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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31)화 (32/163)

<31화>

용사들 뒤에 서 있던 라키어스가 황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아, 예. 저 여기 있습니다.”

그러자 타티아나가 배시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황자님두 오셔써요?”

“아, 예.”

라키어스가 주뼛거리며 타티아나의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꼬물꼬물 뻗어 온 자그마한 손이 라키어스의 손가락을 꼭 움켜쥐었다.

그 손가락이 너무 따스해서.

저를 올려다보는 말간 하늘색 눈동자가 지나치게 선량했기에.

“…….”

라키어스는 어쩐지, 가슴 깊은 곳을 푹 찔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티티 보러…… 놀러와 줄 거예요?”

“예, 꼭 가겠습니다.”

“헤헤.”

타티아나는 해맑게 웃는가 싶더니, 라키어스의 손가락을 움켜쥔 채 다시 잠들어 버렸다.

차마 그 손가락을 빼지 못해서.

라키어스는 한참을 타티아나의 침상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세 용사는 왠지 미묘한 박탈감을 느꼈다.

‘언제 1황자와 타티아나 양이 저렇게 친해진 거지?’

‘우리 꼬마는 아직 어린데.’

‘아무리 황자라지만, 그래도 우리 타티아나가 훨씬 더 아깝지.’

비록 타티아나가 알면 질색할 법한 생각이었으나, 지금의 타티아나는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기에.

손님방의 평화는 계속해서 지켜질 수 있었다.

* * *

그 날 밤.

타티아나는 오를레앙의 타운하우스로 돌아갔다.

라키어스는 창틀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채, 창문 너머로 오를레앙의 마차가 황성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타티아나.’

라키어스는 그 이름을 곱씹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감싸 주고, 그의 억울함을 항변해 주는 건.

아무도 라키어스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가족조차도…….

‘아니, 오히려 가족들이 가장 먼저 나를 외면했었지.’

라키어스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황제는 언제나 모후와 라키어스를 모른 척했다.

제국 때문에 멸망해 버린 카롤링거에 대한 부채감, 그리고.

지금은 제국에 편입된 카롤링거 사람들의 끊임없는 불만 때문일 터다.

사실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황실은 제국 본토와 옛 카롤링거 지역을 은근히 차별했으니까.

모후는 카롤링거의 권익을 위해 최대한 애썼으나, 황제는 끝끝내 모후의 요청을 묵살했고.

결국 모후는 마음의 병을 얻어 일찍 승하했다.

모후가 그렇게 세상을 뜬 이래로, 제국의 유력가 출신인 황비는 점점 더 승승장구했고.

마침내 제 아들, 루돌프에게 황위를 물려주기 위한 공작을 시작했다.

그리고 황제는, 황비가 대놓고 라키어스를 견제하는 것까지도 눈감아 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타티아나 양은 내 편을 들어 줬을까?’

솜사탕처럼 몽실몽실한 분홍색 단발머리.

비 개인 하늘처럼 투명했던 연푸른 눈동자.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며, 소년의 표정은 잠시나마 부드러워졌지만.

‘아마도…… 나에 대해 제대로 몰라서 그런 거겠지.’

붉은 눈동자는 이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옛 카롤링거 사람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끌어안고 있어야 하는.

데카르트 황실의 허울뿐인 적장자.

황실의 골칫덩이.

그게 현재 라키어스의 위치였다.

황제에게는 무시당하고, 황비와 이복동생에게는 경계당하며.

앞으로도 평생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할 이방인.

아마 라키어스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 될수록, 그 봄꽃 같던 아이도 점점 그에게서 거리를 벌리게 될 것이다.

그 아이가 계속해서 그에게 호의를 보이리라는 희망은, 애초부터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여태껏 그가 가졌던 모든 희망은 가차 없이 배신당했으니까.

“…….”

라키어스는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래도…… 병문안을 가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냥 그 약속을 지키려는 것뿐이다.

제멋대로 고개를 치켜세우는 기대감을 가차 없이 짓밟으며, 라키어스는 창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황궁의 어두운 그림자 안으로 익숙하게 모습을 감춘다.

창문 너머로 비쳐드는 창백한 달빛만이, 소년의 외로운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 * *

며칠 후.

나는 완벽하게 회복했다.

다만 건강한 것은 몸뿐이고, 내 고막은 끝없이 괴롭힘당하고 있었는데…….

“아기. 고양이가. 선생님에게. 말했어요. 선생님. 저는…….”

지크프리트가 세상 진지한 얼굴로, 흡사 로봇처럼 한 음절 한 음절을 끊어 동화책을 읽어 내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나는 세 용사들 틈바구니에 앉은 채, 해탈한 얼굴로 지크프리트의 동화책 낭독을 듣고 있었다.

