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이 그림, 내가 그린 거잖아?!’
액자에 들어 있는 건,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삐뚤빼뚤하게 그린 가족 그림이었다.
그 옆으로는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체로 각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지크프리트 아빠, 키리오스 아빠, 세자르 아빠, 그리고 나.>
그렇다.
이 그림, 내가 그린 것이다!
내가…… 이렇게 그림을 못 그렸나?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 이걸 왜 여기에 걸어 놔요?!”
기겁한 내가 키리오스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나 키리오스는 뭐가 문제냐는 것처럼 눈썹을 치켜올릴 따름이었다.
“왜?”
“왜긴 왜예요, 너무 못 그렸잖아요!”
어떡해, 너무 창피해!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문득 액자 밑에 메모 하나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키리오스 특유의 비스듬한 흘림체로 쓰여 있는 그 문장은…….
<꼬마가 다섯 살 때 처음 그린 그림. 이름도 처음 씀!>
순간 나는 멈칫했다.
알 수밖에 없었다.
매사 귀찮은 일을 질색하는 키리오스가, 저렇게 메모까지 붙여 가면서 보관할 정도라면.
‘키리오스는…… 저 그림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거야.’
동시에 웃음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저 그림, 내 보물이야.”
“…….”
“그러니까 아무리 꼬마라고 해도, 내 보물더러 못 그렸네 어쩌네 떠들어 대는 건 안 봐줄 거야.”
키리오스는 부러 엄격하게 말을 맺었다.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에, 나는 괜히 벽면에 붙은 메모지를 노려보며 시선을 피했다.
“그, 그래도 벽에 이렇게 메모를 붙여 두면 어떡해요? 벽지가 상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뭘 그런 걸 다 걱정해? 나중에 벽지를 통으로 바꿔 버리면 되지.”
“……아, 네.”
키리오스의 뻔뻔한 대답에, 나는 그만 뚱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정말, 감동하려다가도 그 마음이 쏙 들어가게 만든다니까?
게다가.
‘어휴, 메모지를 튼튼하게도 붙였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 메모지를 떼어내려면, 정말로 벽지까지 통째로 뜯겨져 나올 것 같은데…….
‘뭐, 키리오스가 알아서 하겠지?’
나는 책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로는 서류들이 그야말로 산처럼 쌓여 있었다.
휘하 마법사들의 마법에 관련하여 첨삭한 자료들, 키리오스의 개인 마법 연구, 그리고 마탑의 예산안 등등.
온갖 서류들이 어지럽게 섞여 있다.
다만 그 서류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으니.
나는 무심결에 키리오스를 불렀다.
“있잖아요, 아빠.”
“왜?”
“이렇게 서류에 직접 메모를 남기면 불편하지 않아요?”
그 공통점은 바로, 서류들 위에 빼곡하게 남은 밑줄과 메모들이었다.
펜으로 쓴 메모였기에 오탈자를 수정할 수가 없어서, 오탈자 위로 대충 죽죽 선을 그어 둔 자국이 선명했다.
저렇게 서류들이 훼손되면, 관리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을 텐데?
키리오스가 미간을 좁혔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일일이 메모를 써서 서류에 집게로 고정해 둘 수는 없잖아?”
하기야, 키리오스는 번거로움을 극렬히 혐오하는 성격이니까.
도무지 서류들을 섬세하게 관리할 것 같지가 않다…….
엉망이 된 서류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나는,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럼 메모지를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도록 만들면 안 돼요?”
왜, 그 전생에 썼던 포스트잇…… 그러니까 점착 메모지처럼 말이야.
서류에 메모지를 붙였다 뗐다 할 수만 있다면, 메모며 밑줄 때문에 서류가 상하지도 않을 테고.
추후 메모지들을 따로 모아서 관리하기에도 편할 거 아니야?
“메모지에 미리 접착력이 약한 접착제를 발라 둔다면, 필요할 때마다 뗐다 붙였다 할 수 있을 것 아니에요?”
내 질문에, 키리오스가 묘하게 감동 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꼬마가 요새 공부를 열심히 한다더니, 사실이었구나?”
“네?”
“아직 열 살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접착력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사용할 줄이야.”
이크.
난 내심 조금 찔끔했다.
현재 내가 열 살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접착력이라는 단어는, 역시 어린아이가 쓰기에는 다소 어려운 느낌이지?
