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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68)화 (69/163)

<69화>

다만.

‘그래도 그 아이가 있으니까.’

해사하게 미소 짓던 아이를 떠올리자, 노공작의 입술 위로 처음으로 미소가 어렸다.

노공작은 느긋하게 안락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 * *

아무래도 외출 때문에 피곤했는지, 타티아나는 일찍 잠들었다.

‘오늘 타티아나에게 못난 모습을 보였군.’

지크프리트는 오늘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들 부자의 불화 때문에, 아이가 괜히 눈치를 보게 한 것 같아서.

못내 미안했다.

“아버지.”

지크프리트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뵌 아버지는 예전보다 조금 나이가 든 것 같다.

꼬장꼬장한 모습은 그대로였으나, 이마에 패인 주름이 조금 더 깊어졌다.

‘이번에는…… 타티아나에게 신세를 졌어.’

사실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타티아나가 먼저 노공작을 초대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노공작에게 끝내 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마 제가 먼저 연락할 용기가 없었으니까.

그 말은 즉.

타티아나가 아이 특유의 천진함으로, 노공작과 지크프리트를 자연스럽게 연결해줬다는 뜻이다.

‘그 애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지크프리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안쪽으로 타티아나의 웃는 얼굴이 아른거린다.

마음이 평온해졌다.

* * *

그리하여 이틀 후, 야유회 당일.

아침임에도 사위는 어두컴컴했다.

어제부터 날씨가 꾸물거린다고 생각했었는데.

공기가 축축한 것을 보아하니 간밤에 가을비가 왔던 것 같다.

여러모로 야유회를 열기에는 부적절한 날씨였으나, 내 마음은 걸리는 것 없이 아주 가뿐했다.

“잘 잤나, 타티아나.”

약속 시간을 칼같이 맞춰 나온 지크프리트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 또한 지크프리트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첫째 아빠!”

“날이 꽤 쌀쌀하구나. 옷을 탄탄하게 입고 나가라.”

“네, 그럴게요!”

나는 얼른 몸을 씻고, 하녀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하얀 바지와 종아리까지 오는 긴 부츠, 몸에 꼭 맞도록 재단된 재킷까지.

모조리 노라가 며칠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골라 놓은 사냥복이었다.

그런데 왜 야유회에 사냥복을 입고 오냐고?

그야 오늘의 야유회는 단순히 차와 디저트나 하하호호 즐기는 날이 아니니까.

기베르티 백작영애가 나에게 대놓고 장갑을 던졌으니, 나도 충실히 맞받아쳐 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야유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한편, 다른 방법도 알차게 써먹어 주려고 한다.

그 방법 중 하나.

내게 주어진 제국 최고의 인맥들을 이용하기.

‘기베르티 백작영애는 정원도 안 되고, 온실도 안 된다고 제약을 걸어 놨었지.’

그렇다면 날씨와 기타 요소에 개의치 않을 수 있는 외부 장소로 가면 된다.

그 장소는 바로…….

‘마탑이지.’

정확히는 마탑 주변의 마법실험을 위한 빈 공터다.

거기에 키리오스의 환상 마법이라면, 실체와 똑같은 풍경을 구현하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니까.

‘둘째 아빠, 야유회를 열고 싶은데 장소를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그렇게 대마법사와의 인맥을 알차게 써먹었고,

‘물론이지. 우리 꼬마에게 평생 잊지 못할 야유회 장소를 제공해 주마.’

키리오스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키리오스가 지나친 의욕을 보이며 폭주하는 바람에.

레이디들이 야유회를 할 법한 예쁜 숲이 아니라, 군인들이 훈련하기에도 전혀 모자람 없는 어마어마한 숲이 만들어졌다…….

‘마탑주님, 이 험한 숲에서 어떻게 레이디들이 야유회를 하나요!’

……참고로 그 엄청났던 숲은 노라의 불호령에 의해 말끔히 정리되었다.

어쨌든 노라와 키리오스는 내 야유회가 완벽하게 치러져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했는지, 어느 순간 의기투합해서 함께 돌아다녔다.

‘공녀님의 야유회라고요?’

‘그럼 저희도 한 손 보태겠습니다.’

……거기에 왜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은근슬쩍 끼어들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자.”

“네!”

나와 지크프리트는 마탑으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움직이는 동안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지더니, 마침내 굵은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했다.

솨아아-.

차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와, 이런 날에 야유회라니.

키리오스의 도움을 받지 못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는데?

‘역시 세상은 인맥이 다라니까.’

속으로 음흉하게 웃기를 한참.

‘어라?’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분명, 마차가 투명한 막 같은 것을 통과한 것 같았는데……?

나와 눈이 마주친 지크프리트가 툭 말을 뱉었다.

“막 결계를 지나쳤다.”

