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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48)화 (49/163)

<48화>

널찍한 내부는 그저 조용했다.

열기도, 폭음도,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연기까지도 모조리 간데없었다.

“감사합니다, 마탑주님!”

환호하던 멜빈이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키리오스가 그야말로 악귀 같은 얼굴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으니까.

“내가 오늘 우리 꼬마가 온다고 했어, 안 했어.”

“마, 마탑주님! 그게……!”

“그런데 내 호출에는 응답조차 하지 않더니, 감히 마탑 안에서 이따위 실험을 하고 있었어?”

키리오스는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우리 꼬마에게, 폭발하는 모습을 들키기까지 해?”

녹색 눈동자가 광기에 가득 차 번들거렸다.

“너 이 자식, 안 되겠어.”

“서, 설마! 제발, 그것만은……!”

멜빈은 당장이라도 키리오스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 듯한 기세였다.

동시에 키리오스의 입술이 열렸다.

“연구 예산.”

그 단어를 듣자마자 멜빈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아니, 사형 선고를 들어도 저렇게까지 절망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3개월간 감봉이다.”

“마탑주니이이이임!!!”

멜빈은 그야말로 온 세상을 잃은 것처럼 절규했다.

하지만 키리오스는 가차 없었다.

“여기서 더 징징거리면 3개월이 아니라 6개월로 늘어날 줄 알아.”

“…….”

그 야멸찬 선언에, 멜빈이 입을 합 다물었다.

그러고는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키리오스를 바라본다.

“그래서 저는 왜 찾아오신 겁니까?”

“특허를 하나 내려고.”

키리오스가 어깨를 우쭐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우리 꼬맹이가 아이디어를 하나 냈는데, 이게 물건이거든.”

“꼬맹이라면…….”

그제야 멜빈은 내게로 시선을 주었다.

“아, 이분이 오를레앙 공녀이십니까?”

어째 나를 알고 있다는 말투다.

난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저를 아세요?”

“당연하죠. 마탑주님이 얼마나 공녀님에 대해 떠들어 대는지, 귀에 딱지가 얹을 지경…….”

툴툴거리던 멜빈이, 키리오스의 살벌한 눈빛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린다.

“그래서 어떤 특허를 내시려고 하는 겁니까?”

“그게…….”

나는 아까 전에 키리오스에게 했던 설명을 다시 한번 읊었다.

키리오스가 군데군데 끼어들어서 보충 설명을 해 주었기에, 멜빈은 점착 메모지의 개념 자체는 쉽사리 이해한 것 같다.

“그러니까,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메모지를 특허 내시겠다는 거지요? 그 이름이 점착 메모지고요?”

“그래. 제작과 유통은 내가 직접 맡아서 할 거야.”

키리오스가 선언했다.

멜빈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마탑주님께서요?”

그러고는 뚱한 목소리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그럴 시간에 서류 검토부터 좀 더 성실하게 해 주시지…….”

“이 자식이?”

키리오스가 두 눈을 부라리자, 멜빈은 얌전히 찌그러졌다.

“그건 그렇고, 이거 완전 대단한 발상 아니야? 분명 제작하기만 하면 엄청난 수요가 있을 거라고!”

“흠, 그런가요?”

다만 잔뜩 흥분한 키리오스와는 달리, 멜빈의 반응은 어쩐지 좀 미적지근했는데.

“솔직히 접착제는 무언가를 붙이는 용도잖아요.”

“그래서?”

“강한 접착제를 개발해도 모자랄 판국에, 굳이 접착력이 약한 접착제를 개발하는 건 비효율적이지 않나요?”

“뭐?”

키리오스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멜빈은 꿋꿋이 제 의견을 피력했다.

“제 생각으로는, 그냥 메모지 정도는 이대로 써도 괜찮지 않은가 싶습니다만.”

그렇게 운을 뗀 멜빈이, 힐끔 키리오스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무엇보다도 마탑주님께서 직접 개발하여 유통까지 진행하시기에는, 메모지는 너무 소소한 물건이 아닐지…….”

딱!

키리오스는 멜빈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매몰차게 손가락을 튕겼다.

“으악!”

누군가가 목덜미를 잡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멜빈이 방 안으로 강제로 끌려 들어갔다.

쾅!!

방문이 거세게 닫혔다.

키리오스는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하, 머저리 같은 자식들.”

그러고는 이마를 짚으며 기나긴 한숨을 내쉰다.

“이 대단한 발상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저 무능한 자식들을 당장에 갈아치워야만…….”

“괜찮아요.”

보다 못한 내가 키리오스를 다독였다.

“그보다, 저 때문에 둘째 아빠가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뭐?”

“굳이 제 체면을 위해, 가능성도 없는 일을 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진심이었다.

비록 내가 전생에 살던 세계에서는, 점착 메모지가 엄청나게 대성공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멜빈의 말마따나, 메모지는 너무 소소한 물건이잖아?

