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어휴, 조심 좀 하지.”
기베르티 백작영애가 들으란 듯이 혀를 쯧쯧 찼다.
“정말, 칠칠치 못하게…….”
“…….”
일마즈 남작영애가 입술을 꾹 당겨 물었다.
나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아, 진짜 못 봐 주겠네.’
솔직히 신경 쓰였다.
사실 일마즈 남작영애는, 저렇게까지 화풀이 당할 필요도 없었는데.
‘왠지 나 때문에 저렇게 곤란해진 것 같단 말이지.’
게다가 저렇게 구박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내 마왕성에서의 삶이 떠올랐다.
나를 괴롭히는 자들의 눈치를 살피며,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그 시절 말이다.
지금은 세 용사의 보호 아래에서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그 누구도 나를 괴롭히지 못하는데…….
‘됐어, 굳이 예전 일을 떠올려서 뭐 해?’
나는 우울한 생각을 애써 털어냈다.
이럴 시간에, 차라리 일마즈 남작영애를 도와주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난 보란 듯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들으란 듯이 중얼거린다.
“이 차, 너무 뜨거운데요?”
“…….”
“…….”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레이디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온통 쏠렸다.
“…….”
나는 약간 입이 썼다.
일마즈 남작영애가 곤란에 처해 있을 때에는, 레이디 중 그 누구도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저 기베르티 백작영애의 눈치만을 살필 뿐.
마침내 내가 행동할 때에야,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이 온다는 건…….
‘얼마나 백작영애가 레이디들을 들들 볶았으면 저런담.’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옆자리에 앉은 레이디에게 차를 권했다.
“레이디, 이것 좀 마셔 볼래요?”
뜻밖의 제안에 레이디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이 차, 좀 뜨겁지 않나요?”
실제로 그렇게까지 뜨겁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입장이고, 뜨거운 것을 못 먹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불편할 수 있는 온도였다.
나는 일부러 더 호들갑을 떨면서 말을 이었다.
“정말, 찻물이 이렇게 뜨거울 줄 몰랐어요. 혀를 덴 것 같아요.”
“아, 그, 그게.”
레이디는 반사적으로 기베르티 백작 영애 쪽을 돌아보았다.
백작 영애가 제대로 대답하라는 것처럼 두 눈을 부라려 보였다.
레이디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
‘으음, 레이디에게는 좀 미안하긴 한데…….’
솔직히 이미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제국 유일의 공녀, 그리고 일개 백작가의 레이디.
그 자체만으로도 저울이 기울어져 있는데.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나는 세 용사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 하는 양딸이잖아?
결국 내 예상대로 레이디는 내 말에 동조했다.
“네, 너무 뜨겁네요…….”
순간 백작 영애가 두 눈을 부릅떴다.
‘뭐, 왜, 뭐?’
기베르티 백작영애도 자기 신분을 이용해 억지로 일마즈 남작영애를 깔아뭉갰는데.
역으로 똑같이 당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해 봤나 봐?
나는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마즈 남작영애.”
“네, 네?”
남작 영애가 당황하여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내 어깨에 걸쳤던 숄을 벗어서 남작영애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래도 아침 날씨는 쌀쌀하다고, 첫째 아빠가 숄을 꼭 걸치고 가라고 고집을 부렸었는데.
이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네.
“고, 공녀님?”
남작 영애가 얼떨떨하게 나를 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숄을 꼼꼼하게 여민 후 에메랄드 브로치로 숄을 고정시켰다.
숄 아래로 차 얼룩이 웬만큼 가려졌다.
“이거 선물로 줄게요.”
“……네? 선물요?”
남작 영애가 기겁을 했다.
“어떻게 처분하든 남작 영애 마음대로 해도 돼요.”
참고로 내 숄과 브로치는 꽤 고급이다.
아마 이것들을 팔면, 새 드레스 한 벌 정도는 거뜬히 장만할걸?
“하, 하지만.”
“대신 공짜는 아니에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저, 지금부터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갈 생각이거든요.”
순간 기베르티 백작영애의 얼굴이 흉험하게 구겨졌다.
아무래도 티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나이가 어린지라, 암묵적으로 산책 등 바깥 활동을 하는 시간을 정해 둔다.
