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순간 키리오스가 미간을 좁혔다.
세자르가 내 잔에 물을 따라 주면서 미심쩍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아예 동화책에 삽화가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아뇨, 그건 아니고. 내지에만 조그맣게 적어 놨어요.”
나는 아쉬운 표정을 꾸며내며 대답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삽화가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가명이더라고요.”
순간 식탁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
“…….”
“…….”
지크프리트와 키리오스, 세자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됐다.’
나는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세 용사들은 다섯 마왕을 토벌하러 떠나며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은 사람들이다.
아마 인간들에게 제일 많이 뒤통수를 맞은 사람들도 용사들일걸?
그럼에도 끝내 인류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그들을 구원했다는 게 내 아빠들의 멋있는 점이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아빠들은 여러 가지 불합리한 상황을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거지.’
그래서 은근슬쩍 수상한 정황을 흘려 봤는데.
아무래도 벌써 이상을 눈치챈 것 같지?
“처음에는 필명인가 싶었는데, 사실 필명이라면 그 필명으로 삽화가를 찾는 데에 별 무리는 없잖아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니더라고요.”
“아니라니?”
“도무지 삽화가와 연락을 취할 수가 없어서, 노라에게 부탁해서 출판사까지 가 봤는데…….”
나는 보란 듯이 포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출판사 사장이 삽화가가 부탁해서 숨겨 주는 거라면서, 자기도 어쩔 수 없다고 막 화를 내더라고요.”
이제 세 아빠들은 진지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을 덧붙였다.
“아, 그래서 노라가 출판법 위반이라고 따졌어요. 엄청 멋있었어요!”
자, 보렴.
저 출판사가 여러모로 수상하단다.
심지어는 출판법까지 어겼다고!
“……그렇지. 삽화가의 이름이나 필명을 제대로 기재하지 않고, 가명으로 대체하는 건 출판법 위반이지.”
지크프리트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재차 내게 물었다.
“그래서 삽화가는 아예 만나 보지 못하고 돌아온 건가?”
“네에.”
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 방식…… 그거 아냐?”
키리오스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술을 떼었다.
“예, 그것 같군요.”
세자르가 고개를 끄덕여 키리오스의 말을 긍정했다.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가 듣고 있잖은가. 다들 말을 조심하도록.”
“그게 뭔데요?”
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세 아빠들을 바라보았다.
“저도 알고 싶은데.”
그러자 세 아빠들은 제각기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뭐, 아직 열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에게 사회의 어두운 면을 알려 주려니 좀 꺼림칙할 수도 있지.
하지만 말이지.
“솔직히 저도 그 출판사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아요.”
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노라가 말해 줬어요. 삽화가를 만나지도 못하게 하는 건 무척 수상한 일이라고요.”
미안해, 노라.
이번만 좀 팔아먹을게!
난 속으로 노라에게 사과하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제가 이번 일의 당사자인데, 어리다는 이유로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하고 넘어가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건…… 그렇기는 하지만.”
아빠들이 슬그머니 서로 눈치를 살폈다.
‘좋아, 거의 다 넘어왔어.’
나는 속으로는 흡족해하면서, 겉으로는 천진무구한 아이의 표정을 꾸며내어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것’이 뭔데요?”
자, 내가 출판사의 비리에 이렇게나 관심이 있단다.
그러니까 바닥까지 탈탈 털어 줘. 알았지?
* * *
며칠 후.
출판사로 가는 마차 안.
“우와, 이 사장 완전히 쓰레기였잖아?”
나는 질린 얼굴로 두툼한 서류뭉치를 넘겨보고 있었다.
내 손에 들린 서류는, 오를레앙 공작가의 정보원들이 몇 날 며칠을 정리해 준 물건이었다.
주제는 출판사의 불법과 비리.
식사 시간에 아빠들이 설명해 주기로, 저런 방식으로 미성년자를 착취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른인 것처럼 가명과 서류를 꾸며 두고, 미성년자에게 부당한 일을 시키는 것이다.
그 후 임금을 체불하는 경우가 잦다고.
애초부터 미성년자는 제대로 된 일을 구하기 어렵고, 제국법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작정하고 등쳐먹으려 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물론 우리의 억측일 수도 있다.’
