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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74)화 (75/163)

<76화>

“그 누구도 저희를 돕지 않았습니다. 제국민을 보호해야 할 황가조차 저희에게 모든 것을 떠맡겼지요. 그런데.”

선명한 금빛 눈동자가 노공작을 바라보았다.

오를레앙 공작가 특유의, 노공작을 쏙 빼닮은 눈동자였다.

“유일하게 저희를 도와주신 분이 바로 아버지이십니다.”

“…….”

“아버지께서 정말로 저에게 아무런 관심조차 없으셨다면, 그런 지원도 하지 않으셨겠지요.”

지크프리트가 두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떴다.

“솔직히…… 알고는 있었습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 또한 제 아집이겠지만요.”

“지크프리트.”

“그러나 타티아나를 제 딸로 삼고, 그 아이를 소중하게 여기게 되면서.”

타티아나.

그 이름을 입술 위에 올리는 그 순간.

내내 미세하게 긴장해 있었던 지크프리트의 표정이 처음으로 부드러워졌다.

“아버지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해, 라.”

“정말, 저 조그만 아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더군요.”

지크프리트의 얼굴 위로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솜털처럼 보드라운 미소였다.

“아이가 차근차근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처음으로 즐겁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심이었다.

모든 불합리와 폭력에 맞서 싸우는 용사로서, 인류뿐 아니라 모든 생명들을 동등하게 여기겠다고 결심했기에.

오로지 동정심 하나만으로 거두었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가…….

‘이토록 소중해질 줄은 몰랐어.’

지크프리트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저 아이에게는 제 목숨을 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평생 제가 겪어 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감정이었습니다.”

“……그랬느냐.”

“예. 그래서……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크프리트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마 아버지께서도, 제가 타티아나에게 가진 애정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셨을 테지요.”

“…….”

“그래서 제가 위험한 전장에 나서는 것을 만류하고 싶으셨을 테고요.”

노공작이 물끄러미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하던 지크프리트가, 천천히 노공작에게로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무뚝뚝한 아들은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공작은 제 아들의 진심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노공작은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주름진 입매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

지크프리트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복잡한 감회에 젖었다.

항상 굳건해 보였던 아버지.

영원히 범접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드신 건지…….

“나도…….”

잠시 후.

노공작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물기 어린 목소리였다.

“미안하구나.”

그 자그마한 속삭임 하나만으로.

지크프리트는 여태까지의 앙금이 모조리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 * *

며칠 후, 햇볕이 환하게 내리쬐는 오후.

나는 다른 레이디들과 함께 티타임을 가졌다.

“아무리 공녀님이 싫어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을 도둑으로 몰아갈 수가 있어요?”

“게다가 일마즈 남작영애에게도 정말 너무해요. 자기가 도둑으로 몰리기 싫다고, 남작영애더러 숨겨놓으라고 시키다니…….”

아무래도 레이디들 사이에서 기베르티 백작영애는 평판이 완전히 추락한 것 같다.

레이디들이 기베르티 백작영애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만 봐도 그랬다.

특히 일마즈 남작영애가 당한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 듯한데.

‘뭐, 그럴 만하지.’

왜냐하면 저런 괴롭힘은 언제든지 그녀들도 당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사실은 예전부터 공녀님을 저희 모임에 모시고 싶었어요.”

“그런데 기베르티 백작영애께서 워낙에 질색하시는 바람에…….”

레이디들이 억울한 얼굴로 제각기 입을 모았다.

“그러셨군요.”

나는 과자를 아작아작 씹으며, 다 이해한다는 양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기야 지크프리트와 화해하고 싶은 건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의 사정일 뿐.

백작영애 입장에서는 싫을 수도 있겠지.

저보다 더 신분이 높은 레이디가 모임의 일원이 된다면, 이전처럼 떵떵거리며 왕 노릇은 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공녀님.”

때마침 일마즈 남작영애가 조심스럽게 내게 감사인사를 했다.

“공녀님께서 이 모든 일을 꿰뚫어 보시고, 모든 일을 밝혀내 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정말 힘들어졌을 거예요.”

“아니, 뭐…….”

나는 괜히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그건 일마즈 남작영애를 위하려는 것보다는, 사사건건 내게 시비를 거는 기베르티 백작영애가 재수 없어서 그런 거였는데.

상식적으로 도둑으로 몰릴 상황에 처했는데 누가 가만히 있겠어?

