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하지만 사장은 뻔뻔했다.
“여동생을 먹여 살려야 한다며 울고불고 매달리기에, 제가 은혜를 베풀어서 기회를 준 거라고요!”
사장이 입에서 침을 튀기며 고래고래 외쳤다.
“오히려 제게 감사해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아니었으면 저 자식은 물론이고, 저 자식의 여동생까지 굶어 죽었을 텐데……!”
여동생.
그 단어에, 소년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나는 원작에 묘사된 니콜라스 무어의 가족관계를 되새겼다.
‘분명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 했었지.’
어렸을 적부터 힘든 시간을 서로 의지하여 이겨낸, 소중한 여동생 말이다.
하지만 그 여동생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여, 마침내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던 그때.
마족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했다.
‘아, 진짜 싫다.’
나는 입술을 꾹 당겨 물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근 10년 동안을 살아오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비록 이 세계는 소설 속일지라도.
적어도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진짜라는 것이다.
나는 이기적이어서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
내 이득을 위해 아빠들을, 라키어스를, 공작가의 사용인들과 친분을 쌓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나는 고개를 반짝 치켜들었다.
‘이왕 일이 이렇게까지 커졌으니, 니콜라스에게 유리하도록 몇 마디 말하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그러한 마음으로 나는 입을 열었다.
“저, 그래서 궁금한 게 있는데요.”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깡마른 소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혹시 저 사람이 니콜라스 무어인가요?”
니콜라스 무어.
그 이름을 듣자마자 소년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를 보며 나는 확신했다.
“맞나 보네요.”
“그. 오를레앙 공녀님. 잘못 보셨습니다, 저 녀석은…….”
사장이 중언부언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변명을 중간에서 끊어냈다.
“이상하지 않아요? 사장님께서는 분명 저 사람더러 은혜를 베푼다고 했는데.”
“…….”
“누군가를 감금하고, 그 누구도 못 만나게 가로막는 게.”
나는 사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은혜를 베푸는 일인가요?”
사장이 조가비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사장님도 알고 있잖아요. 사람이 저렇게 말랐는데도 신경조차 안 쓰고, 누군가의 작업물에 제대로 이름조차 적어 주지 않는 건…….”
아, 씨.
순간 나는 코끝이 맵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왕성에서 이래저래 구박받으며 갇혀 지냈던 때가 떠오르잖아?
그래서일까.
내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은혜가 아니라 착취라고 말해요.”
난 짧게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냐, 약한 모습은 그만 보여야지.’
내가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일수록, 어린아이라고 무시당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난 이제 아빠들의 보호 아래에 있는걸.
그러니까…….
‘더 이상 서러워할 필요 없어.’
아빠들을 떠올리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여동생까지 운운하면서 협박하는 거, 솔직히 치졸하지 않아요?”
“치졸하다니요!”
사장이 발끈하여 외쳤다.
“저런 천한 것들을 거둬 먹이고 있는데, 치졸하다니요? 나는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지만.”
조그마한 목소리가 울렸다.
니콜라스였다.
“사장님께서는 저에게 단 한 번도 그림값을 안 주셨잖아요.”
“야!!”
사장이 질겁하여 고함을 질렀다.
니콜라스는 흠칫 어깨를 굳혔으나, 그렇다 하여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창고를 빌려주는 비용이라고, 제가 삽화를 그리는 재료값이라고 말씀하셨으면서.”
“무, 무슨 헛소리야 지금?!”
“게다가 제 여동생도 일주일에 한 번밖에 못 만나게 하셨잖아요.”
니콜라스의 눈동자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제 여동생, 잘 돌봐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니콜라스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내 머뭇거리고, 기죽어 있던 모습은 간데없이.
눈물 고인 눈동자에는 분노와 원망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제, 제 여동생은…… 왜 자꾸만 뺨이 홀쭉해지는 거예요?”
“무슨 소리야? 내가 너희 남매를 얼마나 잘 챙겨 줬는데!!”
사장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려 했다.
그 꼴을 지켜보던 키리오스가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아, 우리 마탑 자식들보다 시끄러운 새끼는 처음 보네.”
합!
동시에 사장의 입이 아교를 바르기라도 한 것처럼 딱 달라붙었다.
“읍, 읍읍!”
사장은 기절할 것처럼 놀라 손톱으로 입술을 긁어 댔다.
하지만 입술은 도무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키리오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저 녀석의 증언이 옳은지, 사장 당신의 증언이 옳은지는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일이지.”
