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너무 걱정 마세요, 공녀님께서는 이제 제 모임의 일원이 되셨는걸요.”
“…….”
이제는 대답도 하기 싫다.
난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공녀님의 사교계 데뷔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예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요.”
아주 커다란 은혜를 베풀어주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래도 참아줄 수 있었다.
마계의 노예시장에서 머물렀던 3년, 그리고 마왕성에서 살아왔던 1년.
장장 4년 동안, 나는 싫은 소리를 대충 흘려버리는 기술을 갈고 닦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기베르티 백작영애는 자꾸만 선을 넘으려 들었는데…….
“그보다, 저는 공녀님이 정말로 부러워요.”
갑자기?
난 뚱한 시선으로 기베르티 백작영애를 응시했다.
“솔직히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잖아요?”
“……동화요?”
“그럼요. 다섯 마왕을 토벌한 인류의 영웅과, 마계 밑바닥을 전전하던 아이의 만남!”
백작영애가 들으란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는 그 영웅이 아이를 구원해 주었잖아요?”
“…….”
순간 나는 얼음물을 끼얹은 양, 머리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백작영애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가 듣기로, 오를레앙 공작님께서는 동정심이 무척 많으시다 들었어요. 아마도 그 선량한 마음씨 덕택에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거겠죠?”
백작영애가 흘끗 나를 곁눈질로 바라보더니, 빙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공녀님께서는 정말 운이 좋으신 분이세요.”
얼핏 듣기로는 좋은 말 같지만.
실제로 저 말을 잘 뜯어보면 이런 뜻이 된다.
‘너는 지크프리트의 동정심 덕택에 공녀가 되었을 뿐, 실제로는 지크프리트와 피도 이어지지 않은 남남이야.’
‘네가 공녀가 된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니까, 공녀입네 하며 잘난 척하지 마.’
“후우.”
나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기베르티 백작영애께서는 정말 상냥하신 분이네요.”
나는 백작영애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와 함께, 백작영애의 얼굴 위로 희미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선명한 비웃음이었다.
“어머나,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백작영애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아마 내가 제 비꼬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듯하다.
당장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위기인지, 입술 끝이 제멋대로 씰룩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백작영애께서 제게 해 주셨던 말씀은 우리 아빠에게도 꼭 전해 드릴게요.”
순간 기베르티 백작영애가 덜컥 굳어졌다.
“네?”
“그렇잖아요. 이렇게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 저만 알고 있는 건 너무 아쉽잖아요.”
나는 보란 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아빠도 백작영애가 무척 상냥한 분이시라는 것을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저만 믿으세요.”
“아, 아니. 그러실 필요까지는…….”
“왜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여태껏 기베르티와 오를레앙이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잖아요.”
나는 해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기베르티 백작영애께서 제게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고 말씀드리면, 두 가문 사이의 앙금이 풀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괘, 괜찮습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공녀님께 그렇게 부담을 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백작영애가, 횡설수설하며 나를 만류하려 들었다.
“부담이라니요, 제가 꼭 전해 드리고 싶어서 그런 건데요.”
“아니에요. 어른들의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으음, 저는 역시 말씀드리는 편이…….”
“공녀님, 정말로 괜찮아요!”
이제 백작 영애는 거의 울어 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흡족한 눈빛으로 백작 영애를 바라보았다.
이 얘기가 지크프리트의 귀에 들어간다면, 가문 간의 갈등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기껏 오를레앙 공작가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오늘 만남을 추진한 건데, 그러기는커녕 더 관계가 악화될 거라는 소리다.
‘만약 이 얘기가 외부로 새어 나가면 어떨까?’
나는 사악하게 두 눈을 빛냈다.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이 얼마나 곤혹스러워할지, 그 모습이 기대되는데…….
“있잖아요, 기베르티 백작영애.”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기베르티 백작영애를 불렀다.
백작영애가 마른침을 삼키며 나를 마주보았다.
“아무래도 백작영애께서는 저를 바보 멍청이로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고, 공녀님.”
“바보 멍청이는 역시 어른들에게 의지해야만 하지 않겠어요?”
내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백작영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가, 이내 새하얗게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지속되고.
“…….”
“…….”
결국 패배한 쪽은 기베르티 백작영애였다.
백작영애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어요.”
“…….”
나는 용서한다는 대답 따위는 하지 않았다.
대신 사르르 눈매를 접어 내리며 화제를 돌렸다.
