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황자 전하라는 호칭은 역시 좀 거리감이 있으니까요.’
순간 나는 조금 멈칫했다.
라키.
그 애칭이 라키어스에게 있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잘 알았으므로.
그도 그럴 것이, ‘라키’는…….
‘지금은 돌아가신 황후 폐하께서 라키어스를 불러 주었던 애칭이잖아.’
원작에서 구구절절 묘사됐었다.
라키어스가 얼마나 사랑에 굶주렸는지.
유일하게 그를 사랑해 주었던 어머니에게 얼마만큼의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하여 황후가 서거한 이후, 라키어스는 그 소중한 애칭을 단 한 명에게만 허락해 주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원작의 여자주인공이었지.’
그를 떠올리자, 얼마나 가슴이 아릿해지던지.
‘공적인 자리는 어쩔 수 없지만, 공녀와 단둘이 있을 때만큼은.’
한참을 머뭇거리던 라키어스가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내게 물어 왔다.
‘……라키라고 불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말, 그때의 라키어스가 얼마나 귀여우면서도 애틋했는지 모른다.
‘그럼 저도 티티라고 불러 주세요!’
내가 그렇게 대답했을 때.
라키어스의 표정이 얼마나 환해졌는지도,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
‘뭐어, 이로써 라키어스에게 내 목이 날아갈 확률은 조금 더 낮아졌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내가 내심 음흉한 미소를 짓던 차.
“그런데 이번 생일파티에 나도 참석해도 되는 거야?”
라키어스가 걱정스럽게 내게 물어 왔다.
“스승님들께서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은데…….”
“으음…….”
……세 아빠들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다는 의견에는, 솔직히 나도 동의하기는 한다.
우리 아빠들은 이상하게 라키어스에게 박하단 말이지.
하지만.
“괜찮아, 내가 우리 아빠들 다 이길 수 있어!”
나는 보란 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오늘은 내 생일이잖아. 오늘만큼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걸.”
“…….”
그러자 라키어스의 붉은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그 후.
조심스럽게 내게 묻는다.
“……내가 너한테 소중한 사람이야?”
“물론이지!”
나는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하니?
너는 앞으로 내 목숨 줄이 되어 줄 녀석인걸!
그러자 라키어스가 눈매를 휘며 예쁘게 웃었다.
서로 애칭을 부르자고 했을 때만큼이나 환한 미소였다.
‘……으음, 저렇게 좋아하니까 왠지 찔리네.’
양심이 콕콕 아파 오는 기분에, 나는 괜히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라키어스가 활기찬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참, 선물은 이따 생일파티 자리에서 줘도 되지?”
“선물도 준비했어?”
“그럼, 당연하지. 네 생일이잖아?”
세상에.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저렇게 착하고 순진한 애를 두고, 속으로 목숨 줄이네 뭐네 계산하고 있었다니.
내 음침한 성격에 대해 환멸감이 든다…….
그런데 그때.
“티티, 어디 아파?”
라키어스가 불쑥 내게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헉.’
나는 헛숨을 삼켰다.
아니, 쟤는 왜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고 그래?
사람 설레, 아니, 놀라게!
동시에 라키어스가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열 살짜리 어린아이답게 조막만한 내 손과는 다르게, 완연히 청소년기에 들어선 단단한 손이었다.
“열은 없는데…….”
“다, 당연하지. 감기도 안 걸렸는데 열이 날 리가 있어?”
부러 새침하게 대꾸하자, 라키어스가 달래듯 말을 이었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기에, 어디 몸이라도 불편한가 걱정했어.”
그러고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처진 목소리로 묻는다.
“……혹시 내가 갑자기 이마를 짚어서 기분 나빴어?”
으으.
라키어스 쟤, 자기 얼굴이 엄청나게 예쁘게 생겼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야 제 미모를 이렇게까지 효과적으로 사용할 리 없어!
“기, 기분 나쁠 리 없잖아.”
그리고 얼빠인 나는, 라키어스의 미인계를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민망해진 나는 괜히 라키어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됐어, 아빠들이나 찾으러 가자.”
라키어스는 내가 붙든 제 손목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묘하게 기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라키어스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니까.
나는 힐끔 라키어스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방금 전만 해도 내가 짜증을 부렸었잖아.
그런데도 왜 저렇게 만족스러워하는 건지, 도저히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그러던 중.
나는 덜컥 굳어 버렸다.
그, 세상은 무척 넓고 취향은 다양하다고 하니까.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남에게 구박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은밀한 취향의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 저 순진한 애를 두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나는 속으로 질색을 하면서 발을 재게 놀렸다.