‘맞아요, 정확히 살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랍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꼬마가 너무 마음 쓸 필요 없어. 알았지?’
내가 사회에 신뢰를 잃을 것이 걱정되었는지, 아빠들은 허둥지둥 말을 덧붙였으나.
‘뭐, 아빠들이 예상한 그대로였지.’
나는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까지 예상한 그대로 흘러가다니.
아빠들은 어떻게 아직도 인류애를 가지고 살고 있는 거지?
오늘만큼은 아빠들이 정말로 존경스럽다…….
“아가씨.”
때마침 노라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그냥 가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런 일은 어른들에게 맡겨 두어도 되지 않나요?”
“…….”
순간 나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라는 진심으로 나를 염려하는 눈빛이었으니까.
“아가씨께서 굳이 이런 험한 일을 하실 필요는 없는데…….”
노라는 못내 씁쓸한 기색이었다.
하기야, 어른들은 모두 저런 반응이었다.
아빠들도 내게 그랬거든.
차라리 이번 일은 아빠들이 해결하도록 두고, 나는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직접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왜냐하면…….
“그래도 이번 일을 시작한 건 나잖아.”
나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이번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는 것도 나여야 하지 않겠어?”
“가주님께서 잘 해결해 주실 거예요. 아가씨께서 무리하지 않으셔도…….”
“아니, 아빠들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야. 다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공작가의 조사에 따르자면, 니콜라스 무어라는 그 삽화가도 아직 미성년자라고 들었어.”
“…….”
노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서류에 기재된 니콜라스의 나이는 열일곱 살.
또한 제국 남성 기준으로, 성년은 스무 살이다.
그 말은 즉.
니콜라스는 아직 어른들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미성년자라는 소리다.
“아빠들은 내가 열 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를 보호해 주시려 하지만.”
“……아가씨.”
“그 삽화가는 여태껏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했잖아?”
내 말을 들은 노라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나 혼자 몸 편히 있다가, 결과만 전해 듣고 싶지는 않아.”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맺었다.
“그건 그 삽화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휴, 정말.”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노라가,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아가씨께서는 열 살이 아니라 어른 같으세요.”
“그, 그래?”
“그렇잖아요? 열 살짜리 아이들은 보통, 이런 어려운 서류들을 척척 이해하지 못하신다고요.”
노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게다가 말씀하시는 것도 너무 어른스러워서…….”
“아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인류를 구한 용사답게, 내 아빠들은 어린 시절부터 지나치게 비범했고.
그래서 열 살 나이답지 않은 내 행동에도 별달리 의심을 품지 않는 것 같지만.
노라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역시 내가 좀 이상해 보이나 보지?
“그래도 뭐,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요.”
노라는 이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아가씨께서 이렇게 다정한 분이셔서, 저는 정말 기뻐요.”
“…….”
그 상냥한 얼굴을 마주하며, 나는 조금 울컥했다.
아니야, 노라.
사실 나는 하나도 다정하지 않아.
세 용사들을 아빠로 삼은 것도, 라키어스와 친분을 쌓은 것도.
공작가의 사용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것도…….
‘모조리 내 생존을 위해서인걸.’
그 모든 말들을 꾹꾹 억눌러 담으며, 난 노라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나도 노라가 너무 좋아.”
* * *
잠시 후.
오를레앙 공작가의 마차가 출판사 건물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이쪽이에요, 아가씨.”
나는 노라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내 마차를 호위하던 호위 기사들이 내 옆으로 빈틈없이 따라붙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오늘은 지크프리트가 내게 호위 기사들을 두엇 붙여 주었다.
다만 호위 기사들이 크게 필요는 없을 것 같은 게…….
‘오, 벌써 치안대원들이 출동했네.’
누가 뭐래도 올곧은 용사들답게, 아빠들은 사적 제재는 하지 않았다.
대신 오를레앙 공작가에서 직접 출판사에 대한 비리를 조사했고, 수상한 정황과 증거까지 포함하여 치안국에 넘겼다고 들었었는데.
‘처음에는 출판법 위반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더 뒤져 보니 탈세를 한 정황도 발견됐다고 했지?’
의도적인 매출 누락과 과소신고였다.
그뿐이랴?
직원들의 월급까지 착복한 정황도 포착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