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사죄할 문제를 사죄하는 것뿐인데, 황비께서 다소 과한 반응을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대사제.”
“평민이든, 귀족이든, 하다못해 제왕이든, 잘못을 저질렀으면 마땅히 그를 인정하고 사죄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황비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하기야, 세자르는 여태까지 세 용사들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온화한 태도였으니까.
그런 세자르까지 저렇게 나왔으니, 더 물러날 수도 없겠지.
“루돌프.”
황비의 부름에, 루돌프는 채찍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흠칫 어깨를 굳혔다.
“타티아나 양과…… 1황자에게.”
“어, 어마마마?”
“사과하세요.”
황비가 창백한 얼굴로 말을 맺었다.
루돌프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돌아서서,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사과한다.
“미안합니다, 타티아나 양.”
아니, 자기가 잘못해서 사과하는 게 저렇게나 분한가?
나는 뚱한 얼굴로 루돌프를 마주 보다가,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에.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
루돌프는 다소 발끈하는 기색이었으나, 그렇다고 세 용사가 보는 앞에서 더 반발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대신 루돌프는 이를 악물며 라키어스 쪽으로 돌아섰다.
“…….”
“…….”
두 소년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루돌프는 한참 동안 원망 가득한 시선으로 라키어스를 노려보는가 싶더니.
악문 잇새로 사과의 말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라키어스.”
“…….”
한편 라키어스는 묘한 눈빛으로 루돌프를 마주보았다.
뭐랄까, 감회에 젖은 눈빛이라고나 할까?
여러모로 여덟 살짜리 소년이 보일 법한 눈빛은 아니어서.
난 어쩐지 가슴이 아렸다.
“그래.”
라키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돌프는 내가 직접 엄히 타이르겠소. 그러니 세 분께서도 부디 마음을 풀어 주시구려.”
루돌프의 사과에 뒤이어, 황제의 약속까지 받고 나서야.
세 용사는 조금 납득한 얼굴을 했다.
다만 난 라키어스가 영 마음에 걸렸다.
우리야 이렇게 떠나지만, 앞으로도 라키어스는 계속 황실에 남아 있어야 하잖아.
나 없을 때마다 괴롭힘당하는 거 아냐?
“세자르 님.”
나는 세자르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1황자님두 일단 우리랑 같이 나가면 안 대요?”
“…….”
순간 세자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 타티아나 양은 나이가 어리니까, 이성에 관심을 가질 만한 때는 아니…….”
도대체 뭔 헛소리를 하는 거람?
나는 차게 식은 눈빛으로 세자르를 흘겨보았다.
“황비 마마가 1황자님 혼낼 수도 있자나요. 걱정대서 그래요.”
내 말을 들은 후에야 세자르는 다소 안도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요, 일리가 있네요.”
그러고는 나를 추슬러 안으며 라키어스를 돌아본다.
“1황자 전하. 혹시 괜찮으시다면 잠시 저희와 동행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저 말입니까?”
“예. 1황자께서 함께해 주시면, 타티아나 양께서 안정하시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 그러겠습니다.”
라키어스가 얼른 대답했다.
‘좋아.’
나는 단단히 마음을 다져 먹었다.
우리 라키어스, 불쌍해서 안 되겠어.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라키어스를 세 용사들의 보호 하에 넣어놔야지!
* * *
그리하여 나와 세 용사들, 그리고 라키어스까지 함께 자리를 옮겼다.
나는 일단 라키어스에게 감사 인사부터 했다.
“고마아요, 1황자님.”
“예?”
라키어스는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아까 티티 편 들어주셨자나요.”
그렇게 설명을 덧붙인 내가, 양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혹시나 티티 때문에, 황비 마마가 1황자님 괴롭히면 어떠케요……?”
“…….”
“…….”
“…….”
내 말에, 세 용사들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은근슬쩍 용사들의 양심을 들쑤셨다.
“1황자님이 곤란해지면 티티는 너무 미안할 거 가튼데…….”
그러자 라키어스는 빙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야,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럴 땐 가만히 있어 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
나는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으나, 그래도 겉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어린아이’ 코스프레를 충실히 했다.
“……그래두요.”
“타티아나 양께서도, 승전축하 파티 때 제 편을 들어주시지 않았습니까.”
라키어스가 달래듯 말을 이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돕고 싶어서 도운 거니까요.”
“으음…….”
나는 슬그머니 세 용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세 용사들은 이제, 제각기 심각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흠,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나는 두 눈을 반짝 빛냈다.
세 용사들은 기본적으로 선량하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제 목숨까지 불사르며 다섯 마왕을 토벌하러 갈 정도이니까.