“어쨌든 꼬마, 네 말대로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메모지는…… 그러니까…….”
무어라 말을 이으려던 키리오스의 얼굴 위로, 점차 놀라움이 번졌다.
흡사 세기의 발견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잠깐만.”
그 말을 끝으로, 키리오스는 굳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뭐야, 갑자기 왜 저래?’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키리오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 봐도, 키리오스는 도무지 이렇다 저렇다 말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다만 계속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뿐.
참다못한 내가 키리오스를 불렀다.
“그, 아빠?”
내 미심쩍은 부름에, 키리오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진녹색 눈동자가 멍하니 나를 응시했다.
흡사 누군가가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치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꼬마.”
“네, 네?”
워낙에 키리오스의 목소리가 진지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 긴장했다.
그런데 저렇게 분위기를 잡아 놓고서는 한다는 말이.
“역시 너는 나를 닮은 게 분명해.”
……갑자기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람?
내가 어리둥절해하거나 말거나, 키리오스는 재차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천재일 리가 없잖아?”
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키리오스는 설명을 해 주기는커녕, 냅다 행동에 들어갔다.
딱!
키리오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책상 서랍이 저절로 스르륵 열렸다.
잉크병이며 펜이며 갖가지 물건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가운데, 종 하나가 쑥 빠져나와 허공을 가로질렀다.
딸랑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린다.
그 일련의 과정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가 질문했다.
“종은 왜 울리는 거예요?”
“멜빈을 부르려고.”
……키리오스의 방에서 종을 울리는데, 어떻게 멜빈이라는 사람이 그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멜빈이 누군데요?”
그제야 키리오스가 아차 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특허 업무를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녀석이야. 아무래도 마탑은 마도구 관련으로 특허를 낼 일이 잦으니까.”
“그렇구나…… 그런데 그 사람은 왜 부르는 거예요?”
“그야 당연히, 이 대단한 발상을 그냥 놓아둘 수는 없으니까?”
나는 그제야 띄엄띄엄 흩어진 대화를 이해했다.
그러니까 키리오스는 내 점착 메모지 관련 아이디어가 아주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특허를 낼 요량인가 보다.
‘아니, 처음부터 그걸 설명을 해 줘야 할 거 아냐?’
불만스럽게 키리오스를 흘겨보던 것도 잠시.
‘그러고 보면, 키리오스가 저렇게 의욕적으로 행동하는 건 엄청 드문데.’
나는 조금 새삼스러워졌다.
적어도 키리오스는 점착 메모지를 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멜빈이라는 마법사는 오지 않았다.
“…….”
“…….”
그저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 뿐.
“이 자식, 왜 안 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키리오스가,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되겠어, 가자!”
“네? 어딜 가요?”
“어디겠어, 멜빈 자식을 만나야 할 것 아냐!”
키리오스가 답삭 나를 안아 들더니, 그대로 방문을 열었다.
벌컥!
방문 너머로 기나긴 복도가 펼쳐졌다.
복도 안으로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방문들이 자유분방하게 달려 있었다.
동그란 모양, 세모 모양, 미닫이문 등등…….
일반적인 직사각형 형태의 방문이 오히려 드물 정도였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천장에는 왜 문이 달려 있는 걸까?’
나는 난해한 복도의 구조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펑!!
무언가가 성대하게 터지는 폭발음이 울렸다.
아무래도 마탑에서 주기적으로 폭발사 고가 난다는 소문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
동시에 마법사 한 명이 기겁하며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으아악!”
허겁지겁 방문부터 걸어 잠근 마법사가, 초조한 얼굴로 닫힌 문을 힐끔힐끔 돌아본다.
“제기랄, 왜 실패했지? 일단 수식부터 다시 점검해 보고…….”
“야, 멜빈.”
“…….”
순간 마법사가 흠칫 어깨를 굳히더니, 삐걱거리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키리오스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질문을 던졌다.
“너 여기서 뭐 해?”
“마, 마, 마탑주님?!”
마법사, 멜빈은 어찌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퍽 안쓰러웠다.
“또 불냈냐?”
“아뇨, 그러니까 전……!”
멜빈은 필사적으로 변명하려 했으나, 슬프게도 닫힌 문틈 너머로 연기가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다…….
“쯧.”
혀를 찬 키리오스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딱!
동시에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던 연기가 순식간에 멎었다.
키리오스가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문 열어.”
“…….”
멜빈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