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
순간 나는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난 아빠들의 저런 점이 좋았다.
라키어스를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어린아이로 생각해 주고.
라키어스의 생활을 면밀히 살피며, 불편한 점이 없는지 물어봐 주는 것 말이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우리들의 주변에는, 저러한 정상적인 어른이 너무나도 적었으니까.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라키어스가 대답했다.
“음…… 요새 황비 마마께서 기분이 상당히 저조하시기는 한데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기분이 저조하시다고? 왜?”
그러자 라키어스가 햇빛을 함빡 머금은 꽃송이처럼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야 티티의 위인전이 엄청나게 대성공했으니까요.”
“티티의 위인전은 왜…… 아.”
허를 찔린 지크프리트가 두 눈을 깜빡였다.
“설마, 카롤링거의 위인들을 선정해서 그런 건가?”
“맞습니다. 황비께서 다소 신경질적으로 저를 대하시기는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라키어스는 앓던 이를 빼기라도 한 것처럼 시원한 얼굴이었다.
“이제 제국에서는 카롤링거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요. 저는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하기야, 최근 제국에서는 옛 카롤링거 왕국에 대한 호감도와 인지도가 상당히 올랐다.
위인전을 통해, 카롤링거 국왕들의 영웅적인 행보를 알게 되어서였는데.
‘세상에, 카롤링거에서 이런 일들이 있었군요.’
‘정말 훌륭하네요.’
‘카롤링거에서 마족을 막아 주지 않았더라면, 마족들이 제국 본토까지 침범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 호감은 자연스럽게 라키어스에게로 향했다.
뭐, 사실 당연한 일이다.
라키어스는 데카르트 황실의 적장자이자 카롤링거 왕실의 유일한 후손이었으니까.
다만 어떻게든 카롤링거의 공헌을 덮어 두고자 했던 데카르트 황실에서는, 지금쯤 상당히 속이 쓰릴 텐데…….
“이게 모두 티티 덕입니다.”
“물론 내 딸 덕이지.”
지크프리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거기에 세자르와 키리오스도 득달같이 가세한다.
“위인전에 카롤링거의 위인까지 포함시켰다니, 우리 티티 양은 정말 사려가 깊군요.”
세자르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야, 라키어스. 너 우리 꼬마한테 빚 진 거다?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갚아, 알았어?”
키리오스는 냅다 라키어스에게 핀잔을 주었다.
뭐, 아빠들이 숨 쉬듯 내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 건 이미 익숙하지만.
그래도 익숙하다고 해서 낯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었기에.
“그, 우리 이만 타운하우스로 돌아갈까요?”
나는 애써 화제를 돌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말 한 마디에, 네 남자들은 군말 없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킨다.
‘후후.’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 * *
타운하우스로 돌아오는 길.
나는 현관에서 집사 아저씨를 마주쳤다.
“어서 오십시오.”
집사가 정중하게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막 타운하우스로 배달된 우편물을 인수했는지, 팔에는 수북하게 우편물이 든 가방을 끼고 있었다.
아마도 저 우편물들을 분류하여 각 주인에게 넘겨주겠지만…….
‘뭐, 다 지크프리트 거겠지.’
나는 신경을 껐다.
그런데.
“저, 타티아나 아가씨.”
“응?”
뜻밖에도 집사는 나를 불렀다.
“이번에 아가씨에게 온 초대장이 하나 있습니다.”
“……내게?”
난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나는 지금 친구라고는 라키어스밖에 없다고.
그런데 누가 나한테 초대장을 보낸단 말이야?
초대장의 발신인을 확인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잠깐, 기베르티 백작영애라고?’
기베르티 백작가.
예전에 오를레앙 타운하우스의 총괄 관리인을 맡았던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의 가문이다.
참고로 기베르티 백작영애는 백작대부인의 손녀였다.
내가 백작대부인의 비리를 고발하여, 그녀를 타운하우스에서 날려 버렸던 일을 계기로.
여태까지 지크프리트와 기베르티 백작 일가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는데…….
<오를레앙 공녀님께.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기베르티 백작가의 리즈벳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저희 타운하우스에서 또래 레이디들을 모시고 조촐하게나마 티파티를 갖고자 합니다.
부디 공녀님께서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시면 기쁘겠습니다.>
초대장 안에는 상당히 멋을 부린 글씨체로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 내용을 대충 흘려 읽던 나는, 순간 두 눈을 부릅떴다.
<또한 오를레앙 노공작님께서도 저희 기베르티에 머무르고 계신답니다.
이번 기회에 공녀님께서도 노공작님을 한 번 찾아뵙는 게 어떠신지요?
오를레앙 공작께서도 함께 방문해 주신다면 정말 기쁘겠습니다.
