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렇습니까?”
“네. 그래서 삽화가님을 너무 만나 보고 싶어서…… 제가 노라를 졸랐어요.”
일명 ‘어린아이라서 내가 떼 좀 썼어, 이해하지?’ 작전.
“혹시 제가 이렇게 찾아와서 많이 화나셨어요?”
나는 그렁그렁한 시선으로 사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사장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렇다면 제가 괜찮은 커피하우스로 모시겠습니다.”
응?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출판사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왜 갑자기 커피하우스로 모신다고 한담?
내 의아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사장이 냉큼 부연설명을 했다.
“아, 지금 저희 사무실이 워낙에 혼잡해서요. 귀한 분을 모시기에는 누추해서 그렇습니다.”
이상한데?
나는 미간을 좁혔다.
‘보통의 사무실이라면 손님을 맞는 응접실을 마련해 두지 않아?’
물론 아주 영세한 출판사라면 그럴 수 없는 것도 이해하지만, 여긴 딱 봐도 삐까번쩍한걸.
이건 마치…….
‘우리가 이 출판사에 들어가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것 같잖아.’
그 순간 나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난 어린아이다.
좋아하는 삽화가를 만나지 못해서 눈이 돌아간 어린아이다.
삽화가를 만날 수만 있다면, 떼를 쓰며 바닥에 드러누울 각오까지 한 어린아이다…….
“그, 그럼…….”
나는 양손을 가슴 위로 꼭 모아 잡으며 사장을 올려다보았다.
“저, 삽화가님은 못 뵙는 거예요?”
또르륵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간절한 눈동자는 덤이었다.
사장이 쯧 혀를 차더니 가르치듯 입을 열었다.
“공녀님께서는 아직 나이가 어리셔서 모르시겠지만, 삽화가는 여기서 작업하지 않습니다.”
“그럼요?”
“개인 작업실에서 작업해서 납품하는 식이지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사장을 채근했다.
“그렇구나…… 그럼 작업실 주소를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그건 어렵습니다. 개인의 사생활이니까요.”
“그렇다면 삽화가님의 진짜 이름이라도 알려 주세요! 편지라도 보내고 싶어요!”
“안 됩니다.”
사장은 시종일관 완고했다.
아니 이건 무슨 벽도 아니고……?
나는 어린아이 코스프레를 하던 것까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나도 모르게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사장님.”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노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실례지만, 그렇게까지 삽화가님의 정체를 숨기려 하시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순간 사장이 움찔 어깨를 굳혔다.
“저희가 당장 그 삽화가를 만나서 계약을 진행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일단 만나서 대화만 나눠 보겠다고 하는 것인데요.”
“아니, 그건…….”
“애초에 출판사와 삽화가의 작업은 단발성 계약으로 진행되고, 삽화가님께서는 원하는 곳과 계약을 맺을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나는 멍하니 노라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노라는 출판사에 찾아오기 전에, 법적인 문제를 모조리 조사해 두었나 보다.
우와, 엄청 유능한데?
“그러니 저희가 삽화가님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여 계약을 진행한다 한들, 하등의 문제도 없어요.”
“그렇기는 해도……!”
“심지어 저희는 삽화가님이 저희와 계약하여 출판사의 작업에 무리가 가게 된다면, 그에 대한 보상까지 해 드리겠다고 말씀드린 상황입니다.”
노라는 냉정한 시선으로 사장을 마주 보았다.
“저희는 오히려 출판사의 입장을 고려하여 제안을 드린 건데, 이렇게 나오시니 아주 불쾌하네요.”
“그, 불쾌하셨다면 저희가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사장님께서는 삽화가님의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이름을 알려 주시지 않는다고 하시지만.”
입술조차 뻥긋하지 못하는 사장을 향해, 노라가 싸늘하게 되물었다.
“그렇게 개인의 사생활을 잘 지켜주시는 분께서, 어째서 출판법은 지키지 않으시는지 의문이군요.”
“뭐, 뭐라고요?”
“제가 살펴본 바, 삽화가는 이 출판사에서 나온 전래동화집 전체를 맡아 작업하였더군요.”
노라가 엄중하게 말을 맺었다.
“출판법에 따르면, 작업물의 주 작업자는 그 성명을 누구든 인지할 수 있는 곳에 기재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사장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죠.”
“그, 그건……!”
“표지에 기재되어야 하는 작가명이 내지에만 기재되었고, 심지어는 그 이름조차 가명이었어요. 엄연히 출판법 위반이죠.”
우와.
노라의 막힘없는 말을 홀린 듯이 듣고 있던 나는, 문득 사장의 이상 반응을 눈치챘다.
‘뭐야, 저거?’
