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공작님께서 타운하우스에 방문하셨다고요?”
“네, 제 보호자로 오셨어요.”
“세상에, 정말요?!”
저도 모르게 새된 목소리를 낸 레이디가, 얼굴을 붉히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죄, 죄송해요. 사실 제가 용사님들을 한 번 뵙는 게 꿈이었거든요.”
그러자 다른 레이디들이 입을 모아 동조했다.
“저도요.”
“앗, 실은 저도…….”
그렇게 레이디들은 모조리 꿈꾸는 듯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공작님께서는 다섯 마왕을 토벌하신 영웅이잖아요.”
“정말 멋있지 않아요?”
가슴 위로 손을 모아 잡거나, 발그레해진 양 뺨을 양손으로 그러쥐면서.
레이디들이 설레는 목소리로 제각기 말을 덧붙였다.
“공작님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마 전 황홀해서 기절해 버릴 거예요.”
“기절뿐이에요? 저는 숨을 쉬는 방법조차 잊어버릴지도 몰라요!”
기, 기절?
숨을 쉬는 방법을 잊어버려?
나는 기베르티 백작영애의 기를 눌러주겠다는 생각조차 잊고,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저, 공녀님.”
기베르티 백작영애가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오이 샌드위치를 좀 드셔 보시겠어요? 무척 맛있답니다.”
뭐야, 뜬금없이 나를 생각해 주는 척하기는.
아무래도 주도권이 내게 쏠려 있는 게 영 거슬리나 보다.
이렇게라도 대화에 끼어들려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건 좋다 이거야. 그래도 최소한 눈치는 있어야 하지 않아?’
하필이면 수많은 티푸드 중에서도 오이 샌드위치라니.
나는 오이가 싫단 말이야!
어쨌든,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만으로도.
여태까지 백작영애가 얼마나 편하게 이 티타임에서 왕 노릇을 해 왔는지 알 것 같다.
저보다 높은 신분인 나조차 이렇게 눈치 없이 대하는데, 다른 레이디들을 대할 때에는 오죽하겠어?
하지만 나는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이만하면 레이디들의 관심도 충분히 빼앗았으니, 주최자인 기베르티 백작영애의 면도 조금 세워 줄 생각이었다.
솔직히 백작영애가 기분이 상하든 말든 그 자체는 전혀 상관없지만…….
‘오늘은 노공작님도 계시니까 조심해야지.’
기베르티 백작영애는 노공작님의 종손녀였다.
혹시 종손녀가 홀대당했다는 이유로, 노공작님께서 내게 나쁜 감정이라도 품게 될 수도 있잖아?
그러한 계산으로, 나는 기베르티 백작영애에게 살갑게 몇 마디 말을 붙였다.
“이 테이블의 꽃 장식 말이에요, 정말 예쁘네요.”
“그래요? 하녀들을 닦달한 보람이 있군요.”
기베르티 백작영애는 득달같이 콧대를 세웠다.
뭐, 그래도 기분은 조금 풀린 것 같다.
그렇게 이대로 평화롭게 티파티가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으나…….
‘아, 이런.’
난 다소 난감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티타임의 화제는 자꾸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으니까.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하건대, 절대로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었다.
내가 주도하는 사업 또한 아이들 전체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는 게 원인일 뿐.
“오를레앙 공작님 하니까 생각났는데, 저 이번에 공작님의 위인전을 읽었거든요.”
“공작님의 위인전이라면, 그 만화 위인전 말이죠?”
레이디 한 명이 신이 난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 그거요. 정말 재밌지 않나요?”
“맞아요. 특히 공작님께서 다섯 마왕을 토벌할 때의 그 결연한 모습이란!”
“휴, 너무 멋있어요…….”
나는 애써 레이디들의 재잘거림을 못 들은 척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크프리트가 다섯 마왕을 토벌하는 부분은 모조리 창작이었으니까…….
당시 나는 마왕성 골방에 갇혀 있었는걸.
어떻게 다섯 마왕을 토벌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겠어?
그러던 중.
레이디 한 명이 시무룩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레이디들은 혹시 스티커들은 다 모으셨나요?”
“아뇨, 아직요…….”
“특히 세 용사님들의 스티커는 한 장도 못 봤어요. 이거 정말 있기는 한 거예요?”
그때 다른 레이디가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후후, 전 세자르 님의 스티커가 있지요!”
그러자 레이디들이 휙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렸다.
선망의 눈초리로 말을 꺼낸 레이디를 바라본다.
“저, 정말이에요?”
“그럼요. 게다가 최근에는…….”
레이디는 어깨를 우쭐거리며 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손바닥만 한 씰북을 꺼내어, 혹여나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씰북도 받았답니다!”