그럼 공녀님의 답신을 간곡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존경을 담아, 리즈벳 기베르티.>
‘뭐어? 존경을 담아?’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초대장을 내려다보았다.
존경을 담는다는 사람이, 이렇게 속이 빤히 보이는 편지를 보낸단 말이야?
비록 수신인 자체는 나였으되, 실제로 이 편지가 노리고 있는 사람은 지크프리트였다.
그리고 편지의 목적은 아주 노골적이었다.
‘노공작님을 빌미 삼아, 지크프리트에게 서로 이쯤에서 화해하자고 압박하는 거지.’
오를레앙 노공작.
지크프리트의 아버지.
내게 있어서는 할아버지 되는 사람으로,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은 노공작님의 여동생이 된다.
지크프리트가 다섯 마왕을 토벌하러 떠났던 동안, 오를레앙 노공작은 물심양면으로 공작령을 보살폈다고 했다.
‘다만…… 노공작님과 지크프리트는 무척 사이가 나쁘다고 했었지.’
초대장을 움켜쥔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오를레앙 노공작이 아들의 타운하우스가 아니라, 기베르티 백작가에 머무르고 있는 것 자체가.
부자 사이의 오래된 불화를 외부에 드러내는 것인데도…….
‘노공작님께서는 그를 감수하고 기베르티 백작가로 가신 거잖아.’
그러고 보면, 지크프리트가 인간계로 돌아온 지도 벌써 6년이 흘렀는데.
지크프리트와 노공작님이 서로 교류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편지 한 통조차 오간 적 없다.
그리고 그 빈틈을 기베르티 백작가가 교묘하게 파고든 것이다.
‘기베르티 백작가와 연을 끊은 지도…… 벌써 6년째지?’
그런 상황에서, 아쉬운 쪽은 당연히 기베르티였다.
듣기로는, 기베르티 측에서 몇 번이고 지크프리트와 연락을 취하려 했으나.
지크프리트가 칼같이 거절했다고.
‘그러니 이번 기회를 통해, 지크프리트와 화해하려 하는 거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부이신 노공작님께서 모처럼 제도까지 올라오신 상황이었다.
그러니 지크프리트도 외부의 시선을 고려해서라도, 기존처럼 냉정하게 굴지만은 못할 터.
‘기베르티는 정말 한결같네. 음험하기는…….’
내가 속으로 쯧쯧 혀를 차고 있던 그때.
지크프리트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건 뭐지?”
“아, 기베르티에서 온 초대장이에요.”
“……기베르티라고?”
순간 지크프리트의 눈동자에 바짝 날이 섰다.
“그 뻔뻔한 작자들이 감히 네게 초대장을 보냈다고?”
지크프리트가 사납게 되물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다.
나는 할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어서 무척 기쁜 아이다…….
‘좋아.’
난 지크프리트를 향해 최대한 해맑게 웃어 보였다.
“그게, 이번에 오를레앙 노공작님께서 기베르티 백작가에 머무신다고 해요!”
순간 지크프리트가 멈칫했다.
“……아버지께서?”
“네! 그래서 기베르티 백작영애가 저를 초대해 줬어요! 저랑 노공작님이랑 만나 보라고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키리오스와 세자르는 물론이고, 라키어스마저 은근히 지크프리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설마, 아직 나이가 어린 라키어스까지 두 부자 사이의 불화를 알고 있는 거야?
어째 노공작님과 지크프리트의 관계는,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나쁠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이건 기회야.’
나는 마음을 굳게 다져 먹었다.
기베르티가 지크프리트와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이번 초대장을 보낸 거라면.
나도 그를 역으로 이용해 줄 생각이었다.
‘강제로라도 두 부자를 서로 마주하게 만들어야 해.’
그래서 대화라도 몇 마디 나눌 수 있으면 더 좋고 말이다.
‘언제까지나 노공작님과 지크프리트의 관계가 파탄이 난 채로 둘 수는 없어.’
왜냐하면 사실, 두 부자는 내심 서로를 무척 아끼고 있었으니까.
다만 솔직하게 대화할 기회가 없어서 매번 엇나갔을 뿐.
그 증거로, 원작의 외전에서 묘사되기를.
지크프리트는 사망하기 직전에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내가 먼저 아버지께 다가가 볼 것을.’
노공작은 전형적으로 엄격한 아버지였다.
지크프리트는 자신을 낳으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랬기에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그러던 중.
마족이 인간계를 침공했다.
마족들은 카롤링거를 포함한 여러 소왕국들을 짓밟으면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고.
지크프리트는 인류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다.
‘가지 마라!’
노공작은 절박하게 지크프리트를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