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아, 안녕하세요.”
“오를레앙 공작님, 이렇게 뵙게 되어…….”
한편 기베르티 일가는, 떨떠름한 얼굴로 뒤늦게나마 대화에 끼어들려 했으나.
때마침 다른 두 용사가 노공작님에게 아는 척을 해 왔다.
“안녕하십니까, 노공작님!”
키리오스가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고,
“몸 건강히 잘 지내셨습니까?”
세자르도 살갑게 말을 붙였다.
노공작님이 주름진 눈매를 휘며 미소 지었다.
“그래, 다들 오랜만이군.”
아무래도 노공작님과 키리오스, 세자르는 구면인 듯하다.
“미리 인사 드렸어야 하는데, 이렇게 뒤늦게 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세자르가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노공작께서 지원해 주신 물자와 병력들 덕택에 끝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던 건 반은 노공작님 덕이라니까요?”
키리오스가 냉큼 말을 거들었다.
그러자 노공작님이 조금 민망한 얼굴을 했다.
“아닐세, 당연히 지원해야지. 더 해 주지 못해서 부끄럽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희야말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그렇구나.
나는 순간 깨달았다.
데카르트 황실에서 세 용사들에게 아무런 도움조차 주지 않고, 뒤로 물러나기만 하던 때.
세 용사들을 유일하게 지원해 준 사람이 바로 노공작님이었구나.
“앞으로 우리 꼬맹이 좀 잘 부탁합니다. 예?”
키리오스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노공작님께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괜히 새치름하게 고개를 돌려 버리셨다.
“쓸데없는 말을 다 하는군. 설마하니 내가 저 어린 것을 괴롭히기라도 하겠나?”
……뭐, 어쨌든.
노공작님께서 나를 딱히 싫어하시는 건 아닌 것 같지?
그것만으로도 성공적이었다.
나는 세 아빠들과 노공작님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전 다시 돌아가 볼게요!”
“재밌게 놀고 와요, 티티 양.”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꼬마, 뭔가 불편한 게 있으면 당장 나한테 말해. 알았지?”
아빠들이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오늘 야유회, 잘 해 보거라.”
노공작님께서도 머쓱하게나마 내게 응원을 해 주셨다.
나는 레이디들에게로 돌아가면서, 힐끔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뭐야,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은 투명인간 취급이잖아?’
야유회 장소에 도착한 이래로, 기배르티 백작대부인은 입술 하나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처지는 백작영애도 그리 다르지 않아서.
‘어라?’
나는 멈칫 발을 멈추었다.
레이디들 사이에서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왜 기베르티 백작영애가 혼자 있지?’
레이디들이 저들끼리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 데 반해, 기베르티 백작영애는 홀로 떨어져 있었다.
왕처럼 군림하던 평소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그래서일까, 기분이 아주 저조해 보인다.
‘왜 저러지?’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문득 레이디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리 세 용사님과 공녀님께서 친분이 있다 하시지만, 이렇게 야유회에까지 참석해 주실 줄이야.”
“아마도 공녀님의 보호자로 오신 거겠지요?”
“공녀님을 무척 아끼시나 봐요.”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기베르티 백작영애의 티타임보다 오늘이 훨씬 나아요.”
“맞아요. 세 용사님들을 직접 뵐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한가요?”
아무래도 기베르티 백작영애는 안 그런 척하면서 레이디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나 보다.
표정이 점점 더 험상궂게 구겨지는 것을 보면 말이야.
나는 힐끔 세 아빠들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뭐, 내 세 아빠들을 데려온 건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던 것 같지?’
아빠들이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백작영애의 기분을 꾸준히 바닥으로 처박을 수 있다니.
완전 고소하잖아?
나는 속으로 음흉하게 웃으며 레이디들에게 말을 붙였다.
“오늘은 이왕 야외로 나왔으니, 다 함께 야외에서 할 수 있는 놀이를 해 보는 건 어떨까 해요.”
“놀이요?”
레이디들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아무리 다 큰 귀부인처럼 굴어 봤자, 눈앞의 소녀들은 고작해야 열네다섯 살짜리 청소년들이었다.
매번 차와 다과만 즐기면서, 재미도 없는 대화를 하하호호 하는 게 지루하지 않을 리 없다.
그리고 나는 그 부분을 노린 것이다.
“하기야 요새 매번 차만 마시며 앉아 있었으니까…….”
“좀 지겹기는 했어요. 그렇죠?”
