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라키어스의 물음에 나는 냉큼 대답했다.
“티티는 도서관 가고 시퍼요.”
“도서관이요?”
라키어스는 다소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고작해야 네 살짜리 꼬맹이가 도서관에 가고 싶다고 하니 좀 이상한가?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난 마왕으로 각성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도서관은 제가 잘 압니다. 여기서 멀지도 않으니, 함께 가시지요.”
어쨌든 라키어스는 순순히 나를 안내해 주었다.
……근데 말이지, 여덟 살짜리 소년이 도서관을 잘 아는 것도 여러모로 어색하지 않아?
그 나이 대는 공부를 하기보다는 노는 쪽을 더 선호하는데 말이야.
나는 원작의 내용을 곱씹었다.
이 시기의 라키어스는, 나이도 어리고 힘이 약해서 황비에게 여러모로 견제당하고 있었다.
황비의 견제는 아주 교묘하게 진행됐는데.
‘맞아, 공부할 기회 자체를 주지 않는다고 했었지?’
라키어스를 아예 대놓고 괴롭힐 수는 없었다.
옛 카롤링거의 반발 문제도 있거니와, 라키어스는 엄연히 황실의 유일한 적통 황자였으니까.
트집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도 이상의 신체적인 학대는 하지 않았다.
대신 황비가 선택한 방식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것.’
황자들은 보통 어렸을 적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받는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미래의 황제 후보들이나 마찬가지잖아?
하지만 라키어스는 선생님은커녕, 훈련용 목검 한 자루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아무런 지식도 없는 황자가 황제가 될 수 있을 리 없으니, 황비의 계획은 꽤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고 했었지?’
그나마도 황비의 눈치를 보느라, 가뭄에 콩 나듯 드물게 도서관에 갈 수 있었고 말이다.
물론 원작에서는 황자이자 지도자로서 전혀 모자람 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건 그냥 라키어스가 남자주인공답게 천재여서 가능했던 거고.
‘우리 남주, 짠해 죽겠네!’
괜히 안쓰러운 마음에, 라키어스와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내가 힐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앗, 눈 마주쳤다.’
한편, 라키어스는 안쓰러움 가득한 내 눈빛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잠시 우물쭈물하는가 싶더니, 다시 한번 방긋 미소를 짓는다.
‘허억.’
나는 헛숨을 들이마셨다.
‘귀여워! 귀엽다고!’
그렇게 내적으로 비명을 지르던 중.
‘잠깐만.’
나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면, 라키어스에게 아주 훌륭한 스승이 되어 줄 사람들이 바로 내 곁에 있지 않나?’
다섯 마왕을 토벌하고 인류를 지켜 낸 세 용사들 말이야!
게다가 라키어스도 추후 미래의 용사가 되어, 마왕이 된 나를 토벌할 입장이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음, 쫄리니까 토벌당하는 문제는 여기까지만 생각하자.’
어쨌든 이건 기회였다.
세 용사들이 라키어스를 가르치게 됨으로써, 자주 만나게 된다면.
나 또한 라키어스와의 접점이 많아지지 않겠어?
나와 남자주인공 사이에 도탑게 정을 쌓을 기회라고!
……뭐어, 라키어스가 너무 강해지면 내 목을 날려 버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어차피 원작에서도, 라키어스는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세계 최강자가 되는걸.
그럴 거라면 처음부터 내가 교육 기회를 줌으로써, 은혜를 입혀 두는 편이 낫지 않겠어?
‘좋아.’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러자 라키어스가 머쓱하게 내게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 자꾸 저를 쳐다보십니까? 혹시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는지…….”
“묻었서요.”
“예?”
놀란 라키어스가 황급히 옷소매로 얼굴을 문질렀다.
나는 짓궂게 말을 맺었다.
“잘생김.”
“…….”
라키어스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이제야 좀 여덟 살짜리 꼬마답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라키어스의 손을 잡아당겼다.
“우리 빨리 도서관 가요!”
* * *
“제기랄, 그 망할 계집애가!”
루돌프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씨근덕거렸다.
“내가 제깟 계집애한테 사과하고 싶어서 사과한 줄 알아?!”
승전축하 파티 날, 타티아나가 쓰러져서 실려 나간 후.
황비는 루돌프를 불러다가 드물게 화를 냈다.
‘비록 근본조차 모르는 천한 고아일지언정, 지금 그 아이는 세 용사들의 비호를 받고 있어.’
황비가 두 눈을 번뜩이며 못을 박았다.
