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타티아나가 처음 황실 도서관에 들어섰을 때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우와, 엄-청 넓어!’
타티아나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티티 저 책들 보고 시퍼요!’
그리하여 타티아나가 골라 온 책들은, 그 면면부터가 네 살배기 어린아이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어려운 주제들이었다.
<마계 사회의 특성>
<마족과 인간의 종족적 기원>
<인간과 마족 사이의 교류에 대하여 논하다>
라키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타티아나 양께서는 마계에 관심이 많으신가?’
하기야 타티아나 자체가 마계 출신인 데다가, 현재 보호자들도 다섯 마왕을 토벌한 세 용사였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헉.’
한편 라키어스의 시선을 느낀 타티아나는 괜히 찔린 표정이 되더니,
‘저 이런 책두 읽어요! 완전 똑똑하조?’
부러 양어깨를 우쭐거리며 콧대를 세웠다.
그 천진한 모습에, 라키어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하지만 약 30분 후.
‘웅양양…….’
똑똑하다며 우쭐거리던 건 간데없이, 타티아나는 책을 베개 삼아 고롱고롱 잠들어 버렸다.
라키어스는 물끄러미 잠든 타티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신기해.’
순간 라키어스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제는…… 타티아나 양도 알고 계실 텐데.’
데카르트 황실에서 라키어스가 어떤 위치인지 말이다.
라키어스는 그저, 옛 카롤링거의 영토와 국민들을 반발 없이 복속시키기 위한 존재일 뿐.
황실의 그 누구도 라키어스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그런데도.
‘그래두 티티는 1황자님 조아요.’
라키어스의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확고하게 말해 주던 목소리와.
‘티티 보러 놀러 와 줄 거예요?’
꼬물꼬물 뻗어 온 조그마한 손이, 라키어스의 손가락을 꼭 움켜쥐었던 것과.
‘티티는 1황자님이랑 같이 앉고 시픈데!’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리며 해사하게 미소 짓던 얼굴과.
‘티티는 1황자님이 사과하는 것보다, 구냥 티티한테 웃어 주는 게 조은데.’
라키어스를 뚱하니 올려다보던 연푸른 눈동자까지.
‘타티아나 양은, 단 한 번도…… 나를 피하지 않았어.’
그를 꺼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타티아나는 오히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지 않았나.
이 아이 자체가 마치 기적 같아서.
갓 핀 봄꽃처럼 사랑스럽고, 눈물겹도록 따스해서…….
“아웅.”
때마침 타티아나가 이마를 찌푸리며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아무래도 눈꺼풀을 콕콕 찔러대는 햇빛이 불편한 모양이다.
“…….”
잠시 고민하던 라키어스가, 조심스럽게 타티아나의 이마 위로 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아이의 구겨졌던 이마가 살포시 펴졌다.
“헤헤…….”
기분 좋은 꿈을 꾸는지, 타티아나가 조그맣게 웃음을 흘렸다.
라키어스 또한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그때.
“누가 너희더러 황실 도서관을 이용해도 된다고 허락했지?”
심술궂은 목소리가 들렸다.
라키어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휙 뒤를 돌아보자, 루돌프가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아, 정말 천한 것들은 이래서 문제야.”
루돌프가 들으란 듯이 빈정거렸다.
“개나 소나 황실 도서관을 이용하려 든다니까? 감히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루돌프.”
“네깟 것들이 황실 도서관을 이용하면 이용할수록, 도서관의 품격이 떨어지지 않겠어?”
이쯤 긁어놨으면 화가 날 만도 하겠지?
루돌프는 면밀히 라키어스의 표정을 살폈다.
혹여나 흥분한 라키어스가 제게 심한 말이라도 지껄인다면, 당장에 황비에게 일러바칠 속셈이었다.
하지만 라키어스는 그러기는커녕,
“목소리 좀 낮추지 그래?”
“……뭐라고?”
루돌프의 얼굴이 와락 찌그러졌다.
그러나 라키어스는 특유의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을 따름이었다.
“나를 싫어하는 건 그렇다 치겠어, 하지만.”
순간 붉은 눈동자가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타티아나 양까지 건드리지는 마.”
“…….”
그 순간, 루돌프는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듯한 강렬한 압박감을 느꼈다.
“선을 좀 지키지 그래, 루돌프?”
라키어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되물었다.
“타티아나 양을 적대한다는 건, 세 용사분들을 적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인데.”
“너……!”
“황비께서 이런 네 태도를 보시면 과연 기뻐하실까?”