레이디들이 제각기 동조했다.
기베르티 백작영애는 분한 얼굴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바로 직전의 티파티는 백작영애가 주최한 거였으니까.
아마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레이디들의 저런 평 자체가 백작영애의 티파티를 저격한 것이나 다름없는걸?
‘하지만 내 알 바 아니지.’
백작영애의 저조한 기분을 모른 척하며, 나는 레이디들에게 제안했다.
“보물찾기 어떠세요?”
“보물찾기요?”
레이디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네. 제가 여러 가지 보물들을 숨겨 두었는데, 1등 상품은…….”
“1, 1등 상품은요?”
레이디들의 두 눈에 기대감이 가득 차올랐다.
나는 밝은 목소리로 선언했다.
“세 용사님들의 스티커 3종 세트와, 한정판 씰북입니다!”
그 순간 난 보았다.
레이디들의 눈동자에 광기가 감도는 모습을.
“세 용사님들의…… 스티커 3종 세트라고요?”
레이디들이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이 흡사…….
“방금 공녀님께서 한정판 씰북이라고 하셨죠?”
“정말이죠? 정말로 1등만 하면, 스티커 3종 세트와 씰북을 가질 수 있는 거죠?”
“어떻게든 1등을 해야만, 꼭…….”
……좀비 같은데?
나는 나도 모르게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 * *
“비켜요, 제가 먼저 갈 거예요!”
“어머, 왜 이래요? 먼저 보물을 찾는 사람이 임자죠!”
레이디들은 그야말로 두 눈이 뒤집어져서 숲속으로 흩어졌다.
홀로 뒤에 남겨진 기베르티 백작영애는, 두 눈에 날을 세우며 레이디들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모두가 즐거워 보였다.
오로지 백작영애 자신만이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다.
‘고작해야 스티커와 씰북 따위에 정신이 팔려서는…….’
백작영애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정말, 바보 같아!’
백작영애는 잔뜩 성질을 내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모든 게 짜증스러웠다.
타티아나 계집애가 왕 노릇을 하는 것도.
대마법사가 펼친 결계 덕택에, 빗방울 하나조차 떨어지지 않는 완벽한 티타임 장소도.
숲에서 보물찾기를 하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불편한 이 사냥복까지도!
그러면서도 백작영애의 눈은 연신 풀숲과 바위 아래며 나무 그늘 따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딘가에 종이쪽지가 하나라도 숨겨져 있지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는데.
‘헉.’
순간 백작영애가 헛숨을 들이쉬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상품에 홀리는 것 자체가, 타티아나 고 계집애에게 놀아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때.
턱.
“뭐야?!”
백작영애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발밑에서 드레스 자락을 확 잡아채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백작영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 정말!”
드레스의 자락에 덤불이 걸려 있있다.
사실 걸려 있다는 표현에는 약간 어폐가 있었다.
나뭇가지와 주름 장식이 단단히 엉켜서 도무지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익!”
몇 번이고 잡아당겨 빼 보려 했으나 더더욱 엉키기만 할 뿐.
‘이걸 어쩌면 좋아?’
기베르티 백작영애는 초조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던 중.
저 멀리 일마즈 남작영애가 보였다.
진지한 얼굴로 이곳저곳 뒤져 보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보물을 찾고 있는 듯한데.
‘정말, 유치하기는…….’
백작영애가 짜증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일마즈 남작영애! 이리 와 봐요!”
흠칫 놀란 일마즈 남작영애가 뒤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기베르티 백작영애?”
“뭐 해요? 지금 나 드레스가 덤불에 걸린 거 안 보여요?”
백작영애가 와락 언성을 높였다.
일마즈 남작영애가 반사적으로 백작영애 곁으로 다가왔다.
“이것 좀 풀어 봐요!”
백작영애는 당당하게 명령했다.
“…….”
남작영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연하다는 듯 시녀 취급을 하는 게 역시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작영애는 조심스럽게 드레스에 손을 뻗었다.
어떻게든 엉킨 부분을 풀어내려 하지만, 워낙에 단단하게 얽혀 있어서 쉽지가 않다.
“아, 그것도 못 해요!?”
백작영애는 잔뜩 신경질을 내며 남작영애의 손을 탁 쳐 냈다.
그러고는 드레스 자락을 마구 잡아당긴다.
그리고.
찌이익-.
드레스가 커다랗게 찢어져 나갔다.
두 사람이 바짝 얼어붙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