게다가 처음 일마즈 남작영애가 괴롭힘을 당하게 된 계기도, 나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뭐, 잘된 거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수줍게 웃는 일마즈 남작영애의 얼굴은 무척 보기 좋았으니까.

한편 내가 레이디들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라키어스는 묘하게 새초롬해졌다.

“친구들이 많이 생겨서 좋겠네, 티티.”

레이디들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길.

나는 훈련을 마치고 들어서던 라키어스와 마주쳤다.

라키어스는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래도 내가 제일 친하지?”

……얜 갑자기 왜 이래?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냉큼 대답했다.

“당연하지. 세상 그 어떤 사람을 데려와도 너랑은 비교할 수 없어.”

진심이었다.

이 세상 누구를 갖다 댄다 한들, 이 세계의 남자주인공님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어?

“…….”

그제야 라키어스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다들 왜 이렇게 유치한 건지, 정말…….’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중.

난 문득 궁금해졌다.

“그건 그렇고, 아빠들은 어디에 계셔?”

보통 라키어스의 훈련이 끝나면, 다들 거실에 모여서 담소를 나누다가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헤어지는 게 보통이었는데…….

“아, 아마 노공작님과 같이 계실 거야. 아까 노공작께서 직접 부르러 오셨거든.”

“할아버지께서?”

뜻밖의 대답에,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라키어스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다만 노공작님의 표정이 조금 어두우셨던 것 같아서…….”

도대체 무슨 일이지?

호기심이 돋았다.

“일단 라키어스 넌 씻고 와.”

그렇게 라키어스를 욕실로 떠밀어 보낸 후.

나는 휙 고개를 돌렸다.

물론 엿듣는 게 나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우연히 듣는 건 나쁜 일이 아니잖아?’

나는 희희낙락 주방으로 향했다.

아빠들과 할아버지께 드릴 간식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 * *

“내가 이리 너희를 불러 모은 것은, 자네들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일세.”

노공작이 엄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공작령에 수상한 자들이 침투했었던 것 같아.”

“수상한 자라면…….”

“내 느낌으로는 마족들 같더구나.”

“마족이라고요?!”

경악한 지크프리트가 두 눈을 부릅떴다.

키리오스와 세자르도 반응이 다르지 않았다.

바짝 날이 선 세 사람 앞에서, 노공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마족이 발견된 건 아닐세. 다만 일상생활에서 아주 미세하게 마기가 느껴졌던 적이 있었어.”

노공작이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다만 정말 기이한 건, 정확하게 그 마기의 위치를 찾아내려고 할 때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거야.”

“사라진다고요? 혹시 신전에는 조언을 구해보셨습니까?”

“물론이야. 다만…… 마기라고 확신하기에는 너무 기운이 미약하다고 하더군.”

세자르의 질문에, 노공작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하지만 내 감으로는 마기가 맞아.”

“…….”

“…….”

“…….”

세 용사들은 나란히 침묵했다.

오를레앙 노공작.

오랜 세월 무가로서 명성을 떨쳤던 오를레앙 공작가의 수장.

비록 아들인 지크프리트보다는 못할지언정.

노공작은 적어도 인간들 중에서는 견줄 이 없을 정도로, 상당한 강자였다.

그런 오를레앙 공작이 저렇게 확신한다면…….

“확실히 마족들의 행태가 좀 수상하기는 해.”

키리오스가 미심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거의 6년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잖아.”

“맞아요. 전 마족들이 이렇게 조용히 살 줄 아는 종족인 줄 처음 알았답니다.”

세자르가 신랄하게 동조했다.

“물론 저희가 다섯 마왕을 토벌해서 구심점이 없어진 건 사실이에요. 예전처럼 조직력 있게 인간계를 공격하지는 못하겠으나…….”

“아, 그래도 약탈 같은 건 벌어질 법하지 않아?”

키리오스의 질문에, 노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네. 다들 평화에 지나치게 젖은 탓에, 마족이 얼마나 위험한지 까맣게 잊은 것 같아.”

그러고는 짧게 혀를 차며 말을 덧붙인다.

“어쨌거나 공작령 쪽의 마족 침입에 대해서는 내가 조금 더 조사해 보겠네. 다만 워낙에 흔적을 정교하게 지워 놔서,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지…….”

“그렇다면 제가 직접 내려가서 찾아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때 지크프리트가 질문을 던졌다.

노공작은 물론이고, 키리오스와 세자르까지도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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