 곁에는 황제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황비와, 황비를 쏙 빼닮은 소년 한 명이 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황제도, 황비도, 황비를 닮은 황자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관심을 둘 여력이 없었다는 게 옳았다.

‘저 애.’

나는 바짝 얼어붙은 채, 황실 가족 뒤편으로 한 발자국 물러나 있는 소년을 응시했다.

붉은 기가 도는 화려한 금발, 그리고 루비처럼 빛나는 선홍색 눈동자.

뒤로 물러나 있음에도 홀로 도드라져 보이는, 저 아름다운 소년은…….

‘하, 여기서 라키어스를 만나네…….’

라키어스 카세르 엘 데카르트.

데카르트 제국의 1황자이자,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황실의 유일한 적장자.

다만 타국 출신이었던 황후가 일찍이 죽고, 제국 유력가 출신의 황비가 새로이 황실의 안주인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되었는데…….

‘어째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네.’

하기야 소설 속에 묘사된 라키어스의 인생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으니까.

아마 지금도 황비의 주도하에, 그리고 황제의 묵인하에.

황실 내부에서 은근히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이 자리 자체가 무척 불편하겠지.’

다만 라키어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의, 내가 가장 아끼던 주인공이었으므로.

입맛이 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내가 지금 누굴 동정할 때야?’

내가 속으로 혀를 차던 차.

세자르가 조심스럽게 나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황제 폐하, 그리고 황비 전하와 두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지크프리트의 인사를 시작으로, 세자르와 키리오스가 가슴에 손을 얹고 인사를 건넸다.

나 또한 서툴게나마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지크프리트가 급하게 가르쳐 준 궁중 예법이었다.

황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우리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세 분께서 오늘 이 자리를 빛내 주어서 정말 기쁘오.”

어라?

나는 미세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입술은 웃고 있음에도, 눈앞의 황제는 묘하게 불쾌한 기색이었다.

‘아닌가, 내가 잘못 본 건가?’

때마침 지크프리트가 매끄럽게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인류 모두가 그대들에게 목숨 빚을 진 것이나 다름없지 않소. 몇 번을 치하해도 모자라오.”

흠, 그 치하 자체가 너무 황제 아저씨의 입맛에만 맞는 건 아니고?

딱 봐도 내 보호자님들은 이런 파티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황제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를레앙 공, 이 아이는?”

“타티아나라고 합니다. 마족들 아래에서 고통받고 있었는데, 우연히 저희들이 구해서 데려오게 되었지요.”

지크프리트가 기회를 잡았다는 양 냉큼 말을 덧붙였다.

“지금은 제 보호하에, 오를레앙의 타운하우스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어쩐지 ‘제 보호하에’라는 말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잠시 분위기를 살피던 나는, 이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무래도 내 귀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지?’

그도 그럴 것이, 세자르와 키리오스가 살벌하게 지크프리트를 노려보고 있었으니 말이야.

물론, 지크프리트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그 사나운 시선들을 가볍게 묵살해 버렸다…….

한편 황제는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공들께서 저 아이를 데려오실 정도면 무척 귀애하시나 보오?”

“예, 맞습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아이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도 되겠습니까?”

지크프리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직 아이가 궁중 예법에 익숙지 않아, 실수를 저지를까 걱정스럽습니다.”

“…….”

순간 황제의 미간이 꿈틀 굳어졌다.

비록 나를 핑계로 삼긴 했지만, 더 이상 황제와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기에.

하지만 뭐, 솔직히 나라도 이야기하기 싫겠다.

제도로 귀환한 지도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선심 쓰듯 승전축하 파티를 열어 준다는 건 뭐람?

하지만 불쾌한 기색도 잠시.

황제는 예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편하실 대로 하시오.”

“감사합니다. 가자, 타티아나.”

지크프리트가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용사들에게 둘러싸여 걷던 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난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

황제와 황비, 그리고 둘째 황자까지 함께 연회를 즐기고 있는데.

라키어스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애초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 * *

황제 앞에서 물러 나온 후.

‘윽.’