‘그 천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 용사와 완전히 척을 져서는 안 돼. 알겠니?’
그러자 루돌프가 억울한 얼굴로 황비를 바라보았다.
‘어마마마, 설마 저더러 그 계집애에게 사과하라는 말씀이세요?’
‘당연하지, 세 용사들에게 완전히 미운털이 박히는 것보다는 그편이 낫다.’
‘그, 그럼!’
루돌프가 울상이 되어 항변했다.
‘제가 그 천한 계집애 때문에, 오를레앙 공의 타운하우스까지 찾아가야 해요?’
‘그게 무슨 소리니?’
황비가 정색을 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를 계집애 하나 때문에, 네가 오를레앙 공의 타운하우스까지 찾아갈 필요까지는 없어.’
‘그, 그래도. 사과하려면 제가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황비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일단은 면피용으로 라키어스를 보내자꾸나.’
‘라키어스를요?’
‘그래. 꼴도 보기 싫은 녀석이지만, 그래도 황실의 적장자이기는 하니까.’
황비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사죄하는 역할을 맡기기에는 딱 알맞으니까 말이다.’
그러고는 다소 누그러진 얼굴이 되어 제 아들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일단은 라키어스를 보내 두고, 추후에 내가 사과하는 자리를 만들어 보마.’
‘어마마마…….’
‘그 자리에서는 제대로 사과하렴. 알겠니?’
황비의 신신당부를 떠올리던 루돌프가 아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래서 기껏 사과를 해 줬더니, 뭐?’
타티아나의 질색하는 표정이 눈앞에 선했다.
‘저, 2황자님이랑 놀기 시러요.’
‘1황자님이랑 오붓하게 둘이서 놀 거야. 2황자님은 끼어들지 마라요.’
단호하게 선을 긋는 것으로도 모자라, 루돌프를 홀로 두고 라키어스와 함께 사라져 버리기까지!
순간 루돌프의 눈동자에 바짝 날이 섰다.
‘라키어스, 그 망할 자식이……!’
딱 한 살 차이가 나는 이복형, 라키어스.
라키어스는 언제나 그랬다.
모든 일에 무심한 표정을 한 주제에, 그 어떤 분야에서건 루돌프보다 압도적인 재능을 보였다.
이번에도 네 살짜리 여자애를 훌쩍 안아 들고 사라지지 않았나.
루돌프의 완력과 신체적 능력으로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황실의 적장자랍시고 재수 없게 굴기는!’
루돌프의 가장 근원적인 열등감.
그건 바로, 라키어스가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라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황비의 가문인 필로멜 후작가가 명문가라고 한들, 루돌프가 죽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황실의 적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네가 황제가 될 거야.’
황비는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고, 그 부분은 루돌프도 의심하지 않았으나.
그래서 더더욱 라키어스가 싫었다.
흡사 영영 넘어설 수 없는 벽처럼.
제 빛나는 앞날을 가로막는 장애물처럼 느껴져서…….
루돌프가 그렇게 씩씩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중.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때마침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시녀 한 명이, 루돌프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루돌프가 힐끔 시녀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라키어스랑 타티아나 계집애 못 봤어?”
라키어스, 타티아나.
한쪽은 황실의 적장자였고, 다른 한쪽은 세 용사의 애정을 한 몸에 받는 아이였음에도.
루돌프는 거리낌 없이 반말을 지껄였다.
‘저래도 되는 건가?’
시녀는 다소 의문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황자에게 입바른 말을 할 수는 없었으므로.
“아까 뵈었는데, 황실도서관 쪽으로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뭐? 도서관?”
루돌프의 얼굴이 와락 찌그러졌다.
꼴에 또 공부하겠답시고 도서관으로 간 건가.
공부라면 질색하는 루돌프는, 평소 도서관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천한 것들이 저들끼리 재밌게 노는 꼴을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지.’
루돌프는 대답조차 없이 휙 몸을 돌렸다.
도서관에 가 볼 요량이었다.
* * *
황실 도서관의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자리.
색색 규칙적인 숨소리가 울렸다.
타티아나는 책상 위에 엎어진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타티아나 양?”
라키어스가 나직하게 타티아나를 불러 보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새근새근 숨을 몰아쉴 뿐, 도무지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당분간 깨어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한 판단으로, 라키어스는 제 겉옷부터 벗었다.
조심스럽게 타티아나의 어깨 위로 겉옷을 걸쳐 준다.
워낙에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타티아나는 겉옷 안에 폭 들어간 모양새가 되었다.
‘……귀여워.’
라키어스의 표정이 조금 느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