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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28)화 (29/163)

<28화>

순간 화들짝 놀란 내가 몸을 일으켰다.

한편 내 놀란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라키어스의 수려한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두운 기색을 말끔히 떨쳐 낸 라키어스가 그림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죄송합니다, 자리를 비켜 드릴게요.”

그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마치 내가 자기를 싫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다.

당황한 나는 반사적으로 라키어스를 붙들었다.

“모예요, 어디 가요?”

“제가 같은 장소에 있으면 불편하실 테니까요. 편히 쉬세요.”

으잉, 저게 무슨 멍멍이 소리람.

네가 미래에 내 목을 날려 버릴 남자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나는 너 좋아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라키어스는 내가 제일 좋아했던 소설의 주인공인걸.

싫어할 리가 있어?

“티티 하나두 안 불편해요.”

“예?”

라키어스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아니, 솔직히 불편하긴 해.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라키어스가 안쓰러운 마음이 훨씬 더 컸다.

라키어스는 나랑 꼭 네 살 차이가 난다.

고작해야 여덟 살짜리 소년이, 저렇게 가면 같은 미소로 능숙하게 표정을 감추게 되기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그래서일까, 도무지 저 녀석을 혼자 놓아둘 수가 없어서…….

‘아, 나도 모르겠다.’

가슴을 졸이던 것도 잠시.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라키어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여기서 라키어스를 모른 척할 수가 있겠어?’

혹시 알아?

여기서 라키어스와 친분을 쌓게 되면, 나중에 내 목은 안전하게 보존해 줄지!

“가지 말구 저랑 노라요. 네?”

나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라키어스를 불렀다.

그러나 라키어스는 머뭇거릴 뿐, 쉽사리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뭐야,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그러자 한참을 망설인 끝에, 라키어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와 함께 있으면 황비 마마께서 좋아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2황자도…….”

“…….”

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모두에게 미움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저 모습이 자꾸만 예전의 나와 겹쳐져 보인다.

저 애는 이 세계의 남자주인공인데, 장차 원하는 모든 것들을 움켜쥐게 될 텐데.

……그런데 어째서 지금의 저 애는 이렇게나 외로워 보일까.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 입이 멋대로 움직여, 불쑥 말을 내뱉은 이유 말이다.

“그래두 티티는 1황자님 조아요.”

“…….”

라키어스는 다시 한 번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이다.

나는 목 안쪽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무언가를 꿀꺽 되삼키고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티티는 1황자님이랑 놀구 시픈데. 황자님은 티티랑 놀기 시러요?”

“…….”

라키어스는 한참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가 싶더니,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그 조그만 미소는, 여태까지 가면처럼 덮어 썼던 매끄러운 미소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몰랐기에, 서투르게나마 입술 끝을 밀어 올린 것에 가깝다.

그 모습이 못내 안타까워서.

……나는 입 안이 썼다.

* * *

아무래도 라키어스는 또래 친구들이랑 거의 교류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기야 원작에서 서술된 라키어스의 과거도 그랬었지.

황제는 라키어스에게 무관심한 데다, 황비와 2황자의 등쌀에 치여 제대로 된 친구를 가지지 못했다고 하니까.

그래서일까, 라키어스는 상당히 과묵한 소년이었다.

결국 대화를 이어 나가는 건 온전히 내 몫이 되었는데.

“황자님 눈동자 예뻐요!”

대충 아무 말이나 던져 봤더니, 라키어스가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제 눈이요?”

“네!”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처럼 선명한 저 붉은 눈동자는 라키어스의 어머니, 즉 황후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카롤링거 왕국.

지금은 승하한 황후의 출생지이자, 마계와의 접경에 위치한 왕국이다.

데카르트 제국은 황후와의 정략혼을 통해 왕국과 동맹을 체결했고, 카롤링거 왕국은 제국으로 마족들이 직접 침입해 오지 못하도록 방파제 역할을 했다.

뭐, 그 후 마족의 침공 때문에 카롤링거 왕국은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어쨌든 카롤링거 왕족 중에서도 그 피를 짙게 물려받은 사람은, 저 붉은 눈동자가 발현한다고 했는데.

“체리 가타요, 반짝반짝!”

“……체리?”

“네!”

라키어스는 어쩐지 묘한 표정이 되었으나, 나는 진심이었다.