“으읍! 읍읍읍!”
“다만 돌아가는 꼴을 봐서는, 어째 미성년자 임금 체불 죄까지 더해질 것 같아?”
키리오스가 씩 웃었다.
어째 용사답지 않게 사악한 미소였다.
* * *
출판사는 그야말로 먼지 하나까지 탈탈 털렸다.
공작가와 황가의 세무국, 그리고 치안국이 본격적으로 달라붙어 조사하기 시작하자.
수많은 내부 고발들이 이어졌다.
‘알고 보니 직원들도 피해자였지.’
상습적인 임금체불과 회사 내 위계에 의한 폭력이 있었다고.
정말, 저 출판사가 여태까지 어떻게든 굴러갔던 게 신기하다…….
니콜라스와 그 여동생은 일단은 오를레앙 공작가에서 거두기로 했다.
어째 생각보다 일이 무척 커진 것 같지만.
‘그래도 대부분 잘 풀린 것 같지?’
다만, 내 마음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는데.
“휴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마왕성의 풍경이 뇌리에 아른거렸다.
내가 갇혀 있던 조그만 골방.
나를 비웃고 조롱하던 다섯 마족들.
그리고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해, 마족들의 비위를 맞추며 생글생글 웃던 나 자신.
‘아니야.’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난 그 골방에 갇혀 있던 무력한 꼬마가 아니야.
그러니까…….
“……아나.”
“…….”
“타티아나.”
“네, 네?!”
화들짝 놀란 내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크프리트는 물론이고, 세자르와 키리오스까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점심을 굶었다지?”
“아, 그냥 배가 안 고파서요.”
“그래도 끼니를 거르면 안 되지.”
지크프리트가 내게 머그컵 하나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들고 보니, 마시멜로를 띄운 진한 코코아였다.
평소 내가 가장 좋아하던 간식이기도 하다.
“일단 이거라도 마셔라. 저녁식사는 거르면 안 된다, 알았지?”
“……네.”
나는 괜히 머그컵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닿는 따스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키리오스가 냉큼 대화에 끼어들었다.
“근데 왜 꼬마는 코코아에 커다란 마시멜로를 꼭 한 개씩 띄워 마셔? 그렇게 마시면 맛있어?”
뭐야, 저걸 어떻게 알았지?
나는 놀란 토끼눈이 되어 되물었다.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당연한 걸 묻네?”
키리오스가 장난스럽게 내 머리를 헝클어 놓았다.
“너는 우리 딸이잖아.”
“…….”
“원래 아빠들은 자식이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지금 기분이 어떤지…… 다 궁금한 거야.”
나는 멍하니 키리오스를 올려다보았다.
아빠와 딸.
어째서일까.
지금 이 순간, 별것도 아닌 저 단어들이 사무치게 와 닿는 이유는.
“키리오스, 티티 양의 머리가 다 헝클어졌잖습니까.”
한편 세자르가 키리오스를 타박하며 내게로 손을 뻗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 정돈해 주면서, 세자르가 상냥하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 티티 양은 왜 이렇게 우울한 표정일까요?”
“…….”
순간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받는 것을 느꼈다.
아주 조금은 이야기해도 되지 않을까.
이 사람들은 나를 딸로 여겨 준다고 하니까.
아빠라고 말해 줬으니까…….
“……저는 마족과 인간의 혼혈이잖아요.”
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빠들이 언젠가 저를 미워하게 되면 어떡해요?”
“…….”
“…….”
“…….”
순간 적막이 내려앉았다.
혹시나 내가 무언가 잘못 말한 걸까.
살그머니 세 아빠들의 눈치를 살피던 나는, 불현듯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세 아빠의 표정은…….
참담했으니까.
“티티 양.”
세자르가 무릎을 꿇고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질문을 던진다.
“갑자기 그런 생각은 왜 하게 됐나요?”
“저는, 그러니까…….”
나는 말끝을 흐렸다.
원작에서 니콜라스가 마족들에게 여동생을 잃었고.
나는 사실 남자주인공이 처단할 이 세계의 최종보스, 마왕이며.
당신들은 인류를 수호하는 용사들이었으니.
언젠가 내 정체가 드러난다면, 당신들은 나를 혐오하게 될 거라고…….
차마 내 입으로 그렇게 고백할 수는 없었으므로.
“혹시 니콜라스 군 때문인가요?”
“…….”
나는 움찔했다.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 같아.’
그리고 내 침묵을 세자르는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