어린 레이디들이 오래 자리에 앉아 있는 건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통 그 시간을 정하는 건 티타임의 주최자, 혹은 신분이 가장 높은 레이디다.
보통은 티타임의 주최를 배려하여 그를 양보하고는 하는데…….
‘내 알 바는 아니지.’
나는 기베르티 백작영애의 흉흉한 표정을 깔끔히 무시해 버렸다.
백작영애는 비록 사납게 날 쏘아볼지언정, 내게 제대로 항의를 하지는 못했다.
아까 전 ‘마계 밑바닥을 전전하던’ 운운했던 게 찔리긴 한가 보지?
하지만 저런 눈초리는 역시 부담스러웠기에.
“백작영애. 혹시 제게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어요?”
나는 장난스럽게 백작영애에게 말을 붙였다.
파드득 정신을 차린 백작영애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 아닙니다.”
“그래요? 저를 하도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시기에, 할 말이 있으신 줄 알았어요.”
“…….”
백작영애는 못내 분한 표정이었다.
‘아마 꽤 약이 오르나 봐?’
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지그시 억눌러 참으면서, 일마즈 남작영애를 돌아보았다.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샜네요. 일마즈 남작영애가 산책하는 동안 제 말벗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말벗이요?”
“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조금 지겹거든요. 몸이 찌뿌둥한 것 같기도 하고요.”
일마즈 남작영애가 멍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난 방긋 눈매를 휘어 보였다.
“그 정도는 부탁해도 되죠?”
“…….”
순간 일마즈 남작영애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서, 설마 우는 건 아니지?!’
나는 기겁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남작영애는 우는 대신,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공녀님!”
뭐, 아마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산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베르티 백작영애와 거리를 벌릴 수도 있을 테고.
내가 계속 옆에 붙어 있을 테니, 백작영애가 심술을 부리기도 어렵겠지.
그런데 그때.
“저, 공녀님.”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레이디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나가실 거라면, 저희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저희도 슬슬 답답하던 참이었는데.”
나는 힐끔 곁눈질로 기베르티 백작영애를 바라보았다.
질투와 분노, 그리고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질투심.
수많은 감정이 엉망으로 얽혀 있는 그 얼굴을 보자니, 그야말로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나, 은근 성격이 나쁠지도……?’
속으로 자기반성을 하면서, 나는 화사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었다.
“그럴까요? 우리 다 같이 산책 갈까요?”
“네!”
“얼른 가요!”
고작해야 열 두어 살짜리 여자아이들이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모습은 무척 귀여웠다.
‘이것 참, 뭔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기분인데.’
나는 그렇게 레이디들을 인솔하여 밖으로 빠져나갔다.
* * *
그 시각, 정원.
기베르티 백작 대부인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오를레앙 노공작을 빌미로 지크프리트와 다시 만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두 사람이 사이가 나쁠 줄은 몰랐지!’
물론 지크프리트와 오를레앙 노공작 사이에, 오랫동안 불화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자신이 중재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지크프리트와 관계도 회복하리라는 계산속이었는데…….
‘아니, 둘이 떨어져 지낸 지도 거의 5년이 넘었잖아.’
백작대부인은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아직도 감정이 누그러들지 않았단 말이야?’
두 사람이 어찌나 싸늘했는지, 아이들의 보호자로 온 다른 귀족들까지 눈치를 볼 정도였고.
보다 못한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이 두 부자를 밖으로 끌고 나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재.
지크프리트와 노공작은 서로를 외면하며, 벤치 위에 멀찍이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완고한 표정을 지은 모습이 서로를 쏙 빼닮았다.
먼저 말문을 연 쪽은 노공작이었다.
“지크프리트.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제게요?”
지크프리트는 정말로 의외라는 양,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그 방어적인 태도에, 발끈한 노공작이 언성을 높였다.
“내가 할 말이 있다는 게 그렇게 이상해? 너는 내가 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그딴 식으로 구느냐?!”
“…….”
그러나 지크프리트는 더 말하기도 싫다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 따름이었다.
다시 한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그때.
“아빠!”
발랄한 목소리가 울렸다.
지크프리트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 멀리 타티아나가 도도도 달려오고 있었다.
양 갈래로 묶은 분홍 머리카락이 꽃잎처럼 나풀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