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어쨌거나 라키어스가 골라 온 선물은…….
“펜이네?”
내 이름이 금으로 예쁘게 각인되어 있는 고급 펜이었다.
“그…… 공부할 때 쓰면 좋을 것 같아서 골랐는데.”
라키어스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나중에 훨씬 더 좋은 걸 줄게. 지금은 마음에 안 들겠지만…….”
“왜? 나 이 펜 마음에 드는데?”
나는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그 순간, 붉은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정말?”
“그럼! 매일 매일 이 펜으로 공부할 거야!”
나는 펜을 양손에 꼭 쥐며 배시시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라키랑 같이 공부하는 느낌이 나겠지?”
“아…….”
라키어스의 얼굴이 훅 붉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크프리트와 세자르가, 들으란 듯이 혀를 쯧쯧 차며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요새 애들은 너무 조숙한 것 같지 않나?”
“동감입니다. 라키어스 녀석, 우리 순진한 티티 양에게 너무 친한 척을 하는 게 아닌지.”
심지어 키리오스는 은근슬쩍 내 귓속에 대고 소곤거렸다.
“타티아나. 남자들은 다 뭐라고?”
“…….”
이미 몇 번이나 겪어 봐서 익숙한 상황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기가 막히지 않는 건 아니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세 아빠를 노려보았다.
“아빠들, 유치해.”
내가 정색을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빠들이 내게 매달렸다.
“티, 티티 양?”
“꼬마!”
“타티아나, 왜 그러나?”
한참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내가 항의했다.
“우리는 그냥 친구란 말이에요.”
순간 라키어스가 어깨를 움찔 굳혔다.
‘어라?’
나는 라키어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라키어스는 언제 움찔했냐는 양, 말간 시선으로 나를 마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내가 잘못 봤나?’
나는 오묘한 기분으로 재차 말을 이었다.
“친구끼리는 친하게 지내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자꾸만 그렇게 라키더러 눈치를 주면 어떡해요?”
“…….”
“…….”
“…….”
세 아빠는 나란히 침묵했다.
……다들 왜 저렇게 억울한 얼굴이람?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된 거.
나는 아빠들에게 확실하게 못을 박기로 했다.
“아빠들, 나랑 노라랑 놀 때에는 아무 말도 안 하잖아요.”
“아니, 그거야…….”
“그런데 왜 라키한테만 뭐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두 눈을 새치름하게 떴다.
그러면서도 슬쩍 라키어스의 눈치를 살핀다.
‘봐, 내가 너를 이렇게까지 편들어 주고 있다고!’
……그런데.
‘어라?’
난 두 눈을 깜빡였다.
내가 기껏 편을 들어 주고 있는데, 왜 라키어스의 표정은 저렇게 떨떠름한 거야?
억지로 웃고는 있지만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은 기색이랄까?
아니, 아빠들도 그렇고 라키어스도 그렇고.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다니까?
* * *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생일파티가 끝나고.
나는 세자르와 키리오스, 그리고 라키어스를 배웅하러 나갔다.
“아빠들, 오늘 재밌었어요. 또 봐요!”
손을 붕붕 흔들어 보이자, 막 마차를 타려던 키리오스가 내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꼬마, 다음에는 마탑에도 좀 놀러 와.”
그러자 세자르가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키리오스를 흘겨보았다.
“매번 폭발 사고나 일어나는 마탑에 티티 양을 부르겠다고요?”
“아, 내가 곁에 있는데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겠어?”
키리오스는 귀찮다는 양 손을 설레설레 저어 보였다.
그러고는 입술 끝을 씩 밀어 올리며 세자르를 마주본다.
“아무리 네가 꼬마를 초대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렇지.”
“이봐요, 키리오스…….”
“그렇-게까지 내가 꼬마를 마탑에 초대하는 게 약이 오르냐?”
헉.
세자르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으나, 나는 보고야 말았다.
세자르가 힘을 주어 옷깃을 꾹 움켜쥐는 것을.
그리고 그 손등 위로 살벌하게 핏줄이 솟아오르는 것을 말이야!
“부럽지? 약 오르지? 하지만 어쩌겠어, 꼬마에게 대신전은 영 건강에 안 좋을 텐데.”
키리오스가 들으란 듯이 세자르에게 귀엣말을 하며 깐족거렸다.
세자르는 두 눈에 불을 켜고 키리오스를 노려보았으나,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 내가 마기만 제어할 수 있었더라면…….’