이걸 낭독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차라리 소음공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때마침 키리오스가 지크프리트의 손아귀에서 동화책을 낚아챘다.

“야, 누가 동화책을 그렇게 읽냐? 정말 못 들어주겠네!”

자신만만하게 동화책을 펼친 키리오스가 빠르게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말했어요 아기 고양이야 발바닥 도장은 그렇게 찍는 게 아니란다 별빛 잉크를 꾹 찍어서…….”

저기요, 그건 동화책 낭독이 아니라 랩이잖아요?

지금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거야?

나는 흐린 눈이 되었다.

세자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양손으로 내 귀를 막아주었다.

“타티아나 양의 고막을 위해서라도, 저 멍청이들의 낭독은 듣지 않는 편이 좋겠군요.”

이 모든 사달이 난 건, 버니스가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 때문이었는데.

‘아가씨께서는 아직 네 살밖에 안 되셨잖아요. 발음이 또렷하지 않은 건 정상이세요. 아이들마다 발달 속도도 다른걸요.’

‘그래도, 우리가 아이에게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음, 정 아가씨의 어휘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되고 싶으시다면…… 아, 그래.’

버니스가 박수를 짝 치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동화책을 읽어 드리는 건 어떨까요?’

별다를 것도 없는 그 제안에, 내 세 보호자는 두 눈을 희번득 빛내며 서로를 마주 보았고.

그 후 내게 동화책 읽어 주기 쟁탈전을 벌이게 되었다…….

‘버니스, 도대체 왜 이랬어!’

원망을 담아 찌릿 노려봤더니, 버니스가 짧게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럼 즐거운 독서 시간 되세요.”

그러고는 후다닥 밖으로 나가 버린다.

‘아니, 이렇게 도망치기야!?’

난 이 지옥의 동화책 낭독회에 빠뜨려 놓았으면서!

그런데 그때.

노라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1황자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진짜?!”

나는 잔뜩 신이 나서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라키어스가 도착했다!

세 용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동화책을 읽는 모습만 보면, 오늘 모인 이유가 독서 모임이 아닌지 착각할 법 하지만.

사실 진짜 목적은, 내 병문안을 위해 오를레앙 타운하우스에 방문하는 라키어스를 맞이하려 함이었다.

솔직히 아무리 데카르트 황실의 유일한 적장자라 한들, 인류를 지킨 세 용사가 부득불 라키어스를 접대할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어떻게 우리 꼬마랑 외간 남자를 단둘이 둘 수가 있어?!’

키리오스가 정색을 했고,

‘타티아나, 외간 남자들은 모두 조심해야 한다.’

지크프리트가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았으며,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세자르 또한 산뜻하게 웃으며 두 사람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동의했다.

아니, 외간 남자라니요.

라키어스는 고작 여덟 살짜리 꼬맹이인데요?

하지만 용사들에게 얹혀사는 처지에, 내가 그런 상식적인 항변을 할 수 있을 리 없었고.

그리하여 무려 세 용사가 라키어스를 맞이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 기특한 남주! 타이밍도 잘 맞추지!’

지옥의 동화책 낭독시간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만으로도, 나는 라키어스를 환대할 마음이 차고도 넘쳤다!

“오셨서요, 황자님?”

내가 종종종 라키어스에게로 다가가자, 라키어스가 화들짝 놀라 나를 부축하려 했다.

“벌써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으신 겁니까?”

에이, 나 걱정했구나?

하기야 내가 쓰러질 적, 라키어스의 새하얗게 질렸던 얼굴만 생각하면…….

측은하게 라키어스를 바라보던 내가 냉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 티티 다 나았어요, 갠차나!”

“정말 다행입니다.”

내 대답에, 라키어스는 진심으로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라키어스가 죄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인다.

“죄송합니다. 이번 승전축하 파티의 불상사에 대해서는……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잉, 갑자기 왜?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라키어스를 마주 보았다.

“모가요?”

“이번에 타티아나 양께서 큰 곤욕을 치르셨지요. 모두 제 탓입니다.”

수려한 얼굴 위로 짙은 그늘이 졌다.

그리고 난…….

“그거 왜 황자님 탓이에요?”

라키어스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게 잘못하신 분은 2황자님이지, 1황자님이 아니자나요.”

순간 라키어스가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게다가 1황자님이 저한테 도와 달라구 강요한 것두 아니고, 그냥 제가 하고 시퍼서 한 건데. 왜 사과하시는 거예요?”

“……그건.”

“세상 모든 일이 1황자님 때문에 일어나는 거 아니야, 1황자님이 마음 쓸 필요 없서요.”

내 단호한 대답에, 라키어스는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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