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아무리 내가 열 살짜리 꼬맹이일지라도 그렇지.
라키어스도 아직 열네 살밖에 안 된 어린 소년이잖아?
그런데도 벌써부터 저렇게 압도적이라니…….
그만큼 라키어스가 출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거겠지?
그러나.
“동작이 너무 크군.”
지크프리트는 그 자리에 미동조차 없이 선 채, 평온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카각!
목검과 목검이 맞부딪치며 살벌한 소리를 냈다.
아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라키어스의 목검이 찔러 들어오는 궤적을 막아낸 것이다.
그리고.
쿠당탕!
뒤로 밀려난 라키어스가 형편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지크프리트가 짧게 혀를 찼다.
“동작은 최소한으로, 힘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그런 건 스승님이나 가능한…… 어, 티티?”
숨을 헐떡이며 투덜거리던 라키어스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탓이었다.
지크프리트가 날 돌아보며 싱긋 눈매를 휘어 보았다.
“타티아나, 웬일로 여기까지 다 왔지?”
라키어스를 대할 때와는 달리 솜털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저 태연한 모습을 보아하니, 내가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기척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지?
나는 냉큼 두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라키가 어떻게 공부하는지 구경하려고 왔어요.”
“……그래?”
순간 지크프리트가 묘하게 시무룩해졌다.
‘아차.’
나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첫째 아빠가 어떻게 라키를 가르쳐 주는지도 궁금했고요!”
“…….”
그제야 지크프리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에효, 정말.’
속으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나는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여기 수건이랑 물이랑, 초콜릿도…….”
무심결에 챙겨 온 물건들을 쥐어 주려던 내가 멈칫했다.
“……근데 첫째 아빠는 어차피 이런 거 필요 없죠?”
땀은커녕 아주 말짱한 얼굴이잖아?
그러자 지크프리트가 정색을 하며 내 손에서 물건들을 받아갔다.
“아니, 필요하다.”
“그, 그래요?”
그래, 당사자가 필요하다면야…….
나는 떨떠름한 얼굴이 되어 라키어스에게로 다가갔다.
“자, 라키도 이거 받아.”
“아, 고마워.”
라키어스는 수건을 받아서 땀투성이인 얼굴부터 닦았다.
꽤 목이 말랐는지, 물통을 반 이상이나 비워 낸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내가 지크프리트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둘째 아빠랑 셋째 아빠는요?”
“왜, 꼬마.”
내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무그늘에 느긋하게 퍼져 있던 키리오스가 손만 번쩍 들어 올렸다.
얼굴에는 마법서적이 아무렇게나 덮여 있었다.
“그새 내가 보고 싶었어?”
……저 책, 공부하려는 용도가 아니라 햇빛을 가리는 용도인 것 같지?
나는 오묘한 표정이 되었으나, 그것도 잠시.
“그럼요!”
난 키리오스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자 키리오스가 얼굴을 덮은 책을 슬쩍 밀어 올리면서, 씩 눈웃음을 지었다.
“잘 있었어?”
“네!”
“오랜만에 보네요, 티티 양.”
키리오스 곁에서 서류를 넘겨 보던 세자르도, 나를 향해 상냥하게 인사했다.
“아빠들은 여기서 뭐 해요?”
“일단은 우리도 라키어스의 스승이니까요. 지크프리트와 라키어스의 대련을 살펴보고 있었어요.”
세자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뭐, 아직까지는 라키어스를 한참 더 굴려야 할 것 같지만…….”
“…….”
순간 저 멀리 연무장에 주저앉아 있던 라키어스가, 흠칫 몸서리를 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난 아련한 시선으로 라키어스를 응시했다.
‘정말, 네가 고생이 많다…….’
때마침 키리오스가 뚱하니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꼬마는 지크프리트랑 라키어스만 간식 챙겨 주는 거야?”
“에이, 그럴 리가요!”
나는 어깨에 메고 온 동그란 손가방을 앞으로 꺼냈다.
그 안으로 냉큼 손을 집어넣는다.
“아빠들 간식도 당연히 있죠!”
용사들과 다년간 살아오면서, 나는 항상 여분의 간식을 챙겨 다니는 버릇이 생겼다.
무심코 한 사람만 챙겨 줬을 때의 후폭풍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몇 번이나 몸소 체험했거든.
예를 들자면…….
‘같은 아빠라면서 이렇게 차별하는 거야?’
‘티티 양에게 간식을 받고 싶었으면 평소에 잘했어야죠.’
‘세자르, 그만 좀 깐족거려라. 그래서 타티아나, 내 간식은 어디에 있지?’
……이런 종류의 사태 말이다.
