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이대로 떠난다면,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닌 줄로 알겠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무척 실망했다.
‘아버지께서는 단 한 번도,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존중해 주시지 않는군요.’
‘뭐?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됐습니다. 아버지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어요.’
지크프리트는 아버지를 외면하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끝내 서로에 대한 앙금을 풀지 못한 채, 지크프리트는 숨을 거두게 된다.
한편 노공작은 제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절망한다.
‘지크프리트가…… 죽었다고?’
노공작은 지크프리트의 관을 붙든 채, 뜨거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내 아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해 준 적 없었는데…….’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후.
노공작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은 바로 지크프리트였다.
다만, 오를레앙의 차기 공작은 오로지 지크프리트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노공작은 지크프리트를 일부러 더 엄하게 길렀다.
노공작의 꿈은, 지크프리트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자라서 가문을 이어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노공작의 속을 썩인 적 없던 아들은, 인류를 위해 제 목숨을 불살랐고.
끝끝내 인류를 지켜냈다.
다만 그 자신은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을 뿐.
그리하여 노공작도 병을 얻어서 일찍 죽고.
오를레앙 공작가의 작위는, 지크프리트의 사촌인 기베르티 백작가에게로 넘어갔다는 흐름인데.
그 외전을 읽으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역시 지크프리트와 노공작님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고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지크프리트를 올려다보았다.
“첫째 아빠도 저랑 같이 가 주실 거죠?”
“타티아나, 나는…….”
지크프리트가 곤란한 기색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게, 저 혼자서 기베르티에 가는 건 조금 무섭거든요.”
나는 보란 듯이 양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은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그렇지만 노공작님은 꼭 뵙고 싶어요.”
“…….”
“노공작님은 제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기도 하잖아요.”
나는 가슴에 손을 모으며 간절하게 말을 이었다.
“정말로 안 될까요? 네?”
내 끈질긴 공세에, 결국 지크프리트는 두 손을 들었다.
“……알았다.”
“와, 신난다!”
나는 일부러 더 신이 난 척, 지크프리트의 팔을 꽉 끌어안으면서 환호했다.
지크프리트는 억지로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 * *
그 후.
라키어스는 땀을 씻으러 갔고, 타티아나는 제 방으로 돌아갔다.
“야, 지크프리트.”
키리오스가 은근슬쩍 지크프리트에게 말을 붙였다.
“너 아직도 노공작님이랑 화해 안 했냐?”
“…….”
지크프리트가 불만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정말, 애도 아니고 언제까지 다투고 있으려고요?”
세자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사람 모두 고집이 장난이 아니군요. 꼭 그런 식으로 아버지와 아들 티를 내야겠습니까?”
“아니, 난…….”
“됐습니다. 그보다, 아무래도 티티 양은 노공작님과 지크프리트의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은데.”
세자르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티티 양이 불편하지 않도록 잘 처신하도록 해요. 알겠습니까?”
“……후우, 그래야지.”
지크프리트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감쌌다.
사실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아버지가 오랜 시간 얼굴조차 보지 않고 지냈던 건, 그저 그의 사정일 뿐.
어른들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아이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
때마침 세자르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이번에 기베르티 백작가에서 또래의 레이디들도 초대했다고 했죠?”
“그렇다고 하더군.”
“슬슬 티티 양도 사교계에 얼굴을 비칠 시기라고 생각했는데, 잘됐군요.”
입으로는 ‘잘됐다’라고 말하면서도, 세자르는 다소 묘한 표정이었다.
“다만 초대한 쪽이 기베르티 백작가라는 건…… 영 마음에 안 들지만요.”
최근 몇 년간,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은 지크프리트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이리 뛰고 저리 뛰었었다.
다만 지크프리트가 워낙에 완강했기에, 큰 성과는 없었는데.
“혹시 기베르티 백작가에서 따로 사과를 전한 적은 있나요?”
“있을 것 같나?”
“역시.”
세자르가 차게 웃었다.
정말로 서로 교류를 재개하고 싶었더라면, 정중한 사과가 먼저일 터다.
