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응? 나? 왜?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동시에 세 용사가 내키지 않는 표정이 되었다.
아니, 라키어스를 가르쳐야 할 이유는 충분하잖아.
갑자기 왜 저러는 거람?
한참을 고뇌하던 키리오스가 한숨을 섞어 입을 열었다.
“우리 꼬마랑…… 1황자 전하랑 너무 친해지면 어떡해?”
“…….”
기가 막혀서.
나는 키리오스를 좀 말려달라는 뜻으로, 지크프리트와 세자르를 번갈아 바라보았으나.
“그건…… 합당한 지적이군.”
“아무래도 자주 얼굴을 볼수록 정도 많이 쌓일 테니까요.”
문제는 저 두 사람까지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 안 되겠어.’
나는 이쯤에서 분위기를 환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티티 앞으로 1황자님이랑 같이 공부하는 거예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렇게 묻자, 세 용사는 이제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아니, 그건…….”
키리오스가 무어라 나를 설득하려 했으나,
“같이 공부하는 거 맞죠? 그쵸?”
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도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제 와서 라키어스를 안 가르친다고 하기만 해 봐.
어린아이의 분노를 보여 주겠어!
떼를 쓰면서 바닥에 드러누울 거라고!
내 반짝반짝 눈빛 공격에, 결국 패배한 쪽은 세 용사 쪽이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키리오스가 성큼성큼 라키어스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는 마땅찮은 눈빛으로 흘끗 라키어스를 내려다본다.
“일단 저희는 1황자 전하를 가르칠 용의가 있는데. 황자께서는 어떠십니까?”
아니, 저렇게 최소한의 설명조차 없이 다짜고짜 제 용건부터 꺼내 놓아도 돼?
나는 조금 시큰둥해졌으나.
“하, 하고 싶습니다!”
그 제안을 들은 라키어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은 간데없이, 드물게 흥분해서 목소리까지 높인 것이다.
붉은 눈동자에 기대감이 가득 들어차 별처럼 반짝인다.
키리오스는 재차 삐딱하게 질문을 던졌다.
“또한 저희는 황자라고 해서 딱히 봐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라키어스는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희가 황제 폐하를 뵙고 대화를 나누어 보도록 하지요.”
키리오스는 그렇게 대화를 정리했고,
“우린 이만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타티아나.”
“피곤하지요? 얼른 집에서 쉬도록 해요.”
지크프리트와 세자르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란히 내게 말을 붙였다.
나는 두 사람이 한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집.’
별것도 아닌 단어인데,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뭉클해지는지.
“네!”
나는 냉큼 세자르의 목을 끌어안았다.
내 몸을 안정적으로 받쳐 주는 단단한 팔 너머로, 따스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헤헤.”
나는 조그맣게 웃었다.
비록 아무런 근거나 이유는 없지만.
세 용사와 함께한다면, 언제까지나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그런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 * *
그리하여 오를레앙의 타운하우스로 향하는 마차 안.
“오를레앙 공작가에 정식으로 입양되기만 하면, 타티아나 양은 제국의 유일한 공녀가 되는 겁니다.”
세자르가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2황자께서 또 타티아나 양에게 시비를 건다면, 그냥 한 대 때려 주세요.”
“…….”
나는 황당한 얼굴로 세자르를 바라보았다.
아니, 세자르는 인류를 구한 용사님 아니야?
때려 주라고 하는 게 말이나 돼?
그런데 더 어이없는 부분은, 지크프리트와 키리오스도 그에 동조하고 있다는 거였다.
“굳이 한 대만 때릴 필요 있어? 분이 풀릴 때까지 실컷 때려.”
이건 키리오스였고,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 오를레앙 공작가에서 막아 줄 테니까.”
지크프리트까지 말을 거들고 나섰다.
“그, 그래두 대요?”
“물론이지. 가문의 권력이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거다.”
지크프리트의 당당한 대답에, 나는 그냥……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크흠.”
짧게 헛기침을 한 지크프리트가 나를 불렀다.
“타티아나.”
“네.”
그 표정이 워낙에 진지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르게 했다.
“일단, 우리는 너를 가벼운 마음으로 데려오려 한 것이 아니다.”
“……지크프리트 님.”
