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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51)화 (52/163)

<51화>

‘뭐, 어쨌든.’

한참을 웃던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결심했다.

‘라키어스에게 꼭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던 건 모조리 라키어스 덕이었으니까.

말로만 고맙다고 하고 때우는 건 미안하니까, 선물이라도 챙겨 줄까?

……그런데.

나는 아까 전 보았던 라키어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얼굴이 완전 터질 것처럼 붉던데.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끌어안아서 놀랐나?’

아무래도 몸이 어려져서 그런지, 내 정신연령도 가끔 몸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전생까지 따지면 내가 라키어스보다 한참 나이가 많으니까…….

‘좋아, 앞으로는 좀 조심해야지.’

나는 우리 남자주인공님의 섬세한 마음을 배려해 줄 것을 결심했다.

* * *

그날 밤.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황실 기사단의 연무장.

소년 한 명이 걸어 나왔다.

한 손에는 목검을 움켜쥔 채 비스듬히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소년은 바로 라키어스.

황제와 황비를 포함한, 황궁 전체에게 외면당하는 외톨이 황자였다.

하지만 라키어스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

‘타티아나.’

그 이름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목이 말라 왔다.

‘있잖아, 라키. 라키가 생각하기에는, 물건을 많이많이 판매하려면 어떤 요소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해?’

소파에 턱을 괸 채, 말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던 하늘색 눈동자가 눈에 선했다.

그리고.

‘세상에, 라키! 정말 고마워!’

……그저 별다를 것도 없는 조언을 했을 뿐인데.

당장에 그의 목을 휘감던 가느다란 팔.

몸에 닿아 오던 따스한 체온.

온 체중을 실어 매달렸음에도 솜털처럼 가볍던 무게까지.

‘라키, 너는 천재야!’

아마 저 말은 진심이었으리라.

타티아나와 알고 지낸 지도 벌써 6년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타티아나는 단 한 번도 라키어스에게 선을 긋거나 거짓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라키어스는, 그게…….

‘신기해.’

가끔 자신이 그녀에게 이런 호의를 받아도 되는지, 그런 의문이 든다.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타티아나.

반짝반짝 빛나는 타티아나.

그에 반해, 자신은 여전히 황궁의 유령이었으니까.

6년이 흘렀음에도 황궁 사람들은 여전히 라키어스를 꺼려 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조차 붙이려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제 그런 것쯤은 말끔히 무시해 버릴 수 있게 된 건.

괜찮다고 느껴지는 건…….

‘역시 티티 덕분이겠지.’

라키어스는 아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입 안으로 곱씹었다.

티티, 가끔은 네가 까마득히 멀어 보여.

나도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하는데도, 네게는 내가 너무나도 모자란 사람 같아.

‘그래도.’

순간 붉은 눈동자에 결의가 어렸다.

‘이대로 너와 멀어지고 싶지는 않아.’

타티아나가 나이답지 않은 뛰어난 성취로 앞서 나아간다면, 라키어스도 어떻게든 뒤따를 생각이었다.

처음으로 그를 발견해 주고, 손을 내밀어 주었다.

지옥 같은 황성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햇빛 한 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여 말라비틀어지는 식물 같던 그에게.

유일하게 빛이 되어 주었고, 물 한 모금이 되어 주었던…….

단 하나뿐인 사람.

그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하다.

‘그러니까, 나도…….’

붉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티티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욕심이라는 것쯤 잘 안다.

다만 가끔은, 알면서도 도무지 접을 수 없는 욕심이라는 게 있는 법이어서.

언젠가부터 라키어스에게는 꿈이 생겼다.

타티아나와 나란히 발맞춰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꿈이었다.

그 애에게 부끄러운 모습만큼은 절대 보이기 싫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될 거야.’

목검을 쥔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든.’

후우.

짧게 심호흡을 한 라키어스가 이내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지크프리트에게 직접 지도받은 정석적인 횡 베기였다.

밤이 까마득히 깊어지고, 새벽달이 떠오를 때까지.

라키어스의 훈련은 멈추지 않았다.

* * *

햇볕이 화창하게 내리쬐는 창가 옆.

“흐음.”

나는 소파에 도사리고 앉아서, 진지한 눈빛으로 내 앞의 동화책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왕 만화로 위인전을 낼 생각이었으니, 캐릭터와 만화 작업을 맡아 줄 사람을 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서 일단 찾아보기로 결정한 게, 바로 동화책.