* * *
라키어스를 이끌고,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걷던 중.
나는 노라와 마주쳤다.
“노라!”
도도도 달려간 내가, 폴짝 뛰어 노라의 품에 안겼다.
노라는 반사적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세상에, 이렇게 달려오시다가 넘어지면 어쩌시려고.”
“그런 걱정을 왜 해야 해? 어차피 노라가 나를 받아 줄 텐데.”
생글생글 웃어 보이자, 노라의 표정이 금세 흐물흐물하게 풀어졌다.
“우리 아가씨, 이렇게 귀여우셔서 어떡하죠?”
“헤헤.”
나는 냉큼 노라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비록 외부에서는 다들 나더러 깍듯하게 공녀님이라고 불렀지만, 집 안에 있을 때만큼은 여전히 ‘우리 아가씨’였다.
어렸을 적에 부르던 아가씨라는 호칭이 그대로 굳어진 건데.
나는 뭐, 이쪽 호칭이 훨씬 더 좋다.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나를 품에 끌어안은 채, 노라가 라키어스에게 예를 갖추었다.
“1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안녕, 노라.”
오랫동안 세 아빠들에게 교육을 받아서일까.
처음에는 1황자라는 신분에 잔뜩 긴장하던 사용인들도, 이제는 라키어스에게 상당히 익숙해진 것 같다.
특히 노라는 내 유모인지라, 오며가며 라키어스의 얼굴을 자주 봐서 그런지.
서로서로 안부를 물을 정도로 친밀해졌다.
“이번에 새로 마련해 드린 목검은 손에 잘 맞으시나요?”
“응, 아주 좋아. 고마워.”
라키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라가 짓궂게 한쪽 눈을 찡긋거려 보였다.
“그 목검, 가주님께서 직접 고르신 거예요. 무게중심부터 길이까지 꼼꼼하게 살피셨답니다.”
“그래?”
라키어스는 의외라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난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 아빠들은 라키어스를 가르치는 데에 진심이었으니까.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후계자에 목말라 있었던 세 아빠에게, 무려 한 세계의 주인공이 될 정도로 출중한 재능을 가진 라키어스가 툭 튀어나온 상황인데.
어떻게 진심이 아닐 수가 있겠어?
다만.
‘글쎄요, 딱히 1황자 전하가 마음에 들어서 가르치는 건 아니랍니다.’
‘워낙에 인재가 없어서 제자로 들인 것뿐이다.’
‘꼬마가 사정사정해서 받아들여 준 거니까, 착각하지 마.’
……라키어스 앞에서는 괜히 심술을 부려서 문제지.
‘정말, 아빠들도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한숨을 푹 내쉬던 나는, 문득 잊고 있던 위기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근데 말이지, 난 마왕으로 언제쯤 각성할 수 있는 거야?
마왕 각성은 둘째치고라도 마기는 언제쯤 제어할 수 있는 건데?
난 정말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타운하우스 도서관의 책들은 모조리 독파한 건 물론이고.
나중에는 허락을 받아서 황실 도서관도 뒤져 봤다.
황실 도서관장이랑은 이제 얼굴도 익히다 못해 서로 인사도 하고, 가끔 같이 차도 마시는 사이가 될 정도라니까?!
하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이건 뭐, 주인에게도 힘을 숨기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요새는 마기 발작의 횟수는 꽤 줄어들었다.
초반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피를 토했었는데, 요새는 일 년에 두세 번 앓아눕는 정도?
‘뭐, 이 정도면 많이 발전했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던 나는, 다시 한번 양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마계의 동태도 영 수상한걸.’
바르톨로아 일족.
비록 그들이 어마어마하게 재수 없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능력이 무척 출중하다는 건 인정해야만 한다.
괜히 마계에서 영원한 2인자로 군림한 게 아니라는 거지.
그러니 아마 지금쯤은, 용사들이 뒤집어놨던 마계를 모조리 안정화시키고도 남았을 터.
그런데도 여전히 마계에서는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
아빠들이야 다섯 마왕을 모조리 토벌했다고 알고 있으니, 마음을 놓고 있겠지만…….
나는 바르톨로아 일족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일까, 난 가끔씩 커다란 얼음을 통째로 삼킨 것처럼 심장이 서늘해지고는 했다.
“티티.”
때마침 누군가가 염려 가득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라키어스였다.
‘헉.’
퍼뜩 정신을 차린 내가 라키어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