“네게는 본디 친모가 있었으니, 우리가 네게 입양 제안을 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조곤조곤 말을 잇던 지크프리트가, 키리오스에게 눈총을 주었다.
“그래서 좀 더 시간을 두고 제안하고 싶었는데, 이번에 키리오스 녀석이 아빠랍시고 끼어들었지 뭐냐.”
“아니, 그래도 그걸 어떻게 참아?!”
키리오스가 발끈하여 언성을 높혔다.
“2황자 그 자식이 우리 꼬마더러 생일도 모른다고……!”
그러던 중.
키리오스가 아차 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진녹색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 그래서…… 꼬마의 생일이 언제였지?”
생일?
순간 내 뇌리에 스치는 잔상이 하나 있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 하늘이었다.
하지만 전혀 춥지 않았다.
오히려 따스함이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단단한 양팔로 나를 꼭 끌어안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어라?’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왜 갑자기 이런 풍경이 떠오르는 거지?
내 몸을 감싸는 이 온기는 도대체 뭐고?
“꼬마?”
헉.
순간 나는 정신을 차렸다.
세 용사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 괜찮아?”
“웅, 갠차나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노예 관리장 이전의 기억은 그 어떤 것도 생각해 내지 못했으면서.
왜 갑자기 눈 내리는 하늘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포근했었어.’
나는 내 몸을 감싸던 온기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래서 꼬마 생일은 언젠데?”
“그, 티티 생일은.”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사실 단 하나 루돌프가 맞는 말을 한 게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태어난 날을 모른다는 것.
“생일, 잘 모르는데…….”
내가 조심스럽게 대답하자마자, 키리오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세자르와 지크프리트는 사납게 키리오스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살벌한지, 키리오스를 당장이라도 죽여 없앨 것 같다.
보다 못한 내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 그러면! 티티 생일은 티티가 정해도 대요?”
“그럼, 당연하지!”
“꼬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혹시 생각해 둔 날짜가 있나요?”
세 용사가 과하게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고민은 짧았다.
나는 냉큼 대답했다.
“……아빠들을 처음 만났던 그날이요.”
아빠.
그 단어에 세 용사들이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잠시 후.
세 용사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햇살처럼 환한 미소였다.
‘어떡해, 너무 부끄러워.’
온몸이 배배 꼬이는 느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양손으로 얼굴을 폭 덮었다.
“뭐야, 꼬마. 부끄러워하는 거야?”
“키리오스, 애를 왜 놀리고 그러나?”
“타티아나 양, 한 번만 더 아빠라고 불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세 용사의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어찌나 민망한지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행복해.’
가슴 깊은 곳이 깃털로 문지르는 양, 간질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어서.
자꾸만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 * *
며칠 후.
황제가 라키어스를 단독으로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라키어스는 황제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아비를 대하는 아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군주를 대하는 신하의 태도에 가깝다.
그런 라키어스를 마땅찮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황제가, 툭 말을 꺼냈다.
“오를레앙 공작에게서 공식적으로 요청이 왔다.”
“어떤 요청입니까?”
“세 용사가 너를 직접 가르치고 싶다고 하더구나.”
순간 라키어스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 재능이 무척 출중하여 이대로 묻히기에는 아까우니, 부디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전해 왔다.”
“그 말씀은…….”
“마탑주와 대사제 또한 동일한 의견이라고 하니, 내가 부득불 거절할 수도 없지.”
쯧.
불만스럽게 혀를 찬 황제가 휙 돌아섰다.
“앞으로 주에 3일간, 오를레앙 공의 타운하우스에 방문하도록 해라.”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저를 외면하는 황제를 향해, 라키어스는 다시 한번 깊숙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후.
라키어스는 황제의 집무실에서 물러나왔다.
“후우.”
라키어스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선망하던 세 용사들에게 직접 교육받을 수 있다는 건, 분명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할 대단한 기회였다.
게다가 라키어스는 여태까지 배움에 목말라 있었다.
평소였더라면 어떻게든 세 용사에게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하여, 바쁘게 머리를 굴리고 있겠지.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라키어스의 가슴을 마구 들뜨게 하는 사람은…….
‘1황자님!’
발랄한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라키어스의 입술 위로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