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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71)화 (72/163)

<72화>

얼음장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기를 잠시.

“드레스가 찢어졌잖아요!”

기베르티 백작영애가 왈칵 언성을 높였다.

“이게 얼마나 비싼 드레스인 줄이나 알아요?!”

느닷없이 제게로 쏠린 화살에, 남작영애는 억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저는 그냥 도와달라고 하셔서 도와드린 것뿐인데…….”

“지금 내게 대드는 거예요?”

백작영애가 남작영애에게 마구 삿대질을 해 댔다.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남작영애는 울상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정말, 이 드레스 어떻게 물어낼 거야!”

그러고도 분노를 쏟아내기를 한참.

“하아…….”

긴 한숨을 내뱉은 백작영애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남작영애를 바라보았다.

흡사 먹잇감을 위아래로 뜯어보는 뱀 같은 시선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할래요?”

“무, 무엇을요?”

“내 말에 잘 따라주면, 남작영애가 내 드레스를 엉망으로 만든 것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어요.”

백작영애가 생글생글 미소 지었다.

음험한 미소였다.

“어때요?”

“…….”

일마즈 남작영애는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 * *

“아, 심심하다.”

나는 무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레이디들은 제각기 눈이 뒤집힌 채, 보물찾기를 하러 숲속으로 떠나고.

나는 혼자 남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번 야유회의 주최자니까.

보물 위치를 다 알고 있으니, 보물찾기에 참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그냥 상품교환을 해 주는 역할을 맡았는데…….

“……라키어스는 역시 못 오려나?”

괜히 아쉬운 마음에, 나는 테이블 위에 축 늘어졌다.

요새 라키어스를 본 지 정말 오래된 것 같다.

나도 이것저것 사업이며 뭐며 바쁜 데다가, 아무래도 아빠들이 라키어스를 지나치게 빡세게 굴리는 모양인데…….

“아빠들한테 좀 적당히 하라고 해야지, 원.”

내가 입 안으로 재차 투덜거리던 그때.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스승님들께 뭘 말씀드리려고?”

동시에 누군가의 웃음 섞인 다정한 목소리가 울리고.

‘어라, 이 목소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라키!”

라키어스였다.

청량한 햇빛 아래로 금실처럼 반짝이는 금발, 붉고 선명한 눈동자.

금과 루비로 빚은 장미인 양 화사한 소년.

훈련을 막 끝내고 왔는지, 황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간소한 차림임에도.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들짝 놀란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뭐야, 어떻게 왔어? 과제들이 엄청 많다고 들었는데.”

“그야 과제들을 다 끝냈으니 왔지.”

라키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요새 스승님들이 훈련을 빌미로 나를 과로사 시키시려는 게 분명해.”

“에이, 그럴 리가…….”

“티티 네가 몰라서 그래, 요새 잠도 못 잘 지경이라니까?”

라키어스가 정말로 억울한 얼굴이 되어 내게 항변했다.

“훈련이야 그렇다 쳐, 따로 챙겨야 하는 과제는 왜 이렇게 많은지……!”

“그래, 그래. 알았어. 고생이 많네.”

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요새 라키어스가 엄청나게 고생하는 건 맞으니까.

그래도.

‘숙제하기 싫다고 투덜거리는 라키어스라니.’

난 힐끔 라키어스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언제나 어른스러운 라키어스가, 저렇게 제 나이대의 소년처럼 투덜거리며 감정 표현을 할 때마다.

나는 괜히 마음이 따뜻해지고는 했다.

그러던 중.

‘응?’

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금빛 머리카락이며 어깨가 촉촉하게 젖어 있어서였다.

“라키, 설마 오는 길에 비 맞았어?”

“아, 이거.”

라키어스는 대수롭지 않게 제 어깨를 털어냈다.

“급하게 오느라고.”

“아니, 그러면 차라리 집에서 쉬지 그랬어!”

“괜찮아.”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라키어스가 배시시 눈매를 휘며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티티, 나 걱정해 주는 거야?”

“…….”

그 해사한 미소가, 이상하게 심장 깊은 곳에 쿡 박히는 느낌이어서.

순간 나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원래 더 보고 싶은 사람이 보러 오는 거라잖아.”

“응?”

“그러니까 내가 보러 와야지.”

라키어스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을 맺었다.

“…….”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솜사탕을 통째로 베어 문 것처럼 입 안이 달았다.

솜털로 문지르는 양 가슴 속이 간질거린다.

“네가 처음으로 주최하는 야유회니까, 어떻게든 참석하고 싶었어.”

“……그, 그래?”

“응. 거기다 무리한 보람도 있고.”