마탑에서 수많은 기기괴괴한 마법을 구현하던 마법사들이, 고작해야 점착 메모지 정도로 만족할까?

“…….”

그러자 키리오스가 딱 잘라 말을 맺었다.

“아니, 난 정말로 네 발상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네? 하지만…….”

“물론 너는 내 딸이고, 내가 너를 아주 귀여워하는 건 사실이지만.”

키리오스가 양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 시간과 노력을 가능성 없는 일에 헛되이 낭비하지는 않아.”

“그, 그런가요?”

“그럼, 무려 대마법사의 시간과 노력이라고. 그게 얼마나 값진 건데.”

키리오스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허투루 쓰는 건 너무 아깝지 않냐?”

“…….”

으음, 얼핏 듣기에는 합리적인 이유이기는 한데.

나는 흐린 눈으로 키리오스를 응시했다.

다만 키리오스는 이미 전적이 있잖아?

나랑 놀겠답시고, 오를레앙 타운하우스에서 시간을 엄청나게 흘려보내고 있는걸.

그래서 지크프리트의 고뇌가 나날이 깊어지고 있는데…….

“물론 우리 꼬마의 귀여움은 그럴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어째 이 말까지 들으니 더더욱 신뢰가 안 간다.

나는 타협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샘플을 만들어서 사용해 보라고 주면 어때요?”

“샘플?”

“네. 미리 메모지를 일부만 제작해서, 마탑 사람들에게만 무료로 나눠 주면 되잖아요.”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정말로 이 아이디어가 괜찮은 거라면, 직접 사용해 보면 호응이 오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특허 업무를 주로 맡고 있는 멜빈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다른 마법사들도 멜빈과 거의 비슷한 의견이지 않을까?

다만 키리오스는 나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오, 좋은 생각인데?”

턱을 쓸어내리며 두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도 모처럼 키리오스가 저렇게 기대에 차 있는데, 괜히 거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기에.

“저도 잘됐으면 좋겠네요.”

나는 그냥 생글생글 웃었다.

* * *

멜빈 코르호넨.

마탑주에 의해 강제로 특허 관련 업무를 떠맡은, 마탑 소속 중견 마법사.

그는 현재, 시큰둥한 눈빛으로 제 앞에 놓여 있는 메모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단 특허를 내기는 했는데…….”

멜빈은 불만스럽게 손가락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아니, 이게 뭐라고 마탑주님께서 특허를 내라며 신신당부를 하시는 거야?”

아마도 오를레앙 공녀 때문이리라.

타티아나.

마탑주가 예뻐 죽으려고 하는 양딸 말이다.

뭐, 솔직히 조그맣고 말랑말랑한 여자아이가 귀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다만…….

‘처음 봤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마탑주님께서, 누군가를 바라보며 그렇게 애틋한 표정을 짓는 건.

심지어는 생사를 함께했던 공작님과 대사제님에게도, 저렇게까지 신경을 쓰지는 않는 것 같던데.

아마도 몸이 약하다고 했던가?

그래서 어린아이의 별것 아닌 말까지 모조리 들어주려고 하시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너무 오냐오냐하시는 거 아냐?’

어쨌거나 마탑의 마법사들에게도 메모지들을 모두 돌리고, 반응을 살펴보라는 엄명이 떨어진 상황.

“에휴, 앓느니 죽지.”

멜빈은 짜증스럽게 책상 앞에 앉았다.

오늘도 처리해야 할 특허 서류들이 산더미였다.

* * *

그리하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라?’

멜빈은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내가 언제 메모지를 다 썼지?’

두툼했던 메모지 뭉치는 이제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그 점착 메모지들은, 특허 반려가 난 서류들에 차곡차곡 붙어 있었다.

‘특허를 진행하기에는 마법 수식이 너무 부실하다.’

‘이미 비슷한 아이디어의 마도구가 기존 특허를 취득했다.’

‘구동 원리가 부족하니 보완해 와라.’

등등…….

점착 메모지 위로는 왜 특허가 반려되었는지 짤막하게 이유가 적혀 있었다.

그 순간.

멜빈은 불현듯 깨달았다.

‘이 메모지, 진짜 편하다!’

오탈자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서류가 훼손될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

필요 없는 메모는 그냥 떼서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안 되겠다.’

멜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메모지 남은 게 없나? 일단 다른 녀석들에게 좀 받아 와야만……!’

마탑 소속 마법사 전체에게 메모지를 뿌려 두었으니, 분명 어딘가에 남은 것이 있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멜빈은 결연하게 방문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마법사 한 명이 허겁지겁 멜빈에게로 달려왔다.

“멜빈 님!”

“아, 조셉! 혹시 메모지 남은 것 좀 있…….”

“메모지!!”

마법사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외쳤다.

멜빈이 흠칫했다.

“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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