“씰북이라고요?”
“저도 갖고 싶었는데!”
레이디들은 곧장 씰북에 붙어 있는 스티커 구경 삼매경에 빠졌다.
심지어는 기베르티 백작영애마저도 힐끔거리며 씰북을 곁눈질로 바라볼 정도였다.
특히 세자르를 캐릭터화한 스티커를 보면서, 레이디들은 그야말로 부럽다 못해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저도 이번 신년 선물로 위인전 전집을 사 달라고 하려고요.”
“아직 신년은 한참 남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시간이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지.”
조잘조잘 대화를 나누던 레이디들이 어린 새처럼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흐뭇하게 그런 레이디들을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고객님들.
고객님들 덕택에 제 독립자금이 좀 더 풍요로워졌습니다…….
다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기베르티 백작영애였다.
“…….”
기베르티 백작영애는 한참을 분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거리더니, 괜히 날 선 목소리로 한 레이디를 불렀다.
“일마즈 남작영애.”
그 부름에, 레이디 한 명이 화들짝 놀라 백작영애를 돌아보았다.
기가 약해 보이는 순한 얼굴, 조그마한 체구.
어딘지 모르게 조그마한 초식동물을 연상시켰다.
“네, 네!”
“뭐 해요? 차 안 마시고.”
백작영애가 턱으로 찻잔을 까닥이며 명령조로 말했다.
“이 차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나 알아요? 아마도 일마즈 남작영애는 이런 고급 차는 처음 마셔 볼 텐데요.”
“…….”
그 말에, 일마즈 남작영애가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도 백작영애의 억지에 한 마디 화조차 내지 못한다.
그저 외나무다리를 걷는 양 조심스럽게 대답할 뿐.
“저어, 차가 아직 제 입에는 너무 뜨거워서요. 조금만 식으면 마실 테니…….”
그러자 기베르티 백작영애가 당장에 도끼눈을 떴다.
“지금 내 말에 말대꾸하는 거예요?”
“아,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차가 너무 뜨겁다는 건, 내가 물 온도조차 제대로 못 맞춘다고 돌려서 지적하는 것 아닌가?”
그러자 일마즈 남작영애가 사색이 되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뜨거운 것을 잘 못 마셔서 그래요. 정말이에요.”
적어도 내 눈에는 거짓말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 전부터 일마즈 남작영애는 차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차를 한 모금 마셔 본 후, 흠칫 놀라더니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만 계속 찻잔을 흘끔거리는 모습이, 찻물이 적당히 식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 성의를 이렇게 무시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기베르티 백작영애는 도도한 얼굴로 재차 트집을 잡았다.
“정말 실망이에요. 모처럼 신경 써 준 보람이 하나도 없네요.”
“…….”
뭐야, 저건 화풀이 아닌가?
상황을 관찰하던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히 기베르티 백작영애가 왜 저러는지는 뻔할 뻔 자였다.
자신이 티타임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싶었는데, 느닷없이 내가 레이디들의 관심을 독차지해 버린 게 기분이 나쁜 거겠지.
하지만 나에게 대놓고 시비를 걸기에는 켕기는 게 많았을 거다.
아까 전에 내가 잡아 두었던 약점도 있거니와, 공녀라는 내 신분도 껄끄러울 터.
그러니까 괜히 일마즈 남작영애에게 화살을 돌린 거겠지.
일마즈 남작영애는 딱 봐도 유순한 성격인 데다가, 오늘 티파티의 참석자들 중 가장 신분이 낮다는 약점도 있었으니까.
‘정말 졸렬하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한편 일마즈 남작 영애는 허둥지둥 찻잔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앗!”
나직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다급하게 움직이던 서슬에, 찻잔이 흔들려 찻물이 흘러넘친 것이다.
일마즈 남작영애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제 앞섶을 내려다보았다.
가슴팍 위로 찻물이 다갈색 얼룩을 남겼다.
그나마 가을용 드레스였기에 옷감 자체가 도톰하여, 다행히도 화상은 입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
그래도 남작영애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격식 있는 자리에 입고 나가는 드레스는 상당히 비싸다.
비록 본격적인 파티용 드레스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웬만한 집안에서는 드레스 한 벌을 맞추는 것 자체가 꽤 부담이 된다.
게다가.
‘아까 기베르티 백작영애가 그랬었지.’
나는 흘끗 백작영애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이 차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나 알아요? 아마도 일마즈 남작영애는 이런 고급 차는 처음 마셔 볼 텐데요.’
……라고 했었다.
보통 상대방에게 모욕을 줄 때, 가장 아픈 부분을 공격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마 일마즈 자작가의 재정 상황으로는, 비싼 드레스를 마음껏 살 수 있는 능력이 안 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