라키어스는 턱을 괴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네 사냥복 차림은 이번에 처음 보네.”

“…….”

“잘 어울려. 예뻐.”

……쟤는 무슨 저렇게 숨 쉬듯이 칭찬을 한담?

“너는 내가 무슨 옷을 입든지 잘 어울린다는 말밖에 안 하잖아?”

괜히 부끄러운 기분에, 나는 괜히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러자.

“나는 티티한테는 거짓말 안 하는데?”

“…….”

“진심으로 예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거야.”

라키어스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샐쭉한 시선으로 라키어스를 흘겨보았다.

얜 정말, 쉴 새 없이 달콤한 말을 하는 게 버릇인가 봐.

이래서 원작에서도 온갖 여자들이 라키어스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건가?

그런데 그때.

“자, 받아.”

라키어스가 불쑥 조그마한 쪽지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보니…….

“보물 쪽지?”

다행히도 1등상은 아니었다.

참가하는 것에도 의의를 두기 위하여, 넉넉하게 뿌려 둔 보물 쪽지였다.

‘만약 1등상이었으면 정말, 레이디들의 반발로 내 목숨이 위험해졌을지도 몰라…….’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내가, 흘끗 라키어스를 바라보았다.

“이걸 왜 날 줘? 나는 어차피 보물찾기는 하지도 못 하는데.”

“티티 너도 보물찾기 하고 싶었잖아?”

“…….”

정곡을 찔렸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라키어스가 다정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너한테 주고 싶어서 찾아왔어.”

“……라키.”

“비록 직접 찾지는 못할지라도, 기분이라도 내면 좋잖아.”

그렇구나.

나는 공연히 쪽지만 만지작거렸다.

라키어스가…… 나를 생각해서 찾아와 준 거구나.

자꾸만 바보처럼 웃음이 날 것 같아서, 나는 입술 끝에 힘을 주었다.

그러던 중.

‘어?’

햇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금발 위로, 연둣빛 조그마한 무언가가 보였다.

나는 무심결에 라키어스를 손짓으로 불렀다.

“라키, 잠깐만 고개 좀 숙여 봐.”

그러고는 반짝이는 금발 위로 손을 뻗었다.

“머리에 잎사귀가 붙었어.”

“아, 그 쪽지를 찾다가 붙었나 봐.”

라키어스가 민망한 얼굴로 내 손에 들린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그 쪽지, 덤불 아래에 숨겨져 있었거든.”

그러고는 한숨을 푹 내쉰다.

“너한테는 매번 허술한 모습만을 보이네, 부끄럽게.”

“그게 무슨 소리야?”

“아냐, 아무것도.”

라키어스는 어쩐지 시무룩한 기색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딱한 눈빛으로 라키어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저렇게까지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데 그때.

“티티, 저 레이디는 누구야?”

라키어스가 목소리를 낮춰 내게 물었다.

무심결에 라키어스를 따라 시선을 돌린 나는,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어, 저 사람은?”

잔뜩 겁을 먹어 움츠러든 뒷모습.

일마즈 남작영애였다.

“잠깐만.”

나는 미간을 좁히며 남작영애를 관찰했다.

남작영애는 초조한 낯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남작 영애가 향하고 있는 곳은…….

‘레이디들이 소지품을 맡겨놓은 보관함 쪽인데.’

나와 라키어스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

“…….”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보물찾기가 얼추 끝났다.

제 몫의 쪽지를 찾아낸 레이디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레이디는 어떤 보물을 찾으셨어요?”

“아, 저는 참가상인가 봐요…… 레이디는요?”

“저는 4등상이네요. 로베르타 제과점의 과자 선물세트래요.”

“세상에, 너무 부러워요. 그럼 1등상은 누가 가져갔을까요?”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고함이 짜랑짜랑하게 울리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제 팔찌가 없어졌어요!!”

기베르티 백작영애였다.

“팔찌요? 팔찌가 갑자기 왜요?”

“혹시 숲에서 떨어뜨리신 건 아니고요?”

레이디들이 당황하여 술렁거렸다.

백작영애가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있어요? 팔찌를 끼고 숲속을 돌아다니면 거추장스러울 것 아니에요.”

그러고는 기세등등하게 대답한다.

“그래서 미리, 가방 안에 팔찌를 벗어 두고 갔다고요.”

으음, 사실 그걸 걱정할 거면 백작영애의 의상부터 점검해 봐야 하지 않나?

저런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은 주제에, 팔찌가 거추장스럽네 뭐네 해 봤자…….

내가 시큰둥한 얼굴로 백작영애를 바라보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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