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아무리 인류를 지킨 영웅들이라 해도 그렇지, 어떻게 우리 아바마마랑 어마마마까지 기다리게 만들어?!”
한편 루돌프의 목소리는 끝없이 높아지고 있었다.
“승전축하 파티고 뭐고, 처음부터 해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천것들이 반발하는 바람에!”
나는 여기서 또 한 번 깨달음을 얻었다.
아하, 이 승전축하 파티 자체가 울며 겨자 먹기로 한 거였구나?
하기야, 전 인류를 구한 영웅들에게 개선식조차 치러주지 않은 게 영 이상했었는데.
“어쨌든 용사들이 네 보호자가 되었답시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지 말라고.”
나를 머리 위부터 발끝까지 저열하게 훑어본 루돌프가 씩 웃었다.
일곱 살답지 않은 비열한 미소였다.
그리고 난…… 기가 막혔다.
고작해야 일곱 살짜리 꼬마가 벌써부터 사람을 깔아보는 법부터 배운 거야?
이 녀석 안 되겠네?
“그치만 용사님들이 인간계를 안 지켜 줬으면, 황제 폐하랑 황비 마마두 돌아가시는 고 아니에요?”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돌프를 바라보았다.
“저라면 저를 구해 준 사람들한테 고마울 거 가타요. 티티도 용사님들이 구해 주셨는데, 엄청 고마워써요.”
“뭐? 이 쥐방울만 한 게!”
“아, 그런데 하나 이상한 거 있서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을 덧붙였다.
“티티는 마왕성에서 용사님들만 봐찌, 황실 기사님들은 하나두 못 봤는데?”
“…….”
아무래도 내가 아픈 곳을 쑤셨나 보다.
루돌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빠르게 원작의 내용을 되짚어 보았다.
‘이번 전쟁에서, 황족들은 정말 아무것도 안 했었지?’
심지어 오를레앙 공작가와 신전, 마탑까지 합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울 동안.
황실기사단은 황족들을 지킨다는 핑계로 계속 뒤로만 물러나 있었다.
“용사님들이 마왕성까지 쳐들어갈 동안, 황실에서는 뭐 해써요?”
“이, 이게!”
할 말이 궁해진 루돌프가 확 손을 치켜들었다.
으와, 설마 날 때리려고?!
기겁한 내가 반사적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
“2황자 전하!”
“고, 고정하세요……!”
기겁한 보육 시녀들이, 그제야 이구동성으로 루돌프를 말리려 들었다.
하지만 기다렸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라?’
살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라키어스가 루돌프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루돌프, 그만해.”
“이것 놔! 저 쪼끄만 게 감히!!”
루돌프가 손목을 마구 뒤틀며 라키어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라키어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실이잖아.”
“뭐?”
루돌프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라키어스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헉.’
루돌프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고요한 붉은 눈동자가 루돌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뿐인데도 기이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타티아나 양의 말씀이 옳다고 했어.”
“야, 너 무슨 헛소리를!”
“용사들에게만 전선을 맡겨 두고, 황실은 뒤로 물러나 있던 것…… 사실이잖아?”
솔직히 난 라키어스의 저런 반응이 백번 이해가 갔다.
라키어스의 외가인 카롤링거 왕국은, 제국의 방파제 역할을 하다가 마족에게 멸망 당했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황실은 꼼짝도 안 하고 세 용사에게만 인류의 구원을 맡겨 뒀으니.
얼마나 화가 나고 답답했을까?
하지만 나도 빤히 아는 사실을, 루돌프 저 자식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나 보다.
도리어 성을 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너, 너는 제국의 황자라는 놈이……!”
“제국의 황자라.”
라키어스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잘 갈린 칼날 같은 미소였다.
“언제는 몰락한 왕조가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지껄였으면서.”
라키어스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이제 와서는 나더러 제국의 황자라고 하는 거야?”
비록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그 목소리 깊은 곳에 들끓는 감정만큼은 무척이나 진득했다.
분노, 실망감, 스스로를 향한 조소…….
라키어스 또래의 어린아이가 품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아픈 감정들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게 도대체 무슨 소란입니까?”
싸늘한 질문이 울렸다.
‘헉, 지크프리트다!’
그 뒤로는 키리오스와 세자르, 그리고 황제 부부까지 있었다!