나는 주변에서 느껴지는 열렬한 시선에, 나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세 아빠에게 말을 붙이기 위해 두 눈에 불을 켜고 있었는걸!

‘으와, 부담스러워.’

꼴깍 마른침을 삼킨 나는, 곁에 서 있던 키리오스의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겼다.

“티티 다리 아파. 휴게실로 갈래요.”

“그래? 그럼 모셔다드려야지.”

키리오스가 훌쩍 나를 안아 들었다.

순식간에 눈높이가 높아지고, 나는 다시 한번 열렬한 시선의 세례를 받게 되었다.

‘으윽, 체할 것 같아.’

그러나 키리오스는 그 시선들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기야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화려한 미모인 데다가, 제국의 마탑주 신분까지 갖고 있으니.

이 정도의 관심은 이미 너무 많이 받아봐서 익숙한 것일지도?

“나도 같이 휴게실에 있을까?”

키리오스가 부드럽게 내 등을 다독이며 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질색했다.

아니, 네가 나를 따라오면 어떡해!

그럼 난 계속 저 시선들에게 시달려야 하잖아?

“아녜요. 혼자 있을 수 이써요.”

“에이, 그래도 꼬맹이를 어떻게 혼자 둬?”

“시녀 언니들이랑 다 있자나요?”

상식적으로 황실 파티에 참석할 정도의 어린아이라면,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일 게 분명하지 않은가?

당연히 아이들을 보살필 보육 시녀들이 배치되어 있을 터.

나는 시큰둥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리구 용사님들이 옆에 있으면 너무 시끄럽구 번잡해.”

“…….”

“…….”

“…….”

아무래도 내 말이 정곡을 찔렀나 보다.

세 용사들은 나란히 입을 다물고, 얌전히 나를 휴게실에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어쩌겠어, 사실인 걸?

* * *

그렇게 휴게실에 도착한 후.

나는 세 용사들에게 손을 붕붕 흔들어 보였다.

“티티 여기서 기다리구 이쓸게, 재밌게 놀구 와요!”

“그, 정말로 혼자 있어도 되겠나? 나라도 곁에 있는 편이…….”

지크프리트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내게 질척거렸으나,

“아, 꼬맹이 쉰다고 하잖아!”

키리오스가 당장에 지크프리트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어딜 은근슬쩍 빠지려 들어? 네가 없으면 나 혼자 레이디들의 춤 신청을 다 받아야만 한다고!”

눈을 부라리며 정색하는 모습이 꽤나 절박해 보인다.

‘흐응.’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면, 여자들은 수줍음을 타서 남자에게 먼저 접근하지 못한다는 건 다 거짓말이다.

그건 그냥 먼저 들이댈 만큼 끌리는 남자들이 적어서 그런 거라니까?

한편 세자르는 보육 시녀에게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하고 있었다.

“우리 타티아나를 잘 부탁합니다. 아이가 아직 나이가 많이 어려서 마음이 놓이질 않는군요.”

“네, 네! 최대한 신경 써서 모시겠습니다!”

보육 시녀는 발그스름하게 얼굴을 붉히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타티아나 양, 푹 쉬고 있어요.”

“꼬마, 혹여 내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시녀를 보내라고.”

“키리오스, 주제 파악 좀 해라. 네놈을 왜 보고 싶어 하나? 나를 보고 싶어 하면 모를까.”

“……다들 언제 가요?”

듣다 못한 내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그제야 세 용사들은 몇 번이고 뒤를 힐끔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에효.”

나는 푹신한 의자 안에 몸을 푹 파묻었다.

몸이 편해지고, 주변이 조용해지니 저절로 라키어스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면 라키어스는 어디 있을까?

아까 보니 황실 가족들 사이에서 따돌림 당하고 있는 것 같아서, 영 마음이 그랬는데…….

‘응? 잠깐.’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지?

저 금실을 뽑아 만든 것처럼 반짝거리는 붉은 금발이랑, 루비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

흡사 신이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천사상 같은 저 미모는……!

‘아니, 라키어스가 왜 여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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