겉보기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으나, 키가 작아서 눈높이가 낮은 내게는 훤히 보였다.
사장은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초조해하는 마음을 애써 숨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 삽화가가 원하지 않는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사장이 짓눌린 목소리로 항변했다.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꼭 감춰 달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그런 거라고요!”
“……삽화가가 자신의 정체를 숨겨 달라고 했다고요?”
“예, 그랬습니다! 설마 제가 출판법을 어기고 싶어서 어겼겠습니까?”
사장이 입에서 침을 튀기며 외쳤다.
“작가들이 얼마나 예민하고 까탈을 부리는지는 아십니까? 저는 다 삽화가의 쾌적한 작업환경을 위해서 그런 겁니다!”
“…….”
노라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사장을 바라보았다.
사장은 재차 언성을 높였다.
“아무리 오를레앙 공작가라지만 너무 무례한 것 아닙니까? 출판법이네 뭐네, 지금 절 협박하냐고요!”
아니, 기가 막혀서.
애초에 삽화가의 이름을 제대로 기재하지 않은 것도 그쪽이고, 삽화가와의 접촉을 굳이 막은 것도 그쪽인데.
왜 이쪽에 다 뒤집어씌우는데?
하지만.
“노라.”
나는 노라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아가씨?”
“우리 때문에 사장님이 곤란하신가 봐.”
나는 양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삽화가님이 우리를 만나기 싫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지.”
“네? 하지만…….”
“이만 집으로 돌아가자. 응?”
노라는 못내 분한 얼굴이었으나, 내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차마 반발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마차에 올라탔다.
“아가씨, 정말로 이대로 타운하우스로 돌아가시려고요?”
마차에 몸을 싣자마자, 노라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내게 물었다.
“저건 엄연히 잘못된 행위예요. 애초에 현행법상 저 출판사가 삽화가를 독점할 권리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나도 알아.”
내 대답에, 노라가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여기서 계속 입씨름을 하고 있어 봤자, 저 사장이 순순히 삽화가와 연결해 주지는 않을 거잖아?”
“그, 그렇기는 하죠.”
“여기서 계속 죽치고 기다리면서, 사장과 삽화가가 만나는 현장을 직접 잡아낼 수도 없고 말이야.”
나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 첫째 아빠가 가르쳐 주신 대로 해야지.”
“네? 가주님께서 뭐라고 하셨는데요?”
“그런 게 있어.”
나는 지크프리트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 재수 없는 루돌프 자식이랑 싸웠던 그때, 분명히 말한 적이 있었다.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 오를레앙 공작가에서 막아 줄 테니까.’
‘가문의 권력이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거다.’
……라고 말이야.
“일단 집으로 가자, 노라.”
나는 노라를 향해 소악마처럼 씨익 웃어 보였다.
사장아, 딱 기다려.
이제는 오기가 나서라도, 네가 왜 그렇게까지 삽화가를 못 만나게 하는지 알아봐야 하겠으니까!
* * *
그날 저녁.
나는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마주했다.
바로 키리오스와 세자르였다.
“와아!”
나는 잔뜩 신이 나서 도도도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둘째 아빠랑 셋째 아빠는 웬일이에요?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티티 양이 눈에 아른거려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세자르가 상냥하게 대답하고,
“나 보고 싶었지, 꼬마?”
키리오스 또한 짓궂게 웃어 보였다.
“하…… 저 자식들이 또 왔어…….”
오로지 지크프리트만이 피로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나를 대할 때만큼은 지크프리트도 미소를 지었다.
“일단 손부터 씻고 와라. 식사해야지.”
“네!”
그리하여 손을 씻고 식당으로 돌아오자, 세 아빠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나도 식탁 앞에 앉았다.
평소라면 격식을 따져서 차례차례 음식이 나왔겠으나.
오늘은 모두 모여서 편안하게 식사하는 자리여서인지, 음식은 모조리 식탁에 차려 둔 상태였다.
“야, 꼬마.”
키리오스가 자연스럽게 내 앞의 스테이크 접시를 가져가며 입을 열었다.
“오늘 낮에는 타운하우스에 없던데, 웬일로 외출을 다 했네?”
“아, 출판사에 다녀왔어요.”
“출판사?”
스테이크를 작게 썰어 내며, 키리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동화책을 보다가, 마음에 드는 삽화가가 있어서 그 사람을 만나 보려고요.”
“굳이 출판사로 찾아가기까지 해야 해?”
키리오스가 작게 잘린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다시 내 앞에 놓아주며 되물었다.
“표지에 삽화가의 이름이 적혀 있을 거 아냐? 그 삽화가에게 직접 연락하는 게 빠를 텐데.”
“그게, 표지에는 이름이 없었거든요.”
“……이름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