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30)화 (31/163)

<30화>

황비는 분한 얼굴이 되었으나, 차마 반박하지는 못했다.

옛 카롤링거 국민들은 데카르트 제국에게 그다지 감정이 좋지 않았다.

제국은 카롤링거가 무너지는 것을 수수방관했으니까.

그럼에도 옛 카롤링거 지역은 순순히 제국의 일원이 되었는데, 그건 바로 황후와 라키어스의 존재 때문이었다.

카롤링거의 왕족들은 나라를 지키다 모두 산화했고, 옛 카롤링거 국민들은 그런 왕족들을 마음 깊이 따르고 존경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왕가의 피를 이은 사람들이 황후와 라키어스뿐이었고.

이제는 황후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유일하게 라키어스만 남아 있는 상황인데…….

그러던 중.

나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

‘아, 잠깐만.’

목 안쪽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비릿한 맛에,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콜록, 콜록콜록!!”

거센 기침이 터져 나왔다.

‘또냐.’

나는 흐린 눈으로 양손을 흠뻑 적신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마기가 요새 좀 잠잠하다 했다…….

“타티아나?!”

놀란 지크프리트가 내 어깨를 붙들었다.

그 뒤로 경악한 세자르와 키리오스, 그리고 황제 부부가 얼핏 보였다.

그리고 라키어스는…….

‘어쩜 좋아, 많이 놀랐나 보네.’

라키어스의 백짓장처럼 새하얀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피를 토했으니, 나는 이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할 생각이었다.

“……지크프리트 님.”

나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달고 지크프리트를 올려다보았다.

“티티…… 거짓말쟁이 아녜요.”

내 가냘픈 목소리에, 지크프리트가 두 눈을 부릅떴다.

“타티아나 양!”

때마침 세자르가 사람들을 헤치고 내 앞으로 달려 나왔다.

야, 마침 잘 왔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으로 세자르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세자르의 새하얀 옷자락 위로 붉은 손자국이 도장처럼 점점이 찍혔다.

언제나 온화했던 회색 눈동자 위에 바짝 날이 섰다.

“……손발이 너무 차가워요. 당장 쉴 수 있는 곳으로 옮겨야 합니다.”

세자르가 당장에 날 안아 들었다.

그 품에 안긴 채, 나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용사님들한테, 걱정…… 끼치기 시렀는데.”

“더 말씀하지 마세요, 최대한 안정을 취해야만 합니다.”

세자르가 나를 어르고 달랬다.

불덩이를 집어삼킨 것처럼 가슴 깊은 곳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아, 정말 더럽게 아프네.

생리적으로 고인 눈물이 뺨 위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근데…… 2황자님이 티티더러 거짓말쟁이라고 하구, 때리려구 해서…… 무서웠서.”

봐봐, 세자르야.

쟤가 날 때리려고도 하고, 나더러 거짓말쟁이라고 몰기도 하고!

그래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너무너무 커서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야!

루돌프 저 자식, 꼭 혼내 줄 거지?

간절한 시선으로 세자르를 올려다보는 것을 끝으로.

나는 시야가 까맣게 암전되는 것을 느꼈다.

* * *

타티아나는 곧장 황성의 손님방으로 옮겨졌다.

황제는 황실 주치의를 보내주겠노라고 권유했으나, 세자르가 단칼에 거절했다.

‘타티아나 양은 제가 직접 살펴볼 겁니다.’

어찌나 서슬이 새파란지, 황제까지 그 기세에 짓눌려 물러날 정도였다.

그 후.

직접 타티아나를 살펴본 세자르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몸의 흐름이 흐트러져 있어요.”

차마 황궁에서 마기라고는 말할 수 없어서, 대충 뭉뚱그려서 말했으나.

용사들은 아주 잘 알아들었다.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정신적인 충격이라면…….”

“2황자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답하는 세자르의 목소리는, 치받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티티…… 거짓말쟁이 아녜요.’

‘용사님들한테, 걱정…… 끼치기 시렀는데.’

‘근데…… 2황자님이 티티더러 거짓말쟁이라고 하구, 때리려구 해서…… 무서웠서.’

금방이라도 꺼질 듯 가냘팠던 목소리.

그를 떠올리던 키리오스가,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루돌프 그 자식은…… 이 조그만 애를 때릴 생각을 할 수가 있지?”