나는 물론이고 라키어스와 루돌프까지 화들짝 놀랐다.
상황이 소강된 틈을 타, 지크프리트가 보육 시녀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황자께서 왜 이러고 계시지?”
“그, 그것이…….”
보육 시녀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눈치를 살폈다.
금빛 눈이 가늘어졌다.
“게다가 두 분께서 이렇게 다투고 계시는 동안, 보육 시녀는 어째서 말리지 않은 건가?”
시녀들이 서로 눈짓을 나누는가 싶더니, 흘끗 라키어스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나는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라키어스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 어떤 보호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양.
남들이 제게 손가락질하는 건 이미 익숙하다는 것처럼…….
‘그래 봤자 라키어스도 여덟 살짜리 꼬맹이인데.’
체념과 포기를 배우기에는, 아직 너무나도 어린 나이잖아.
“라키어스 저 자식이 내 손목을 붙들었어요!”
동시에 루돌프가 라키어스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러고는 못내 서러운 표정을 꾸며내며 황비의 품에 답삭 안겨 든다.
“이것 보세요, 제 손목이 빨개졌다고요!”
“…….”
라키어스는 그저 담담했다.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다.
그 모습은 역시, 마족들에게 매도당하면서도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하던 나를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라키어스가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다면, 나라도 대신 변호해 줄 거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2황자님이 티티 때리려고 해써요!”
“…….”
“…….”
“…….”
찬물을 끼얹기라도 한 것처럼 사위가 조용해졌다.
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루돌프를 쏘아보았다.
‘내가 이대로 라키어스가 다 뒤집어쓰도록 둘 줄 알고?!’
당황한 루돌프가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 그게 무슨, 무슨 헛소리를……!”
“그래서 티티 못 때리게 하려구, 1황자님이 2황자님을 말리다가 손목을 잡으신 거야. 1황자님 잘못 없서요!”
라키어스가 멍하니 날 응시했다.
메말랐던 나뭇가지 위로 붉은 꽃봉오리가 움트듯.
붉은 눈동자 위로 처음으로 생기가 돌았다.
한편, 용사들의 시선에는 어느새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2황자께서 타티아나 양을 때리려고 하셨다고요?”
세자르가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차 일러바쳤다.
“그리구 2황자님이 1황자님한테 빨간 눈이 괴물 같다구 그래써요!”
“내, 내가 언제!”
“티티가 다 들어써! 몰락한 왕조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구, 천것이라구 그랬자나요!”
루돌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 나갔다.
“어, 어마마마. 저 말을 믿으세요? 다 거짓말이에요!”
루돌프는 어떻게든 황비의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실례지만 2황자 전하.”
키리오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 꼬맹…… 아니, 타티아나는 거짓말 안 합니다.”
평소의 유들유들한 태도는 간데없었다.
녹음을 닮은 진녹색 눈동자가 냉엄하게 루돌프를 내려다보았다.
“애초에 타티아나는 제국에 들어온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루돌프는 그 부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초조하게 황비의 치맛자락만 잡아당길 뿐, 입술 하나조차 뻥끗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키리오스는 고개를 들어 올려, 황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승하하신 황후 폐하에 대해서도, 붉은 눈동자가 카롤링거 왕족의 직계에게만 발현하는 특징이라는 것도 당연히 모르죠.”
음, 사실 원작을 읽어 봐서 알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카롤링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이렇게까지 구체적인 모욕을 꾸며 내는 게 가능합니까?”
“마, 마탑주. 그건…….”
황비가 황급히 변명하려 들었으나, 키리오스는 냉정하게 말을 이을 따름이었다.
“오히려 저 모욕을 누군가에게 전해 들어서, 그대로 증언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바늘 끝조차 들어가지 못할 논리였다.
역시 마탑의 주인, 제국 최고의 지성!
비록 평소에는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굴기는 하지만, 이럴 땐 정말 멋있다니까?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동시에 지크프리트가 말을 거들고 나섰다.
“또한 2황자께서 1황자께 가한 모욕은 아주 위험한 발언입니다.”
어느새 지크프리트는 루돌프가 라키어스에게 막말을 했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혹여나 2황자 전하의 언행이, 지금은 제국으로 편입된 옛 카롤링거 지역에 흘러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지크프리트가 싸늘하게 되물었다.
“상당한 반발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