어쩐지 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최근 후식으로 먹었던 체리파이의 빨간 빛깔이 생각난단 말이지.

그 절임체리들, 윤기가 자르르 흘렀었는데.

‘또 먹고 싶다. 집에 가면 노라한테 갖다 달라고 해야지.’

내가 괜히 입맛을 다시던 그때.

“예쁘기는 뭐가 예뻐? 시뻘건 게 괴물처럼 보이는걸.”

누군가가 심술궂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으잉? 이 목소리는?

휙 뒤를 돌아본 내가 두 눈을 부릅떴다.

저 녀석, 아까 그 2황자 아니야?

2황자, 루돌프.

라키어스의 이복동생이자 현 황비 소생의 황자였다.

아마 올해 일곱 살로 아는데…….

“이 새빨간 괴물 눈깔부터가 그래. 몰락한 왕조의 피를 이었다는 걸 이렇게까지 티를 낼 이유가 있나?”

……쟤는 무슨 일곱 살짜리가 저렇게 입이 험하담?

“그러니까 황후의 아들이네, 네가 유일한 적통입네 하며 으스대지 말란 말이야.”

“…….”

건들거리며 다가온 루돌프가 라키어스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라키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루돌프를 마주보았다.

“이미 몰락한 왕조가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겠어? 안 그래, 이 천것아?”

“…….”

“왜 대답이 없어? 지금 날 무시해?!”

계속해서 멍멍 짖어대던 루돌프는, 이제 제풀에 화를 내고 있었다…….

‘아, 혹시.’

순간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저 녀석, 라키어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건가?’

제국의 지아비와 지어미는 한 명뿐이라는 원칙에 따라, 이번처럼 황후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에는 황후의 자리는 공석으로 둔다.

황비의 가문, 필로멜 후작가는 제국에서도 상당한 명문가라고 했었는데.

그런 가문조차 저 원칙을 깨지 못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또한 승하한 황후는 카롤링거 왕국의 적통 왕녀였으니, 라키어스는 엄연히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단 하나뿐인 아들이며.

라키어스의 붉은 눈 또한, 결국 적통을 증명하는 증거인 것이다.

다만 기이한 점은.

‘라키어스는 저런 말까지 들었는데 왜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거지?’

나라면 당장에 뒤집어엎었을 텐데, 라키어스는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하기라도 한 것처럼.

게다가 이 상황 자체가 영 이상했다.

‘보육시녀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황실의 적장자가 이렇게 무례한 말을 듣고 있는데, 말려야 하는 거 아냐?’

그 순간 나는 보았다.

보육 시녀들이 눈을 피하며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 말이다.

이 난리 통에 끼고 싶지 않다는 속내가 역력했다.

‘아.’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라키어스는 매번 이렇게 외면당했던 거구나.

그래서…….

“그리고 너 말이야.”

때마침 루돌프가 뾰족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으잉? 나?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왜 갑자기 나한테 불똥이 튀는 거지?

그러나 루돌프는 당장이라도 날 잡아먹을 양 기세등등했다.

“용사 일행들이랑 같이 왔다고 해서, 네가 정말로 뭐라도 된 줄 알아?”

저기요, 저는 그런 말은 하나도 안 했는데요……?

하지만 루돌프는 내게 항변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다다다 말을 쏘아붙였다.

“황족들은 용사들을 존중하기 위해, 일부러 먼저 대연회장에 와서 기다렸던 것뿐이야.”

루돌프가 두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황족들이 용사들보다 낮은 위치라서 그런 게 아니라고!”

동시에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 그래서였구나.

황제가 기분이 저조해 보였던 이유!

황실 가족들이 세 용사들보다 먼저 대연회장에 입장해서 그런 거였구나!

‘진짜 치졸하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무려 인간계를 지킨 용사들인데, 고작 연회장에 입장하는 문제로 저렇게 부들거리는 거였어?’

보통은 신분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보다 늦게 입장하는 게 원칙이라지만, 그건 때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이번처럼 연회의 주인공이 따로 있을 때면, 그 주인공들에게 온전히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라도.

주인공들이 늦게 입장하는 게 관례라고.

노라가 세 용사들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설명해 주면서, 분명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세 용사들은 예법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게 아니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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