또한 세 용사들은 적어도 나 때문에 라키어스가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거고.
아마 현 상황 자체가 무척 마음에 걸리겠지.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해결책 던져주기!’
용사들이 양심의 가책을 해소할 수 있으면서도, 라키어스가 황비의 마수에서 보호 받을 수 있는 방법 말이다!
나는 은근슬쩍 떡밥을 뿌렸다.
“근데, 1황자님은 진짜진짜 대단한 거 가타요.”
“1황자께서?”
가장 먼저 떡밥을 문 사람은 바로 지크프리트였다.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웅. 아까 전에두 1황자님께서 티티 안고 슝 달려갔는걸! 엄청 빨랐서요!”
자, 어때?
어마어마한 신체 능력이지?
어느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동시에 용사들의 시선에 이채가 서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용사들은 마족들의 위험을 잘 알았으니까.
마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후학 양성은 필수다.
다만 세 용사들은 불세출의 영웅이었고, 그만큼 그들의 눈은 하늘 꼭대기에 달려 있었기에.
웬만한 재능은 재능으로도 보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1황자께서…… 타티아나를 안아 드셨다고요?”
지크프리트가 면밀하게 라키어스를 위아래로 뜯어보았다.
“거기다가 달리기까지 했어요?”
키리오스 또한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라키어스를 관찰했다.
라키어스는 당혹스럽게 되물했다.
“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고개를 가로저은 지크프리트가 골똘히 고민에 잠겼다.
그러고는 다른 두 용사를 불러 모았다.
“세자르, 키리오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나?”
“1황자 전하의 연세가 여덟 살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뛰어난 신체 능력이기는 하지요.”
세자르가 신중하게 답했고,
“아, 답답하게 굴지 말고. 우리가 직접 살펴보면 되잖아?”
성격이 급한 키리오스는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냅다 라키어스의 손목을 붙든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1황자 전하.”
“아, 예.”
라키어스는 다소 얼떨떨한 얼굴이었으나, 순순히 키리오스에게 손목을 맡겼다.
잠시 후.
“……야, 이거.”
경악한 키리오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다 있어?”
“그게 무슨 소리지?”
“아니, 1황자 전하의 체내 마력량을 확인해 볼 겸 마력을 흘려 넣어 봤거든?”
키리오스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내 마력을 역으로 잡아먹잖아!”
“……그게 정말인가?”
“아, 진짜라니까?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하겠냐?”
키리오스는 정색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찌할 바 몰라 하는 라키어스를 눈짓으로 가리킨다.
“적어도 1황자 전하의 재능은 진짜야. 저 재능을 그대로 두는 건 전 국가적인 손해라니까?”
그래, 그렇겠지.
나는 뿌듯한 기분이 되었다.
우리 라키어스는 이 세계의 남자주인공인걸.
원작에서도 라키어스는 별다른 교육조차 없이 검술의 극의에 다다라, 검기까지 발현하는 소드마스터가 된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면 어떻겠어?
내가 괜히 세 용사들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게 아니라 이거야!
“1황자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잠시 라키어스를 뒤에 떼어 놓은 세 용사가 서로서로 머리를 맞댔다.
그 와중에도 세자르는 나를 품 안에서 내려놓지 않았고.
그렇게 난, 본의 아니게 용사들의 논의를 모조리 듣게 되었는데…….
“교육이라.”
지크프리트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확실히 황비 마마의 손에 계속 1황자 전하를 놓아둔다면, 저 재능은 그대로 사장되겠지.”
“맞습니다. 황비께서 1황자 전하를 눈엣가시처럼 여기시는 건 사실이니까요.”
세자르가 다소 신랄하게 답했고,
“그럼 우리가 직접 1황자 전하를 교육시킨다고 하면, 그래도 최소한의 안전망은 만들어지지 않을까?”
키리오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제안했다.
“대충 일주일에 세 번 정도, 1황자 전하를 오를레앙의 타운하우스로 방문하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우리 타운하우스로?”
“그래. 우리들이 직접 교육을 시키며 지켜본다면, 황비께서도 1황자 전하께 손을 대기 어려울 거 아냐?”
“……키리오스, 너무 당연하게 내 집을 언급하는 거 아닌가?”
지크프리트는 다소 시큰둥한 얼굴이 되었으나, 그렇다 하여 키리오스의 제안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세 용사가 한참을 논의하던 중.
키리오스가 묘하게 떨떠름한 얼굴이 되어 중얼거렸다.
“뭐, 그래. 가르치는 건 그렇다 치고…….”
그러고는 흘끔 나를 곁눈질로 바라본다.
“그럼 우리 꼬마는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