말문이 막힌 루돌프를 향해, 라키어스가 무표정한 낯으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 황비께서는 네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으로 아는데.”
“그, 그게 뭐!”
“만인을 포용하기는커녕, 주변의 사람 한둘조차 포용하지 못하는 네가…….”
라키어스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선명한 비웃음이었다.
“황제가 될 수나 있겠냐는 소리야.”
“너, 지금 뭐라고!”
루돌프가 두 눈을 부릅떴다.
“네깟 게 감히 날 무시해?!”
“그 입 좀 다물어, 루돌프.”
루돌프의 언성이 높아질 기미가 보이자마자, 라키어스가 차갑게 뇌까렸다.
“타티아나 양께서 깨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
그 목소리가 어찌나 날카로운지, 루돌프는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굳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설마, 내가 라키어스한테 겁을 먹은 거야?’
루돌프가 아득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래 봤자 제국 내에 지지기반조차 없는 허울뿐인 적장자 아닌가.
지금은 멸망한 왕국의 피를 반이나 이어받은 주제에!
저깟 게 뭐라고 내가 긴장한단 말이야?
“지,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루돌프가 잠든 타티아나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저깟 천한 계집애 때문에!”
붉은 눈동자에 바짝 날이 섰다.
그 후.
루돌프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다만 제 멱살이 팽팽하게 당겨지는가 싶더니.
‘뭐, 뭐야?!’
정신을 차려 보니, 라키어스의 손이 냅다 루돌프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라키어스가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내가 조용히 하라고 했지.”
“읍, 읍!”
루돌프는 어떻게든 라키어스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단단한 손아귀는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으음…….”
타티아나가 조그맣게 잠투정을 하는가 싶더니, 사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졸음에 겨운 하늘색 눈동자가 주변을 돌아본다.
라키어스는 그만 빳빳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타, 타티아나 양.”
그와 동시에, 타티아나는 루돌프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라키어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1, 1황자님!!”
타티아나가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 * *
‘아니, 이건 뭔 일이래?’
나는 졸음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루돌프의 멱살을 붙들고, 반대편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라키어스라니.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 거야?
“1, 1황자님!!”
나는 일단 다급하게 라키어스를 불러 보았다.
순간 라키어스의 수려한 얼굴 위로 짙은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모야, 왜 싸워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 함께 내 몸에서 겉옷이 툭 떨어졌다.
‘어라, 이건 라키어스 건데?’
라키어스가 나한테 덮어 준 건가? 요 기특한 녀석!
……이라며 감동 받는 건 나중에 하고.
‘이, 일단 싸움부터 말려야지!’
나는 허둥지둥 라키어스 곁으로 달려갔다.
“두, 두 분 다 조금만 진정하구……!”
동시에 라키어스가 탁 멱살을 놓아 버렸다.
그 서슬에, 루돌프가 비틀비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콜록, 콜록콜록!”
양손으로 목을 붙들고 거세게 기침을 내뱉기를 한참.
루돌프가 눈물 고인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네까짓 게 감히 날 이렇게 대해?! 부모 없는 것들끼리 서로 편들어 주는 것도 아니고!”
우와.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쟤는 하다하다 부모까지 언급하네?
동시에 라키어스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튕겨 올랐다.
“말조심해, 루돌프.”
“웃기지 마, 말조심은 네가 해야지!”
루돌프가 와락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는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뭐? 나랑은 놀기 싫어? 나도 너같이 천박한 애랑은 놀기 싫어!”
……아니, 갑자기 왜 나한테 화풀이야?
나는 황당한 얼굴로 루돌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루돌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감히 내가 직접 사과까지 했는데, 나를 그따위로 농락해?”
“입 다물어, 루돌프!”
“세 용사가 보호자가 되어 준다니까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는 모양인데, 그래 봤자 친아버지도 아니잖아!”
“너 정말!”
라키어스가 어떻게든 루돌프를 만류하려 했으나, 전혀 소용없었다.
루돌프는 악에 받쳐 바락바락 고함을 질러 댔다.
“부모도 없고, 태어난 날조차 모르는 고아 계집애 주제에!”
……뭐?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루돌프가 재차 못을 박았다.
“세 용사들이 제 가문에 입적시켜 준 것도 아닌데, 고작 예쁨 좀 받는다고 잘난 척하지 말란 말이야!!”
“…….”
“…….”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조금 멍해졌다.
누군가가 머리를 세게 한 대 후려치기라도 한 것 같다.
친부모.
‘그러고 보면, 여태까지 내 친부모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