“레이디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요. 티룸으로 안내해 주겠어요?”
“…….”
노골적인 무시였다.
백작영애는 분한 얼굴로 잘근잘근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나 지은 죄가 있기에, 차마 내 행동에 반발하지는 못했다.
“……안내하겠습니다.”
뭐, 잘됐어.
이렇게 약점을 하나 잡아 두었으니, 적어도 나를 귀찮게 하는 일은 좀 줄어들겠지?
* * *
그 후.
티룸을 처음으로 본 내 감상은…….
‘뭐, 꽤 신경을 쓰기는 했네.’
예쁜 찻잔과 찻주전자, 식기, 갖가지 티푸드까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티타임이었다.
다만 조금은 고루한 느낌이었는데.
‘너무 어른들의 티타임을 따라한 것 같잖아.’
뭐, 귀족 레이디들의 티타임이야 그게 그거기는 하지만.
그래도 노라가 속성으로 강의해 준 바에 따르자면.
어린 레이디들이 주로 참석하는 이런 자리는, 티푸드나 차를 아이들의 입맛에 맞춰 내놓는다고 했다.
그런데.
‘오이 핑거 샌드위치라니, 저거 좋아하는 애들 하나도 못 봤는데.’
심지어 음식을 가리지 않는 라키어스마저도 은근히 싫은 티를 낸다니까?
티타임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내 나이 또래, 아니면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정도의 레이디들이었다.
열두어 살에서 많으면 열네다섯 살 정도?
기베르티 백작영애가 가장 나이가 많아 보였고, 나는 제일 어린 축에 속했다.
“앗, 오셨어요?”
“언제 오실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우리가 티룸 안으로 들어서자, 어린 레이디들이 제각기 반가운 얼굴로 우리를 반겼다.
백작영애는 부러 콧대를 높이며 나를 돌아보았다.
“네, 그리고 이분은 제가 초대한 오를레앙 공녀님이세요.”
제가 초대한.
백작영애는 그 말에 부러 힘을 주었다.
마치 나를 초대한 게, 자신의 뛰어난 수완 덕택이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 대단하네.’
나는 떨떠름하게 백작영애를 바라보았다.
우리, 티룸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실컷 신경전을 벌였지 않아?
그런데도 어떻게든 나를 이용해 먹으려 들다니.
정말 그 근성만큼은 칭찬한다…….
그러나 백작영애가 나를 소개한 그 순간.
레이디들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헉, 공녀님께서 오셨다고요?”
“안녕하세요, 공녀님!”
“이렇게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레이디들의 시선이 모조리 내게로 고정된 것이다.
심지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떻게든 내게 말을 붙여 보려 애쓰는 레이디들도 있었다.
그러자 기베르티 백작영애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레이디들에게 타박을 주었다.
“다들 왜 이리 수선이에요? 자리에 앉아요.”
“아…….”
레이디들이 슬쩍 백작영애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머쓱하게 자리에 앉는다.
‘오호라?’
나는 슬쩍 백작영애의 찌푸려진 얼굴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 모임에서는, 기베르티 백작영애가 왕 노릇을 하고 있었나 보네.’
왜 그런지는 대충 이해가 갔다.
황가에는 황녀가 없었고, 황비의 가문인 필로멜 후작가에는 현재 자식 자체가 없었기에.
실질적으로 몇 명 안 되는 백작가의 영애들이, 제국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레이디 취급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기베르티 백작영애는, 인류를 구원한 세 영웅 중 한 명인 오를레앙 공작의 혈연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특별대우를 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있지.’
지크프리트가 직접 양녀로 들인 나 말이다.
그 자체로, 이제 백작영애는 ‘용사의 혈연’이라는 특별한 위치를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지크프리트는 제국 유일의 공작으로, 나 또한 공녀의 지위를 가진다.
아마 그래서 레이디들의 관심이 모조리 내게로 쏠린 듯한데.
뭐, 이왕 분위기가 이렇게 형성됐다면.
‘당연히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이용해 줘야겠지?’
나는 음험하게 두 눈을 빛냈으나,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 아빠들의 인기는 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던 것이다…….
“저어, 공녀님.”
레이디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그녀의 눈동자는 기대감으로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이번에 공녀님께서 오를레앙 공작님과 함께 오셨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헉, 오를레앙 공작님이라고요?”
그러자 다른 레이디가 두 눈을 휘둥그레 하게 뜨면서 이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