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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73)화 (74/163)

<75화>

“내, 내가?”

아무래도 노공작님께서는 상당히 당황하셨나 보다.

방금 전까지 노호를 터뜨리던 건 언제고, 말까지 더듬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저번에도 할아버지를 오래 뵙지 못해서 아쉬웠는걸요.”

나는 일부러 시무룩하게 양어깨를 늘어뜨렸다.

“할아버지와 이대로 헤어지면 너무 서운할 것 같아요. 네?”

“……으음.”

할아버지께서는 침음을 흘리셨다.

사실 뭐, 기베르티의 타운하우스로 돌아가기에도 애매한 상황이긴 하다.

방금 전까지 기베르티 일가와 대판 했잖아?

그때 지크프리트가 작심한 듯 할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뭐냐.”

“타티아나도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저희 타운하우스에서 머무시지 않겠습니까?”

순간 할아버지가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지크프리트는 비록 겸연쩍은 기색이었으나, 그렇다 하여 내뱉은 말을 철회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네가 정 그렇게 말한다면, 그러마.”

할아버지는 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렇게 대답하셨다.

하지만 기뻐하시는 거 다 티 난다.

입술 끝이 희미하게 경련하고 계시는걸.

당장이라도 미소를 짓고 싶지만, 그를 억지로 억누르시는 것처럼 말이야.

“정말요? 신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까르륵 웃었다.

힐끔 곁눈질로 바라보니, 백작대부인은 흡사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제 손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마 아쉬워서 죽을 맛이겠지?

이대로 할아버지께서 오를레앙의 타운하우스에 머무시게 된다면.

백작대부인은 더 이상 할아버지를 핑계 삼아 지크프리트에게 말을 붙이지 못할 테니까.

‘어째 기베르티의 타운하우스로 돌아가면, 백작영애의 등짝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모습을 직관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 * *

우리는 다 함께 오를레앙의 타운하우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재채기 한 번을 잘못 한 죄로, 담요를 온몸에 칭칭 감는 형벌에 처해졌다.

‘음, 이 상황…… 뭔가 기시감이 드는데.’

나는 알쏭달쏭한 얼굴로 따뜻한 차를 호로록 마셨다.

“티티, 담요가 흘러내리잖아.”

때마침 불쑥 뻗어 나온 손이, 내 어깨 위에서 흘러내리는 담요를 고쳐 덮어 주었다.

라키어스였다.

“아, 라키. 왔어?”

나는 라키어스를 반겼다.

“야유회에서는 정말 고마웠어.”

아까 전, 나와 라키어스는 일마즈 남작영애에게 모든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리고 현 상황을 완벽하게 뒤집으려면, 남작영애의 증언만으로는 다소 약할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고.

‘라키, 둘째 아빠에게 부탁해서 증거 좀 가져다줄래?’

일전에 마탑을 방문할 적, 마탑은 모조리 키리오스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마탑 인근도 그 영향권에 포함되어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키리오스는 믿을 수 있지.’

내 계산은 적중해서, 키리오스는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증거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다만 라키어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적절한 시점에 증거를 내보일 수는 없었겠지.

그러자 라키어스가 뻔뻔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러면 칭찬해 줘.”

“…….”

나는 그만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분명 라키어스, 야유회 자리에서는 엄청 어른스러워 보였는데.

지금은 묘하게 어린애처럼 구네?

“자, 잘했어. 진짜로.”

“말로만?”

그렇게 되물으며, 라키어스가 붉은 눈동자를 반달처럼 휘어 미소 지었다.

순간 나는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와,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 봐.

세 영웅들도 아니고, 또래 남자애가 너무 잘생긴 바람에 말문이 막히는 경험은 얘가 유일할 거야.

‘그보다 도대체 무엇을 더 해 줘야 하는 거지?’

한참 머리를 굴리던 나는 조심스럽게 라키어스에게 물었다.

“그, 혹시 금전적인 보상이 필요한 거야?”

“……티티, 도대체 너는 날 무엇으로 보는 거야?”

라키어스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나는 조금 머쓱해졌다.

그치? 솔직히 나도 이건 아닌 것 같긴 했어…….

“그럼?”

“…….”

그러자 라키어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뭔데? 말해 봐.”

답답해진 내가 라키어스를 채근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라키어스가, 힐끔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요새는…….”

“요새는?”

라키어스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인 끝에.

모기만 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내 머리를 말려 주지 않아?”

진심인가?

나는 멍하니 라키어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라키어스의 목덜미부터 얼굴까지 순식간에 확 달아올랐다.