하지만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은 사과 대신 제 손녀를 방패막이 삼아 초대장부터 보냈다.
이번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손녀가 초대장을 보내면, 거절하기에 다소 껄끄러우리라.
그런 얄팍한 계산속이 돋보였다.
그뿐인가?
오를레앙 노공작을 언급하여, 지크프리트가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나.
“뭐, 귀족들이 다 그렇죠.”
세자르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체면이 조금이라도 깎이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아요. 한심하기는.”
순간 지크프리트가 다소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그, 세자르. 일단 나도 귀족이기는 한데…….”
“누가 그걸 모릅니까? 그래서 당신도 노공작님과 말도 안 되는 기 싸움을 하고 있잖습니까.”
“…….”
세자르의 통렬한 지적에, 지크프리트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키리오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보다, 요새 귀족 여자애들은 서로서로 조그만 사교 모임을 주최하는 게 유행이라며?”
타티아나의 아버지가 된 이래로.
세 용사들은 여자아이의 성장 과정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부한 바로는, 귀족가의 영애들은 일고여덟 살부터 서로서로 교류를 시작한다고 했다.
가볍게 티타임도 하고, 얼굴도 익히고, 드물게는 마음에 맞는 친구를 사귀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교계 특유의 분위기에 적응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쌓인 경험과 인맥은, 추후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할 때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사실 꼬마는…… 다소 늦은 감이 있지.”
키리오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예전에 비해 몸이 건강해졌다지만, 아직 마기 폭주라는 복병도 있기도 하고.”
“…….”
“…….”
세자르와 지크프리트는 나란히 침묵했다.
마기 폭주.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세 용사들은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통째로 삼킨 것처럼 심장이 서늘해지고는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아이의 몸속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숨겨져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뭐, 내 말은.”
키리오스는 뒤늦게 활기찬 표정을 꾸며내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사교계 데뷔를 위한 준비를 시작해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소리야.”
사교계 데뷔.
세 용사는 입 안으로 그 단어를 곱씹었다.
성년식과 함께, 귀족 레이디가 성년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행사.
타티아나가 사교계에 데뷔한다는 건, 적어도 그때까지 마기 폭주에 휘말려 목숨을 잃지 않았다는 거고.
무사히 어른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요, 그렇겠네요.”
세자르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 타티아나는 데뷔탕트 무도회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레이디일 거다.”
지크프리트도 맞장구를 쳤다.
부디 타티아나가 마기 폭주 문제를 극복하고,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행복해지기를…….
세 용사는 간절히 바랐다.
* * *
그 시각, 기베르티 백작가의 타운하우스.
“들어 보세요, 오라버니.”
기베르티 백작 대부인은 잔뜩 인상을 쓰며 오를레앙 노공작을 바라보았다.
“마계에서 주워 왔다는 천한 계집애가 오를레앙 공녀라니. 이게 말이나 되나요?”
“…….”
노공작은 대답 없이 차만 홀짝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작 대부인은 열을 내며 험담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오를레앙 공작께서도 어떻게 제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저는 공작님의 고모잖아요!”
순간 노공작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찰캉.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은 노공작이, 서늘한 시선으로 백작 대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따지자면, 너야말로 어떻게 조카에게 그럴 수가 있느냐?”
“제, 제가 뭘요!”
“나도 눈과 귀가 있다.”
노공작의 냉정한 대답에, 백작 대부인이 움찔 어깨를 굳혔다.
“오를레앙의 타운하우스에서 네가 한 짓들은, 나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소리다.”
“그, 그건……!”
“사용인들에게 모질게 굴고, 사용인들에게 배정된 예산을 착복했다지?”
노공작의 주름진 눈매 안으로 짙은 감정이 어렸다.
한심함이었다.
“내가 따로 너를 질책하지 않은 건, 지크프리트가 이미 확실하게 잘잘못을 가렸다고 생각해서였다.”
“오라버니!”
“하지만 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게 아닌지 회의감이 드는구나.”
기베르티 백작 대부인은 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노공작이 미간을 좁히며 재차 되물었다.
“애초에 그럴 거라면 왜 그 타티아나라는 아이를 초대한 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