기본적으로 동화책 삽화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니까, 아이들의 취향에 맞추기 쉬울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러고도 정 적임자를 찾아내기 어려우면, 직업사무소 같은 곳에도 문의를 해 볼까 고민 중인데…….

“타티아나, 왜 그러지?”

때마침 지크프리트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뱁새눈으로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지크프리트는 지금 시간에는 분명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지크프리트는 꿋꿋이 내게 질문했다.

“동화책을 읽고 싶나? 읽어 줄까?”

“…….”

이보세요, 첫째 아빠.

아빠는 동화책 읽기에 저언-혀 재능이 없으세요.

이젠 그 사실을 깨달을 때도 되지 않으셨나요?

그러한 핀잔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나는 그저 생글생글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제가 읽을게요.”

그리고 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맞습니다! 아가씨께서 읽으시도록 그냥 두십시오!”

갑자기 집사 아저씨가 툭 튀어나왔다.

“가주님께서 처리해 주셔야 할 서류들이 산더미입니다!”

“아니, 잠깐만…….”

지크프리트는 몇 마디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집사 아저씨에게 가차 없이 끌려 나갔다.

흐린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내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주었다.

“힘내세요, 아빠-.”

그리고.

“휴우.”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지크프리트마저 거실을 빠져나가자, 사위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이 고요함이 조금은 새삼스럽다.

‘집 안이 이렇게 조용한 때는 정말 드문데.’

그도 그럴 것이, 매번 세 아빠들이 내 주변을 들락날락했으니까.

하지만 최근에는 각자가 자기 일로 바쁜 탓에, 서로 얼굴을 보는 일이 조금 줄었다.

키리오스는 점착 메모지 관련 일 때문에 마탑에서 나오지를 못했고, 세자르는 사제들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있다고.

‘어쩐지 조금 허전한데…….’

무심결에 그렇게 생각하던 내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방금 전만 해도, 지크프리트가 일을 하러 가지 않는다면서 뱁새눈을 떠 놓고.

아빠들을 며칠 보지 못했다고 벌써부터 아쉬워하고 있다니.

‘나…… 생각보다 아빠들을 더 좋아하고 있는 걸지도.’

동시에 나는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아니, 내가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할 처지야?’

비록 아직까지 각성은 하지 못했지만, 난 엄연히 마왕이다.

그리고 저들은 다섯 마왕을 토벌하여 인류에게 자유와 평화를 안겨 준 용사들이지.

그 말은 즉.

나와 용사들은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관계라는 거다.

그런 사람들에게 쓸데없이 애착을 가져서 뭐 어쩌자는 건데?

‘됐어, 원래 목적에 집중하자.’

내 목적은 마왕으로 각성하지 못했을 때를 대비한 플랜 B를 세우는 것.

용사들의 도움 없이도 자립할 수 있는 독립자금을 모으는 것이다.

목적이 흐려져서는 안 된다.

“흐음…….”

나는 뚱한 얼굴로 팔랑팔랑 동화책을 넘겨보았다.

딱히 이거다 싶은 건 없는 듯한데…….

“어?”

순간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그림, 괜찮은데?’

솔직히 눈에 확 띄는 화려한 그림체는 아니었다.

그리고 동화에 어울리는 폭신폭신하고 사랑스러운 그림체도 아니다.

다만 기본기가 탄탄한 그림이었다.

인체도 확실하고, 동세와 표정을 다채롭게 그릴 줄 아는 게 마음에 들었다.

만화의 기본 소양을 충실히 갖추었다고나 할까?

물론 컷 분할이나 연출 같은 부분은 앞으로도 좀 더 연구해 봐야겠지만…….

‘좋아. 일단 이 사람을 문의해 보자.’

나는 일단 표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어라, 왜 삽화가의 이름이 없지?’

표지에는 출판사의 이름이 커다랗게 박혀 있을 뿐.

삽화가의 이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상하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동화책처럼 그림이 주가 되는 큰 책은, 제일 잘 보이는 표지에 삽화가의 이름을 기재해 둬야 하지 않나?

그 후.

동화책 표지와 내지를 한참을 뒤져 본 후에야, 나는 깨알처럼 조그맣게 박힌 삽화가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삽화가의 이름이 발행인보다도 훨씬 조그맣게 적혀 있는 건데?”

투덜거리던 나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잠깐. 니콜라스 무어라고?’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 라키어스의 마왕 토벌 기록화를 그렸던 화가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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