사실 이전에도, 대신전에서 소유하고 있는 유명한 조각이며 그림들을 구경하러 가려고 했었는데.
‘티티 양의 몸에 아주 조금이라도 해가 가는 건 참을 수 없으니까요.’
세자르는 못내 아쉬운 얼굴로 내가 대신전에 방문하는 것을 극구 말렸었다.
‘그렇게나 건강에 안 좋아요?’
나도 세자르 못지않게 아쉬웠기에, 괜히 세자르에게 매달려 보았지만.
‘아뇨, 사실 잠깐 방문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만…….’
세자르는 한참을 고뇌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그래도 안 돼요.’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던 것이다…….
에효, 그나저나 여기서도 입씨름이라니.
지겹지도 않나?
나는 키리오스 곁으로 도도도 걸어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키리오스 아빠.”
“왜?”
“세자르 아빠를 계속 놀리면, 저도 마탑에 안 놀러갈 거예요.”
“…….”
그 말 한 마디로, 키리오스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뭐, 어쨌든 그렇게 두 아빠를 먼저 보내고.
나는 마지막으로 뒤에 멀뚱멀뚱 서 있던 라키어스에게로 돌아섰다.
“조심히 돌아가, 라키!”
“아, 응.”
라키어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상한 점은, 그러고도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도무지 마차로 돌아갈 생각을 안 한다는 거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카리어스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라키어스가 나를 불렀다.
“티티, 있잖아.”
“응?”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던 라키어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스승님들의 말씀이 옳을 수도 있어.”
“……으응?”
도무지 라키어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라키어스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며 씩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다음 수업에서 만나, 티티.”
그러고는 홀가분한 걸음걸이로 마차로 가 버린다.
아니, 나랑 수수께끼 맞추기 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쟨 또 무슨 말을 하는 건데?
* * *
황성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라키어스는 턱을 괸 채, 제가 타티아나에게 했던 말을 곱씹어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스승님들의 말씀이 옳을 수도 있어.’
왜 갑자기 그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을까?
그가 타티아나에게 친한 척을 한다며 유난을 떠는 스승님들이 눈꼴 시려서?
뭐,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으나.
그래도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평범한 친구는…… 싫은데.”
라키어스는 미간을 찡그린 채 웃었다.
타티아나의 수많은 친구들 중 한 명이 되는 건, 역시 싫다.
이왕 그 애의 친구가 된다면.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단 하나뿐인 친구가 되고 싶었다.
* * *
약 일주일 후.
말이 씨가 된다고, 나는 느닷없이 마탑에 방문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왜 마탑에 가게 되었느냐 하면…….
‘어떻게든 나 혼자서도 살아갈 길을 찾아 놔야만 해.’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결심했다.
사람이 언제나 운이 좋을 수만은 없다.
마기 제어에 실패하거나, 더 나아가 마왕으로 각성하지 못할 경우도 대비해 둬야만 한다.
지금은 용사 아빠들이 나를 보살펴주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아빠들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려면 일단…… 독립 자금부터 벌어 놔야겠지?’
그러한 마음으로 나는 일단 도서관으로 향했다.
주식과 투자, 사업, 경매, 부동산…….
닥치는 대로 책들을 골라서 책상에 쌓아 올리자, 노라가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아가씨. 이 책들은 도대체 왜……?”
“나, 돈을 좀 벌어 보려고.”
나는 결연하게 책을 펼치며 대답했다.
내가 전생에서 섭렵했었던 판타지 소설 속에서는, 원작의 정보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전개가 왕도였었지만.
문제는 <황자, 영웅이 되다>에서는 돈이 될 만한 정보들은 하나도 안 나왔다…….
하기야 남자주인공이 쑥쑥 자라서 마왕 때려잡으러 가는 판타지 소설에서, 그런 정보가 나오는 것도 좀 이상하기는 하지?
어쨌거나 그를 시작으로, 몇날 며칠을 도서관에서 전투적으로 책들을 탐독해 본 결과.
“휴, 다들 투자 자금이 있어야 하잖아?”
탁 소리가 나도록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내게 주어진 용돈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지크프리트는 의외로 이런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써서, 내 계좌에 꼬박꼬박 용돈을 이체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고작해야 열 살짜리 어린아이한테 용돈을 줘 봐야 얼마나 주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있잖아, 노라.”
나는 은근슬쩍 노라를 불렀다.
“혹시 내가 가진 돈은 얼마 정도 돼?”
“네? 돈이요?”
순간 노라의 표정이 오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