황궁임을 고려하면 호칭 정도는 조심하는 편이 나을 테지만.

지크프리트와 세자르 두 사람 모두 키리오스를 만류하지 않았다.

“게다가 꼬마를 거짓말쟁이로 몰아? 그 망할 새끼가……!”

키리오스가 재차 아득바득 이를 갈던 차.

세자르가 짧게 한숨을 쉬며 재차 말을 이었다.

“그나마 몸의 균형이 완전히 깨지지는 않아서 다행입니다.”

“아, 그래?”

그나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화색이 된 키리오스를 향해, 세자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맺었다.

“예. 조금 쉬면 회복될 겁니다.”

“……다행이네.”

키리오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크프리트는 물끄러미 타티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열이 올라서 발그레한 뺨, 색색거리는 가쁜 숨.

문득 타티아나를 마왕성에서 데려올 적,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벌써부터 저 애가 시한부라고 단정하며 침울해지기보다는, 우리가 저 아이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부터 먼저 고민하는 게 낫지 않겠나.’

솔직히 그 생각 자체는 지금도 변함없었다.

하지만.

“…….”

지크프리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아이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 손길에 아이가 조그맣게 앓는 소리를 냈다.

“으응…….”

“…….”

금빛 눈동자가 깊게 침잠했다.

‘이 아이는, 앞으로 이렇게…… 주기적으로 계속 고통 받아야만 하는 건가.’

아이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자력으로 마기를 제어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불세출의 영웅인 그들조차, 아이가 마기를 제어할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없지 않은가.

……스스로가 이렇게 무력하게 느껴진 적이 없어서.

지크프리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때.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지크프리트의 상념을 깨뜨렸다.

“뭐야, 누구야?”

키리오스가 미간을 좁히며 방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벌컥.

방문을 연 키리오스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1황자 전하?”

라키어스였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타티아나가 쓰러져서 꽤 놀란 듯하다.

“실례합니다. 타티아나 양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그래도 질문하는 목소리만큼은 의연했다.

키리오스가 양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까 전보다는 상태가 나아졌습니다.”

“아…….”

순간 라키어스는 확연히 안도한 표정이 되었다.

키리오스가 재차 삐딱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걸 여쭈시려고 찾아오신 겁니까?”

“키리오스, 너는 일단 들어가 있어라.”

보다 못한 지크프리트가 키리오스를 뒤로 밀어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황실에 단 하나뿐인 적통 황자였다.

그런 황자를 문 앞에 계속 세워 두는 것으로도 모자라, 취조하듯 질문을 이어갈 줄이야.

뭐, 그만큼 키리오스의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뜻이겠으나…….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감사합니다.”

라키어스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저 멀리 커다란 침상에 타티아나가 누운 모습이 보였다.

색색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무척 힘들어 보인다.

수려한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나 때문에.’

유리로 만든 세공품처럼 가냘픈 아이.

듣기로, 타티아나는 몸이 굉장히 약하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무리하면 안 될 텐데.

괜히 루돌프에게서 라키어스를 감싸다가 저렇게 된 것만 같아서…….

“혹시…… 타티아나 양께서 조금 더 회복하시면.”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평소였더라면 인사치레만 하고 돌아갔을 라키어스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게 된 이유는.

“병문안 겸, 안부를 여쭈러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

“…….”

“…….”

세 용사는 슬며시 시선을 교환했다.

동시에 그들은 서로가 같은 마음임을 확신했다.

‘저 애, 마음에 안 들어.’

라키어스 자체가 싫은 건 아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가여운 쪽에 가깝다.

고작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일찍이 모후를 잃은 것도 괴로웠을 텐데, 황비의 견제와 황제의 무관심 속에서 황궁에서 홀로 버텨 오지 않았나.

그런데도 라키어스가 이렇게나 마땅찮은 이유는…….

“1황자…… 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타티아나였다.

“꼬마!”

“타티아나!”

“몸은 좀 괜찮습니까?!”

세 용사가 황급히 타티아나 쪽으로 달려갔다.

아무래도 시야가 흐릿한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타티아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갠차나요.”

그러고는 열이 오른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1황자님 목소리가 들렸는데…….”

순간 세 용사는 오묘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어째 타티아나를 빼앗기는 듯한 기분인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