동시에 나는 기적을 보았다.

“……와아.”

부슬부슬 쏟아지던 을씨년스러운 가을비는 간데없었다.

가을 특유의 화창한 날씨가 나를 반겼다.

마침내 마차가 멈추고.

“자, 이리 오거라.”

지크프리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결계를 기점으로 하늘 빛깔이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한쪽은 비가 쏟아지는 회색 하늘, 다른 쪽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그 선명한 대비가 눈이 부시다.

야유회가 열릴 숲에 미리 와서 점검하던 노라가, 지크프리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러고는 웃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장소는 마음에 드세요?”

“응! 너무 좋아!”

나는 폴짝거리며 노라의 품 안에 뛰어들었다.

햇빛을 가려 주는 화려한 천막과, 어린 레이디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판판하게 다져 둔 땅.

그리고 푹신한 의자와 예쁜 테이블까지.

야유회 준비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솔직히 웬만한 귀족가의 티룸을 통째로 옮겨 와도, 이것보다 훌륭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무려 마탑주님께서 내 티파티를 위해 공간을 내준 거잖아?’

나는 음험하게 두 눈을 빛냈다.

그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알아서 상상력을 발휘할 거다.

아마도 ‘마탑주가 타티아나 공녀를 무척 오냐오냐한다’ 정도의 소문이 나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세 용사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질수록, 그 누구든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터.

때마침 노라가 황홀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우리 아가씨는 사냥복도 잘 어울리시네요.”

“그래애?”

나는 보란 듯이 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아 보였다.

“다 노라가 골라 줘서 그렇지. 고마워.”

“아뇨, 다 우리 아가씨가 귀여우셔서 그래요.”

그러자 노라가 정색을 했고,

“노라의 말이 옳아. 옷도 옷걸이가 훌륭해야만 멀쩡해 보이는 법이다.”

지크프리트도 냉큼 말을 거들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부디 노라의, 그리고 지크프리트의 눈에 씐 콩깍지가 오래오래 유지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던 중.

나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익숙한 두 사람을 발견했다.

‘역시 인맥이 최고라니까.’

다소 아이답지 못한 계산적인 생각을 하면서, 나는 커다랗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빠들!!”

연회는 보통 참석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격이 결정된다.

‘그리고 이번 내 야유회에는 무려 세 용사들이 참석했지.’

어떻게 보면 황제보다도 윗줄에 놓으려면 놓을 수 있을 거물들이 다 참석했다 이거야.

참고로 세 용사들은 황제의 연회에도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기로 그 소문이 자자하다.

그 말은 즉.

내 야유회는 어찌 보면 황제가 주관한 것과 비견될 정도로 격이 높다는 뜻 아니겠어?

“어때, 꼬마. 야유회 장소는 마음에 들어?”

키리오스가 피로한 얼굴로 내게 씩 웃어 보였다,

쪽잠을 자다 나온 듯 부스스해진 긴 장발과 귀에 꽂은 깃펜, 그리고 구깃거리는 옷까지.

아무래도 키리오스는 마탑 일에 야유회 준비까지 더해져서, 상당히 고생한 듯하다.

……으음, 이거 좀 미안한걸.

“타티아나 양의 첫 야유회라니 저도 빠질 수는 없지요.”

게다가 세자르도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방문해 주었고.

“그럭저럭 야유회 준비는 잘 된 것 같군.”

지크프리트는 오늘을 위해 아마 3일간 철야한 것으로 안다…….

‘티티, 설마 나를 빼놓을 건 아니지?’

사실 라키어스도 이번 야유회에 참석하고 싶어 했는데.

‘라키어스, 어디서 은근슬쩍 끼어들려 하죠?’

세자르가 정색을 했다.

‘제가 내 드린 과제는 다 끝내셨나요?’

‘아, 그건…….’

라키어스가 억울한 얼굴로 무어라 항변하려 했으나,

‘검술 훈련도 잊지 말도록. 완벽하게 끝냈는지 기사들에게 확인할 테니까.’

지크프리트가 엄격하게 말을 덧붙였고.

‘마력 제어 연습도 잊지 않았지?’

거기에 키리오스까지 얄밉게 깐족거렸다.

‘…….’

느닷없이 과제의 산에 파묻힌 라키어스는 그만 넋 나간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러한 사유로, 라키어스가 오늘 야유회에 올 수 있을지 어떨지는 알 수가 없다.

‘요새 라키 얼굴을 본 지도 좀 된 거 같은데. 아빠들도 이런 때에는 훈련 한번 빼 주면 덧나나?’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다가 얼른 표정을 정돈했다.

“오늘 야유회 장소를 마련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꼬마가 별말을 다 하네.”

키리오스는 별것 아닌 것처럼 그렇게 대답하는가 싶더니,

“……그런데 어디가 마음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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