“초콜릿이 좋아요, 사탕이 좋아요?”
“아무거나 줘.”
키리오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감싸인 사탕 한 알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냉큼 껍질을 깐 키리오스가, 입 안에 사탕을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와락 미간을 찌푸린다.
“으, 달아.”
거참, 달콤한 간식들은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왜 저렇게 내가 주는 간식들은 못 받아서 안달일까?
참고로 세자르는 간식들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금빛 포장지로 감싸인 초콜릿을 골라 갔다…….
그렇게 제각기 입에 단것을 물고 있자니, 연무장에서 쉬던 라키어스와 지크프리트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라키어스, 아무래도 훈련을 좀 더 늘려야 할 것 같은데요? 자꾸 어깨가 비네요.”
세자르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적시를 함으로써 폭행을 가했고.
“그것뿐이야? 보니까 당황할 때마다 허리도 무너지더라. 예전부터 그 버릇 고치라고 했지?”
키리오스가 세자르의 말에 덧붙여 핀잔을 주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라키어스는 의욕적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난 라키어스가 움직이는 모습조차 제대로 못 봤는데.
저 사람들은 언제 저 약점들을 다 발견한 거람?
거참 용사들의 동체시력이란…….
나는 내심 감탄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는 나무그늘에 모여 앉아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야, 라키어스. 넌 언제쯤이면 지크프리트 옷깃이라도 건드려 볼래? 빠져가지고.”
“이번에는 키리오스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군요.”
“물론 버릇을 고치는 게 어렵다는 것쯤은 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좋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나?”
한참 동안 온갖 잔소리와 조언을 늘어놓아서, 라키어스의 기력을 탈탈 털어 버린 끝에.
세 아빠들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티티 양.”
세자르가 사르르 눈매를 접으며 내게 말을 붙였다.
“요새 티티 양의 사업이 무척 호황이라고 들었는데요.”
“아빠들도 그렇고, 여러 사람들이 저를 도와준 덕택이죠.”
일단 겸손한 대답부터 내어놓은 후.
나는 방긋 미소 지었다.
“근데 그거 아세요? 아빠들 스티커가 제일 인기가 많아요.”
“그, 그런가요?”
세자르는 다소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네. 그래서 말인데, 아빠들을 모델로 한 새 스티커를 내려고 하거든요. 괜찮을까요?”
“티티 양에게 도움이 된다면야 딱히 거절할 생각은 없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세자르가 진지하게 내게 되물었다.
“……그게 과연 팔릴까요?”
“당연하죠!”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아빠들은 아빠들의 인기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요.”
“티티 양, 그건…….”
“아마도 제 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빠들의 인기 때문일걸요?”
내 단호한 대답에, 세 아빠들은 차마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들도 직접 서점에 가 봤으니까.
불티나게 팔리는 위인전과, 유독 인기가 높았던 세 용사들의 스티커들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더랬지.
다만 괜히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아무래도 부끄러운가 보지?’
나는 장난스러운 시선으로 아빠들을 바라보았다.
정말, 우리 아빠들도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내가 다섯 마왕을 처단하여 인류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용사들이라면, 온갖 특혜를 누리면서 떵떵거리며 살 텐데.
아빠들은 용사라는 이유로 소소한 혜택을 받는 것조차 부정적이었다.
하기야, 저렇게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건가?
그런데 그때.
“티티.”
라키어스가 결연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 열심히 하려고. 열심히 해서…….”
라키어스가 힘을 주어 선언했다.
“언젠가는 나도 티티의 스티커 목록에 들어갈 거야! 그래서 판매고를 올려 줄 거라고!”
“…….”
으응, 그래…… 응원할게…….
나는 흐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키리오스가 짓궂은 표정으로 라키어스의 정수리를 왁왁 짓눌러 댔다.
“네가 우리들과 같은 급으로 올라서겠다고? 꿈 깨라, 요 녀석아.”
“왜요? 저도 할 수도 있죠!”
그리고 난, 두 사람이 저렇게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처음 라키어스를 만났을 때만 해도, 저렇게 투덜거리고 오기를 부리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의 라키어스는 그저 평범한 열네 살짜리 소년처럼 보여서…….
“키리오스, 애 데리고 지금 뭐 하나?”
한편, 보다 못한 지크프리트가 키리오스를 만류했다.
키리오스가 킥킥 웃었다.
“요 녀석은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아, 스승님!”
라키어스가 발끈했다.
한숨을 푹 내쉰 지크프리트가 라키어스를 불렀다.
“그보다, 라키어스.”
“예?”
“요새 황궁에서 무언가 힘든 점은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