라키어스는 잘 익은 사과 같은 얼굴로 항변했다.

“예전에는 자주 말려 줬잖아.”

“아니, 그렇기는 한데…….”

라키어스는 오를레앙의 타운하우스에서 주기적으로 교육을 받고 있었다.

당연히 훈련 후 땀도 씻고 갔다.

다만 남자아이 특유의 무신경함으로, 라키어스는 가끔 젖은 머리 그대로 돌아다니고는 했고.

보다 못해 내가 몇 번 말려 준 것뿐이었는데.

‘……정말로 저걸 바라고 있었다고?’

잠시 할 말을 잃었던 나는, 곧장 라키어스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뭐, 어려울 건 없지.”

“으, 응?”

제게 다가오는 손길에, 오히려 라키어스가 덜컥 굳어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젖지도 않은 머리를 말려 줄 수는 없잖아? 대신 쓰다듬어 줄게.”

“…….”

동그랗게 뜬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나는 뚱하니 되물었다.

“왜, 싫어?”

“아니, 아니야!”

라키어스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숱 많은 금발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자,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스쳐지나갔다.

‘요 녀석, 답지 않게 칭얼거리기나 하고 말이야.’

약간의 심술을 담아, 나는 라키어스의 두피를 힘을 주어서 꾹꾹 눌렀다.

금세 내 손길에 적응한 라키어스가 키득키득 웃었다.

“티티, 간지러워.”

“그럼 손 뺀다?”

“아니, 그러지는 말고.”

소리 내어 웃는 라키어스의 얼굴은, 근심걱정 따위는 전혀 없는 평범한 제 나이대의 소년처럼 보였기에.

나는 조금 흐뭇해졌다.

‘강아지 같아.’

무심결에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굳이 따지자면 라키어스는 강아지보다는 여우 과지.

그런데 여우 털도 이렇게 부드러울까?

음, 그래도 라키어스의 머리카락이 더 부드러울 것 같은데?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중.

“둘이서 뭐 하냐?”

뚱한 목소리가 들렸다.

키리오스가 성큼성큼 거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라키어스는 제 스승을 향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오늘 티티를 도운 것에 대한 보상을 받고 있습니다만?”

“……너는 이상하게 꼬마랑 같이 있을 때면 순한 양처럼 군다?”

키리오스가 심술궂게 말을 덧붙였다.

“꼬마가 우리한테 수업을 받을 때의 네 모습을 봐야 하는데 말이야.”

그러나 라키어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뭐, 스승님들만 하겠습니까.”

“…….”

키리오스는 얼굴을 험악하게 구김으로써 스스로의 심란한 심정을 표현해 냈다.

“그보다 이번에는 정말 놀랐습니다, 티티 양.”

때마침 키리오스와 함께 들어온 세자르가 웃는 얼굴로 칭찬을 건넸다.

“이번 야유회에서 무척 곤란했을 텐데. 아주 똑똑하게 처리했어요.”

“예전에 기베르티 백작대부인도 그러더니. 하여간 기베르티 일가가 손버릇 나쁜 건 알아줘야 해.”

키리오스가 들으란 듯이 빈정거렸다.

그리고 난 현 상황에서 하나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지크프리트가 없다.

“첫째 아빠는요?”

“노공작님과 함께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내 질문에, 세자르가 대답했다.

“부자끼리 단둘이서 대화를 나눌 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 * *

“그래서, 난 왜 부른 게냐?”

노공작이 지크프리트를 돌아보며 삐딱하게 물었다.

주름진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이번에도 또 내게 무어라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그런 게 아닙니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차분하기만 했다.

“오랫동안 제가 아버지를 오해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오해?”

“예.”

노공작은 묘한 얼굴로 지크프리트를 응시했다.

처음이었다.

여태까지 사사건건 제게 날을 세우던 아들이, 저렇게 온유한 어조로 말을 붙여 오는 건.

“사실 전, 아버지가 평생 제 의견을 무시한다고만 여겼습니다.”

“뭐? 그게 무슨……!”

노공작이 발끈했다.

그러나 지크프리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무어라 더 화를 내려던 노공작이 멈칫했다.

지크프리트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마족들과의 전쟁에 나서는 것을 결사반대하셨죠. 제가 나간다면 부자간의 연을 끊겠다는 말씀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그건……!”

“그럼에도 아버지께서는, 제 뒤에서 여러 보급과 병력을 지원해 주셨지요.”

“…….”

노공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복잡한 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입가에 팬 주름이 더더욱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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